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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균 Jul 31. 2017

약냉방칸이 전철 중간에 있는 이유

#14. 전철 약냉방칸에 숨겨진 넛지

더운 여름, 최고의 피서지는 지하철과 버스다. 원없이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다. 추위를 너무 많이 타서 에어컨바람을 쐬면 몸이 차가워져 버틸 수 없는 사람들,

몸이 유약해서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에는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여름에는

당최 그럴 수가 없으니 난감할 노릇이다. 냉방을 꺼 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 것 같고, 이를 어쩌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약냉방칸이다. 이 칸은 다른 칸보다 에어컨 바람이 덜 나와 사람들이 시원하면서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의 무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왜 지하철의 약냉방칸은 대개 중간 부분에 있을까?

다음 사진을 보면 약냉방칸의 위치가 대개 중앙 부분에서 조금 벗어나거나 중앙 부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약냉방칸의 위치를 끝자리에 하지 않았을까? 끝 자리에 약냉방칸을 하면 추위를 타는 사람들이

다른 칸에 비해 사람이 타는 비율이 낮은 끝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하여 균형 있는 지하철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오늘은 약냉방칸의 위치가 어떤 심리학적인 설계로 인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지

하나씩 하나씩 알아볼 예정이다. 지금부터 이 사소하면서 나에겐 꽤 심각했던 이유를 풀어나가 보자.


제일 빠른 환승위치는 대개 중앙에 있다

물론 지하철역마다 구조가 다 다르기 때문에 100% 이럴 것이다라는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대개 지하철역의 제일 빠른 환승출구나 출구로 나가는 비율은 열차의 중앙 부분이 높다.

물론 조심해야 하는 것은 비율이 높다는 것이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환승출구를 결정하는 건

사람의 심리가 아니라 건축구조가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위에 보이는 2호선 환승역의 최단환승 칸은 대개 중앙에 위치한다. 2호선 이외에도 지하철을 탈 때

출구의 위치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보통의 역들은 출구가 중앙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말은

즉, 열차를 타고 내리는 부분에서 제일 사람이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중앙 부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차 중앙의 혼잡도는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한 칸에서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것이 사람이 많으면

쉽지 않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이 지하철에 탑승했을 때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적다.


다음 사진도 마찬가지. 임의의 두 역을 선정하여 빠른 출구가 어디 있는지 보았더니 대개 끝자리 부분보다

중앙 부분에 출구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빠른 출구에는 보통 사람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순서를

기다리고 타는 것과 더불어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뛰어오는 사람들이 빠른 출구칸에 탑승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선택을 통해 사람들을 분산시키다

만일 약냉방칸이 지하철 양쪽 끝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승객들을 분산시키는 데에는 좋지만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자리를 옮기기 부담스럽다. 사람들을 치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기다린다면 그는 추위를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약냉방칸 제도는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간 부분은 다르다. 사람들이 많이 탑승하는 중간 부분에 약냉방칸을 놓는다면 추위를 타는 사람

대신, 추위를 타지 않고 더위를 많이 타거나 사람이 많으면 에어컨의 냉방이 있으나마나라 에어컨이 센

곳으로 옮기고자 하는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중앙에서 끝쪽으로 균형 있게 이동하게 된다. 즉 지하철의

약냉방칸을 구석이 아닌 중앙에 둠으로써, 약냉방칸을 쓰는 사람들에게 끝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인 선택권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이 결과가 가능했던 건 약냉방칸이나 냉방칸이나 냉방이 나온다는 것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만약 냉방칸과 냉방칸이 아닌 곳이라면 아마 사람들의 선택은 당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약냉방칸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면 그만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있던지 혹은 칸을 옮기던지 자신의 본능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열차의 중간부분에 그 칸을 놓은 것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문제사항 없이 인정받는 정책이 되었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권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맡기는 넛지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효과는 소수의 지시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얻었다. 또한 지하철의 한쪽 칸이 붐비는 현상도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다(물론 애초에 지하철이 혼잡하면 제외다)



오늘의 넛지 전략은 어쩌면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다수에게 선택의 카드를 내밀며

결과적으로는 무의식적인 선택을 하게 하여 선택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약냉방칸에도 이런 비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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