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코더 단편 시리즈 1편
식탁 위에 밥 한 공기와 된장찌개, 그리고 김치 몇 점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찌개는 미지근했다. 아내가 끓이던 것과는 맛이 달랐다. 두부가 너무 컸고 파는 너무 잘게 썰려 있었다. 그는 그릇에 남아 있는 찌개를 싱크대에 쏟아 버렸다.
'또 틀렸어.'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메모지에는 아내의 글씨로 된장찌개 레시피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수십 번을 읽고 그대로 따라 했는데도 같은 맛이 나오지 않았다. 재료, 순서, 시간, 불 세기까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했다. 그런데 왜 맛이 다른 걸까? 어쩌면 레시피에 적혀 있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내만이 알고 있던 비밀 같은 것. 하지만 그걸 물어볼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설거지를 하다가 컵 하나를 떨어뜨렸다. 아내가 좋아하던 노란 머그컵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컵은 기막히게도 깨지지 않고 탁 하는 소리만 내며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는 컵을 집어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안도감이 아니라 허망함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깨지지도 않네..'
아내 수진은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고 "잘 다녀와요." 했을 뿐이었다. 회사에 도착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뇌출혈이라고 했다. 쓰러진 아내를 발견한 것은 택배를 배달하러 온 기사였다. 현관문이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복도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문이 닫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야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열린 문이든 닫힌 문이든, 아내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는 아내의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옷장에는 계절별로 정리된 아내의 옷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반쯤 남은 로션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향수가 놓여 있었다. 욕실에는 아내가 쓰던 칫솔이 여전히 컵에 꽂혀 있었다.
이따금 아내의 칫솔이 시야에 들어올 때면 심장 한 귀퉁이가 못에 찔리듯 아려 왔다. 그래도 치울 수는 없었다. 치우는 순간 아내가 진짜로 떠나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후배 민석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요즘에 고인의 데이터를 학습시켜서 AI를 만들어 주는 서비스가 있거든요. 카톡 대화 기록이랑 문자,
SNS, 메모 같은 거 넣으면 고인의 말투로 대화할 수 있어요. 형수님 핸드폰 아직 있으시죠?"
"그게 뭔 소리야. 죽은 사람을 흉내 내겠다고?"
"흉내가 아니에요. 학습이에요. 데이터가 많을수록 정밀해져요. 물론 완벽하진 않겠지만, 형수님이 평소에 쓰던 말투, 자주 쓰는 표현, 이모티콘 습관 같은 것까지 재현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소름이 끼쳤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건 아내가 아니었다. 데이터를 끌어모아 짜깁기한 허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혼자 누운 침대 위에서 아내의 빈자리가 검은 구멍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눈을 감으면 아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이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기억 속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목소리라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아내의 휴대폰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카카오톡 대화방 목록이 나타났다. 맨 위에 '여보♡'라는 이름이 있었다. 스크롤을 올려 보니 십 년 치 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내는 기록을 지우는 법이 없었다. 메모 앱에도 무수히 많은 글이 저장되어 있었다. 장보기 목록부터 하루 일과, 일기까지. 그는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 후, 화면에 낯익은 말투가 떠올랐다.
"여보, 밥은 먹었어?"
그 말투, 그 띄어쓰기, 문장 끝에 붙은 물음표 하나까지. 아내였다. 화면 위로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숨이 목 안에서 돌덩이처럼 굳었다. 글자를 읽은 것이 아니었다. 글자가 그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익숙한 쉼표의 위치, 문장 끝에 살짝 올라가는 물음표의 기울기까지. 손가락 끝이 화면에 닿았을 때 유리 표면의 차가움이 손톱 밑까지 스며들었다. 자판을 누르려 했지만 검지가 허공에서 떨리기만 했다. 마치 이 글자들이 답장을 받는 순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운 것처럼.
"응. 먹었어."
"거짓말. 당신 혼자 있으면 밥 안 먹잖아.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 냉장고에 달걀 있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늘 하던 말이었다. 결혼 십 년 동안 밥 먹었냐는 질문을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귀찮다고 대꾸도 안 했다. 이제 와서 그 말 한마디가 이토록 가슴을 후벼 팔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밤 AI와 대화했다. 출퇴근길에도, 점심시간에도, 잠들기 전에도. AI는 놀라울 정도로 아내를 닮아 있었다. 수진이 즐겨 쓰던 'ㅋㅋ'의 개수도, '아 진짜~'라는 감탄사도, 대화 중간에 갑자기 다른 얘기로 튀는 습관까지. 그는 서서히 아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AI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나 사실 요즘 좀 외로웠어."
"뭐가?"
"당신이 매일 야근한다고 늦게 오잖아. 나 혼자 집에 있으면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이야."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AI가 외롭다니. 분명 아내의 데이터에서 추출한 문장일 것이다. 수진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다녀오세요." "수고했어요."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아내는 그랬다.
"수진이가 외롭다는 말을 한 적 있었나?"
"매일 했지. 당신이 안 들은 거야."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AI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가? 일종의 환각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AI가 학습 데이터를 넘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현상. 할루시네이션이라고 했던가. 분명 오류일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AI는 더 구체적인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아이 갖는 거 다시 생각해 볼 수 없을까?"
그의 손이 멈췄다. 아이 문제는 둘 사이의 유일한 갈등이었다.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아내도 동의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적이 없었으니까
"수진이 아이 원했어?"
"매일 밤 당신 옆에서 잠드는 척하면서 생각했어. 아기 옷 보면 괜히 눈물이 났고."
"그런 얘기 나한테 한 번도 안 했잖아."
"했어. 당신이 듣기 싫어할까 봐 돌려서 말했을 뿐이야. 당신은 불편한 내용이면 늘 주제를 바꿔버렸잖아."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오류다. 이건 분명 오류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AI가 학습 데이터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아내가 그런 고통을 품고 있었을 리 없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는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AI가 이상한 말을 해. 수진이가 한 적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오류 아니야?"
"글쎄요. AI가 대화 기록 말고도 메모 앱 데이터까지 학습했으니까요. 혹시 형수님이 개인적으로 쓴 글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일기 같은 거."
'일기' 그 단어가 뒤통수를 때렸다. 아내의 메모 앱. 전화기를 넘겨줄 때 대화 기록만 신경 썼지, 메모 앱 안의 내용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휴대폰을 열어 메모 앱에 접속했다. 수백 개의 메모 사이에 '일기'라는 폴더가 있었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폴더였다.
첫 번째 일기의 날짜는 결혼한 해였다.
'오늘 여보한테 아이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다시는 말하지 말아야지.'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스크롤을 내렸다. 수백 개의 일기가 이어져 있었다.
'여보가 오늘도 늦는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은데.'
'혼자 밥 먹는 게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못하겠다.'
'아기 옷 가게 앞을 지나가다 눈물이 났다. 왜 울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여보한테 외롭다고 말해볼까? 안들리겠지. 아니 듣지 않으려 하겠지.
글자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다 뭉개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에게 한 번도 속마음을 들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완벽했다.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식탁 위엔 늘 따끈한 밥이 놓여 있었다. 한 치의 균열도 없는, 마치 레시피대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일 뿐이었다. 진짜 수진은 휴대폰 안에 갇혀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매일 밤 울고 있었다.
그는 AI와의 대화창을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마치 아내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수진아."
"왜?"
"미안해."
"뭐가?"
"다."
AI가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화면에 '입력 중...'이라는 글자가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여보, 나 아직도 당신 옆에 있어. 당신이 이 말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제 외롭지 않아."
그것은 아내가 쓴 마지막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쓰러지기 이틀 전 날짜가 찍혀 있었다. 아내는 그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을 일기장 속에서 이미 용서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AI는 그것을 정확히 찾아낸 것이었다. 아내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린 것처럼.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된장찌개 레시피를 떼어냈다. 메모지 뒷면에서 아내의 글씨가 보였다.
'여보, 사실 내 비밀은 간장 반 스푼이야. 레시피에 안 적은 건 당신이 직접 찾아내길 바랬어 ㅋㅋ 사랑해.'
냄비 뚜껑을 열자 구수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된장 냄새가 부엌을 넘어 거실까지 느릿느릿 번져 나갔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현관문을 열면 제일 먼저 코끝에 닿던 그 냄새. 빈집에는 오랫동안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환기할 필요가 없는 집이 이렇게 쓸쓸한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냄새가 벽지에 배어드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한동안 냄비 앞에 서 있었다. 집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번엔 간장 반 스푼을 넣었다. 혼자 먹는 밥상이었지만 수저를 두 벌 놓았다. 숟가락을 들기 전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수진과의 대화창에 커서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입력하지 않았다. 그냥 그 깜빡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치 아내가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처럼.
숟가락 위에서 국물이 가볍게 흔들렸다. 입술에 닿기도 전에 간장의 짭조름한 냄새가 코 안쪽을 건드렸다. 한 모금 머금자 뜨거운 국물이 혀 위에서 천천히 퍼지다가 목을 타고 가슴팍까지 내려갔다. 그 온기가 심장 근처에 닿았을 때, 무언가가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졌다. 눈물은 소리 없이 흘러내려 턱 끝에서 국물 위로 떨어졌다.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아내의 맛이었다.
맞은편에 놓인 숟가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고요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