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하의 부캐 이야기-방송 편(7)
2022년 10월 브런치를 통해 강연/섭외 제안이 들어왔다. 브런치에 제안 기능이 있는 줄도 모르던 상황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제안이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교양코미디쑈 <상식의 시대>라는 곳이었다. 팟캐스트 진행자 분은 "'조직 문화'라는 키워드 검색을 통해 여러 글을 읽다가 (쪼하님의) DAO 관련 글들을 보고 흥미가 생겨 연락을 올린다"라며 섭외 이유를 밝혔다.
회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온 섭외 요청이다 보니 우선 걱정이 앞섰다. (당시 회사 내부 사정으로 이직을 앞둔 상황에서 결혼식 준비를 위해 잠깐 쉬고 있는 상태였다.) 가상자산 전문 기자라는 타이틀을 악용해 특정 가상자산 추천을 종용하거나, 주제가 괜찮다고 해도 섭외한 곳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거나 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를 통해 들어온다면 1차 필터링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전히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선 채널을 먼저 검색했다. 팟캐스트 채널 '팟빵'에서는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방송인 듯했다. 방송도 몇 편 훑어봤다. 공포영화, 자동차 튜닝 등의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가상자산/블록체인 관련 콘텐츠는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가상자산 종목 추천 방송은 아니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방송 분위기가 가벼워 보여서 살짝 걱정이 됐지만 실제로 콘텐츠를 보니 해소됐다. 가벼운 공포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자극전이 이론', '기질 이론' 등 심오한 내용으로 흘러가는 전개가 눈길을 끌었다.
이후 진행자 분의 약력을 검색했다. 2018년부터 가상자산 분야를 취재하면서 약간의 인간 불신을 겪고 있는 터라 이는 꼭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이미 수필집을 발간한 작가이자 중앙일보에 '시집 읽기'라는 기고를 연재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때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한때 시로서 공모전 수상을 몇 번 했으며 소설가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이런 글을 쓸 사람이라면 순수한 사람이겠다'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남의 등을 처먹지 않을 확률이 높다.)
미팅을 잡았다. 가상자산을 모르는 분일 테니 A부터 Z까지 설명해야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약속 장소에 향했다. 방송으로 본 진행자 분은 텐션이 높아 보여서 긴장도 됐다. MBTI 중 'E'가 있음에도 텐션이 높은 사람은 늘 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웬걸, 진행자 분은 시종일관 신뢰감이 있는 목소리로 미팅을 진행했다. 게다가 이미 여러 자료를 찾아봤는지 이미 웬만한 내용은 다 알고 있으며 내게 꽤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미팅 이후 같이 대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뢰도는 더 상승했다. 진행자 분이 인용한 논문과 자료의 양과 질이 상당했다. 그걸 보니 나도 더욱 의욕적으로 자료를 찾게 됐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분도 나름 나와 비슷한 걱정을 했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애초에 가상자산 콘텐츠가 이번이 처음인 데다 가상자산을 투기로 보는 시선들도 있어서였다. 크립토 기자를 섭외한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그런 사람 나와봤자 가상자산 투자 추천만 하지 않냐"는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아직 가상자산이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드디어 방송 날. 역시나 DAO를 주제로 방송을 진행했다. 안정감이 있다고 느꼈던 진행자 분의 목소리가 확 높아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해왔던 방송 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덕분에 몇 마디 하자마자 NG가 났다.
나는 평소에도 목소리가 낮은 편인 데다, 그동안 무게감 있는 방송에 주로 나갔기에 (출연한 유튜브들조차 상당히 진지한 채널들이었다) 방송에서는 목소리 톤을 더 내리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행자와 게스트의 방송 톤이 너무나도 어긋났다.
결국 내 텐션을 최대한 끌어올리기로 했다. '방송 출연이 아니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자'라고 마음을 먹고 방송에 임했다. 그랬더니 갑작스러운 진행자 분의 드립을 받아 칠 여유까지 생겼다.
다른 방송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때 "그건 아닙니다" 정도로 정제된 표현을 썼다. 하지만 이번 방송에서는 "아니에요"라며 툭 치고 들어갔다. 진행자 분이 "비탈릭 부테린 아저씨"라고 표현하자 "아니에요. 저보다 어려요. 20대일 걸요?" 하면서 반박도 했다. 다른 방송이었다면 '아저씨'라는 표현이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굳이 지적을 하지 않고 넘겼을 내용이었다.
재미만 챙긴 게 아니라 DAO의 개념부터 '더 다오(the DAO) 해킹' 사태, 이더리움 클래식 하드포크까지 DAO의 역사를 꽤나 깊게 다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문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다른 방송 출연 때와는 달리 많이 웃고 떠들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3개월 만에 방송이 나왔다! 어찌 보면 길다고 느낄 수 있는 20분짜리 영상이지만 중간중간 깨알 같은 편집으로 인해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 방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