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J 엄마'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이유

by 쪼하

요즘 입을 다물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워킹맘들과 '아이 곁을 지키지 못하는' 애환을 공유하다가도, "그래도 너는 집에서 일하니까 아이를 좀 더 챙길 수 있잖아"라는 식의 위로 섞인 말에 한 번 침묵한다. 직장에 나가는 친구들의 출퇴근 스트레스, 인사 고과나 승진에 대한 고민 앞에서도 침묵한다. 그렇다고 전업주부 엄마들과 소통이 완벽한 것도 아니다. "외벌이는 늘 돈이 쪼들려 고민"이라는 토로 앞에서 적게나마 돈을 벌고 있는 나는 다시 입을 닫게 된다. 어느 쪽에도 100% 공감할 수 없고, 내 고민을 100% 털어놓을 곳도 없다. 뭐라고 말을 얹는 것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기만이 되거나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저 웃어넘긴다. '프리랜서'라는 탈을 쓰고는 있지만 사실상 전업주부도, 워킹맘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업무도, 육아도, 살림도 완벽하게 해내겠다고 설치다가 결국 번아웃이 와버렸다. 이전까지는 촘촘히 설계된 계획표가 썩 마음에 들었다. 오전 9시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10시에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 소소한 집안일을 하고 오후 2~3시까지 일을 하고 오후 5시 전까지는 아이 저녁 준비를 위해 식재료를 다듬고 운동을 하거나 중고 거래를 하거나 공구 제품을 사러 발품을 팔거나 등등을 했다. 오후 3시부터 아이를 하원시키고 문화센터에 가기도 했다. (문화센터 수업이 없는 날에는) 오후 5시에 아이를 찾아와서 좀 놀아주다가 요리를 마무리하고 아이 저녁을 먹였다. 그러고 오후 7시 30분이 넘어서 남편이 오면 저녁을 차려주고 오후 8시~8시 30분쯤 남편이 아이를 씻기면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는 등 남은 집안일을 했다. 썩 만족스러웠다. 어느 순간 혼자 있을 때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오열하면서 "하기 싫어"라면서 울부짖기 전까지는.


위의 일상은 아이가 밤 11시가 넘어서 잠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꼬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오전 8시 30분이 넘어서 일어났고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등원 준비 시간이 길어졌다. 매일 9시 30분을 넘겨서 등원하게 됐으며 어느 날은 간신히 업무 시간 직전에 보내기도 했다. 하루는 아이를 등원시키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하는 바람에 가정보육과 재택근무를 병행하기도 했다. 촘촘히 짜여있다고 생각한 일상이 알고 보니 얼기설기 얽혀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로서도, 주부로서도, 프리랜서로서도 어느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특히 아이가 다치거나 아플 때, 또는 아빠만 찾을 때 내 속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더 잘 챙기고자 커리어를 내려놓은 건데 실상은 사회에서 그저 도태되고 있을 뿐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날 잠식했다.


그저 그렇게 지리멸렬한 일상을 영위하던 나날이었다. 최근 헤드헌터를 통해 인지도 있는 기업에서 풀타임 정규직 제안을 받으면서 고민이 더 커졌다. 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곳인 데다 연봉도 꽤 높다고 알고 있어 구미가 당겼다. 막상 지원서를 쓰기에는 망설여졌다. (뽑아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만약 그곳에 들어간다면 일과 삶의 균형은 완전히 포기해야 할 터였다. 문제는 예전 직장에서 겪었던 문제(육아를 도와줄 사람의 부재)는 여전하다는 점이다. 워킹맘 친구는 등하원 도우미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비용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고 엄마로서 할 일이 확 줄어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친구는 한때 남편이 1년 동안 지방 근무 발령이 나서 혼자 일과 육아 병행을 했는데도 도우미를 쓰니 할 만하다고 했다. 솔깃했다.


고민거리는 남아 있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는 이상 내가 고수해 온 육아 철학은 다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가 24개월인 지금까지도 미디어 노출을 금지하고 있다. 집에 TV는 있으나 아이가 볼까 봐 틀지 않은 지 오래다. 시판음식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동전 육수'조차 쓰기 싫어서 육수를 직접 낼 정도로 아이의 음식에 예민하게 굴고 있다. 가끔 외식을 다녀오면 아이의 변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요리하고 살지만 이는 '여유가 있는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일주일에 2~3일은 업무상 술자리가 있는 직장에 다닌다면? 불가능하다. 더욱이 도우미는 완전히 남이기에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할 리가 없다. (심지어 이 부분은 친정 엄마한테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동안 내가 자부심으로 삼았던 부분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단어는 '완벽주의자' 아닐까? 어느 누구든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완벽함'이지만 현실적으로 잡는 기준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자기 나름의 완벽함'이기에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때 더 빨리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 MBTI의 'J' 성향까지 더해지면 사서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이 된다. J 인간은 흔히 알려진 계획적인 성향이라기보단 통제적인 성향에 가깝다. 그들이 계획적인 이유는 단순히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다. 사소한 일이든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기에 계획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짜서 변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없애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놓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식단'이나 '커리어' 자체가 아니라, "나는 이 모든 걸 해내는 사람이야"라는 자아도취적 통제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아이와 통제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나의 J적 완벽주의는 무력하기만 하다. 고액 연봉의 제안과 아이를 위한 집밥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나는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는가? 촘촘하게 짠 그물일수록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쉽게 찢어지는 법이다. 나의 일상은 너무 촘촘해서 숨 쉴 구멍조차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 계획이 틀어질 때 와르르 무너졌던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 삶에 신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는 자책을 멈추기로 한다. 전업주부와 워킹맘 그 경계 어딘가에서 서성이는 지금의 모습 또한 나의 삶이다.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게 될지라도 도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이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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