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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달블루 Sep 26. 2022

외도와 애도

Taubensee

 여행은 외도 같다. 평상의 길에서 벗어난 길을 가던, 바람을 피우건,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자고 싶은 것, 새로운 장소를 탐하는 건 외도다. 유목민도 바람을 피울까. 카사노바도 여행을 할까. 한 곳에 뿌리가 박히면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도 새로운 곳으로 튕겨져 나가고 싶다. 익숙함이 지루함을 만들고 새로움이 두려움을 만든다. 내 삶의 관성은 여지껏 새로움과 두려움을 향해 뻗고 있었다. 모든 극단적인 경우가 그러하듯, 더 이상 갈 대가 없어지진 않을지, 새로움보다 두려움의 크기가 커지고 걱정은 많아진다. 이러한 경우엔 물리적이고 적당한 여행이 좋다고 생각한다. 쉬운 게임의 퀘스트를 풀듯 적절한 여행을 떠났다. 적어도 따뜻한 안정감으로부턴 멀어지고 싶은 걸까. 위태로운 기분이 들수록 여행을 떠나고 있다. 지루한 천국보다 괴로운 지옥이 좋다고 자신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면서,,, 난 아주 이중적이고 찔찔한 인간이다. 



 돈 없는 자본가이자 천박한 사업가로 전락한 나는 동료와 함께 뮌헨으로 간다. 고상하고 멋진 건축가 5명과 뮌헨에서 랑데뷰하고 티롤 산맥의 Taubensee를 향했다. 적당한 하이킹 코스가 있다고 해서 솔깃한 마음에, 티롤의 작은 굽이를 걸어보겠다고 2시간 정도 버스를 탔다. 내가 있었고, 나의 동료이자 감성적인 Sue가 있었고, 하여간 정신없는 헤어스타일의 huhu가 있었고, 루이스 칸이 좋다는 후니가 있었고, 후니의 알마? 옌이 있었고, 신기한 성격의 소유자 항형이 있었고, 속이 좁고 섬세하고 디테일은 있으나 두꺼운 프레임 없이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짜증 나지만 착한 건축 덕후이자 넷플릭스를 주변인과의 대화를 위해 공부하듯 보는 애증 하는 윤수가 있었다. 

 옛날 옛적 huhu, 윤수와 함께한 글쓰기 모임이 있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윤수가 되게 미웠었는데, 다시 만나니 누구보다 반가웠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뭐랄까, 포근했달까. 그 당시 둘이서 정말 빤쓰 벗고 싸워 댔으니, 서로를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분도 있었고 뭐,,, 그 당시 huhu는 글을 게으르게 써 댔으니 모를 감정. huhu는 당시에 우울한 여자에게 빠져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a.k.a S 씨라고 불리던 그 여자는 굉장히 꿉꿉하고 우울한 여자로 묘사가 된다.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고 huhu의 눈을 통해 본 S 씨는 그랬다.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희대의 불타는 연정인 양 huhu가 궁상을 떨 동안 윤수와 나는 huhu를 위로하느라 지쳐있었다. 와중에 side pot으로 나와 윤수는 윤리관이 어쩌고, 피터 아이젠만이 어쩌고, 건축이 어쩌고 영화는 음악은 어쩌고 하며 싸우고 있었다. 


'난 너에게 일종의 정직에 대한 강요를 느껴.../... 너야말로 네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어떨까?'

 -김윤수-


'너는 글을 쓰는 성실함은 가졌지만 그 글에 책임은 지지 않는 비겁한 인간이야'

  -고달블루-


'그날 밤 나는 에스 앞에서 에스를 위해 그동안 연습했던 빛과 소금의 발라드곡을 피아노로 연주해주었다'

 -huhu-

 

Starnberg 호수의 작은 수로


 사실 Taubensee를 가기 전 윤수와 sue와 나와 huhu는 Starnberg 호수를 갔다. Starnberg 호수에는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지은 건축 덕후 막시밀리안 2세의 메모리얼이 있다. 그는 국고가 탕진할 때까지 성을 지어댔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죽음을 맞는다. 막시밀리안은 수영을 아주 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수면이 낮은 Starnberg 호수에서 사채로 발견된다. 부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참모들이 죽인 건 아닐까 한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막시밀리안은 국정운영을 개판으로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욕을 먹던 왕. 하지만 지금은 막시밀리안이 만든 건축물들이 뮌헨과 뮌헨 근교의 대표적인 명물이 되어있다. 그의 예술가적 기질과 억울한 삶을 동경하는 나는 아주 여러 번 Starnberg 호수를 방문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꼭 방문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두 개의 십자가


 호숫가에 박힌 십자가는 막시밀리안이 사채로 발견된 위치다. 그 앞에 십자가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십자가이다. 하나의 십자가는 장소성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장소성을 기념한다. 난 이 거울같이 대치되어있는 두 개의 십자가를 좋아한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듯(영화 같은 삶, 진짜 같은 그림), 허구가 현실에 기대어 있지만 허구 없이는 살아내지 못할 현실이 되었듯, 거짓말이 사실을 꾸며주듯,,,

 물리적으로 이곳에 방문하는 순간 사건과 장소는 하나가 된다. 충분한 애도를 가질 수 있는 이 구조에 나는 모종의 편안함을 느낀다. 찾아가기에는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과하지 않게 숨어있으며, 고요한 호수를 구경할 수 있다. 겸손하고 절제된 슬픔. 건강하고 시원하게 누군가를 애도할 수 있다. 


막시밀리안 2세의 메모리얼 건축물


 글쓰기 모임 시절 윤수와 나는 '피터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대해 크게 싸웠다. 간략히 하자면 죽음과 비극을 애도하는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베를린에 위치한 메모리얼은 비윤리적인 기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나의 논지였고, 윤수는 아이젠만의 추상적인 모뉴먼트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봐줄 만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또 나의 입장은 '추상적인 모뉴먼트' 자체가 아이젠만의 아이디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애도의 방식을 자랑할 뿐이라고 얘기했고, 윤수는 그것 말고 그럼 뭔 방법이 있냐는 식이었다. 와중에 huhu는 S를 위해 피아노를 쳐댔다. 그러다 덜컥 huhu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윤수의 귀여운 강아지 구름이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huhu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촌 형 도니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에는 루이스 칸의 다카 국회의사당 사진이 들어있었다. 



"가정생활에 대한 실패는 위대한 사람들의 필연적 연관성이다. 그의 아들은 그걸 이해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겐 사랑을 주지 않았을 수 있지만 당신은 그걸 이해해야 한다."


국회의사당을 위해 목숨을 바친 루이 칸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방글라데시 건축가를 보여주다 카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히 미소 짓는 나다니엘을 비춘다. 그러고 나다니엘은 나레이션으로 클로징 멘트를 읊는다. 루이 칸은 이제 나다니엘에게 현실이 되었고 한 명의 인간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지금도 아버지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고 있다는 솔직한 심정도 밝힌다. (루이 칸이 자기 어머니를 힘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칸을 용서하는 어머니를 답답해하는 장면도 나왔었다.) 그렇게 영화는 방글라데시의 거대한 호수에 비친 저녁노을을 비추고 이곳에서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겠다며 끝난다. 


나는 마지막 장면의 모놀리틱 한 건물과 잔잔하고 거대한 호수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대자연 앞에 서면 상처를 잊는다고 한다. 왜일까? 표현하기 어렵지만, 해보자면. 해는 뜨고 지지 오고 감은 없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절대 바뀌지 않을 관성이 느끼고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좌절한다. 자연의 그런 무기력하게까지 느껴지는 무한한 단조로움에 나의 고민들도 함께 무기력해지고 상처를 잊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안도를 느끼고 몸이 편안해진다. 루이 칸은 영원한 건축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고대 유적과 중세성들로부터 영감을 받곤 했다.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건축의 불멸성을 그의 건축에 담아내고 싶어 했다. 또, 그의 건축에서 자주 보이는 비워져 있는 여백의 공간은 또 하나의 불멸의 상징인 자연과 조화를 위해 설계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나다니엘 칸의 모습이 종종 나오지만 감정이 절제되게 보여지는 이유는 정적이고 숭고한 루이 칸 건축을 천천히 훑은 이미지와 계속 교차돼서 나와서가 아닐까. 천천히 훑은 이미지는 시간의 단조로움을 나타내고 그것은 감정적 안도를 불러일으킨다.


그럼 나다니엘 칸은 극복의 의미로 그러면 마지막에 방글라데시의 자연을 담았을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극복한 것일까? 그는 아버지의 만행을 고발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착각했다. 감독은 정말 처음에 밝힌 말 그대로 루이 칸이란 사람을 더 잘 알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나다니엘 칸은 그를 더 잘 알게 되어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진 않았다. 그저 그가 왜 그랬을까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다니엘은 이젠 그를 옆에 두고 계속 살아가지 않을까. 아버지의 존재는 자연과 같지 않을까? 내가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나의 안과 밖에서 계속 발견되는 영원한 존재이니까.


-huhu-


 할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huhu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니에게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편지 형식을 갖지 않는다. huhu는 루이스 칸과 그의 아들 나다니엘의 관계를 빌려 도니에게 모종의 편지를 썼다. 루이스 칸의 이야기는 도구화되어 액자 밖으로 나오고, 도니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또다시 액자 밖으로 나오면 huhu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현실의 것, 그것도 장례식장에서 느낀 그 이야기는 huhu의 손으로는 쓸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호수에 위치한 건축물 사진은 무슨 의미일까. 루이스 칸이나 루이스 칸의 건축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루이스 칸도 도니도 huhu의 애도를 위한 도구가 되었듯, 루이스 칸의 건물은 사진 속 호수 이미지에 봉사하고 있다. huhu는 루이스 칸의 건축물을 반쪽자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장소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루이스 칸의 건축물은 반쪽짜리보다 못한 의미 없는 오브제가 될 것이다. 다른 이의 이야기가 없다면 huhu가 빗대어 느낄 애도가 없다. 멀다면 멀고 가까우면 가까웠을 할아버지의 죽음이 모호하지만 강력했을 것이다. huhu의 글은 모뉴먼트였고 huhu의 글쓰기는 호수였다. 



 공교롭게도 윤수의 강아지 '구름이'도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윤수도 그것에 관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그 글을 이곳에 공유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다. 윤수 개인의 소회를 넘어서고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글은 윤수가 구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얼마나 슬픈지에 대한 일기였다. 모두가 그 글에 대해 슬퍼했다. 그리고 그러한 글을 우리의 모임에서 공개해준 것에 대해 지금도 그때도 윤수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시금 아이젠만의 메모리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슬픔을 전시하게 되는 문제와 슬픔을 즐기게끔 프로그램되어있는 인간. 그리고 그것이 중독적이라서 문제라는 이야기. huhu의 할아버지와 나의 친구와 윤수의 구름이가 생을 다하고 겪게 되는 애도에 대한 문제. 당시 윤수와 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던 '조론'이 쓴 글을 공유하고 싶다. 



아이젠만의 건축물은 단순히 공유를 넘어서 공감의 영역까지 들어가도록 만들어요. 형이 느낀 것들이 있죠. 형이 건축물 안에서 어떤 ‘불안감’을 느꼈다면, 그건 그냥 건축물의 구조가 형에게 불안감을 안겨다 주는 것뿐이에요. 그건 절대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람들이 느꼈던 고통을 이해하거나 알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젠만의 건축물은 그 사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이해’ ‘공감’의 과정이 들어가도록 만들어요. ‘형의 불안감’=‘건축물의 형태’가 아니라, ‘형의 불안감’=‘그들의 고통을 간접체험, 공감, 이해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주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뭐가 사라졌을까요.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 고통의 고유성이 사라져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각각 느꼈던 고통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그것이 각자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나의 고통’으로 치환되죠. ‘나의 고통’으로 치환된 아우슈비츠의 고통은 이제 내가 알만한 고통이 되어버리죠. 이런 과정을 통해 트립어드바이져와 같은 리뷰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고통으로 치환해버리는 관광객들이 아니라, 나의 고통으로 치환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당사자가 아이젠만(건축물)이라는 거예요


-조론-


Taubensee 근처 식당에서 먹은 것들

 


 애도는 어려운 일이다. 먹고살자고 살지만, 먹지도 못하게 슬퍼지고 살지도 못하게 죽어버린다. 죽음이 지천에 깔려있고 요령 없이 대응해야 한다. 애도를 전시하고 기념하는 일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다. 도덕군자의 삶은 윤리를 알기엔 어리숙하다. 도덕은 마침표, 윤리는 물음표다. 애도의 방식은 각자의 몫이다. 




 섣부른 위로와 과장된 공감만큼 그지 같은 게 없다. 자주자주 주변의 죽음이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무어라 전할 수 있는 말이 내게 없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너무 슬프겠다. 힘내. 같이 허공을 떠다니는 말은 예의가 아니고 공감해주는 말 또한 아마도 과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해당하는 죽음에 대해 슬프지 않기 때문이다. 또,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의 마음 또한 내가 단 1%도 알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아주아주 어렴풋이,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동의 정도가 내 마음속에 있다. 슬퍼하고 있을 어떤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써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식의 노력밖에 없다. 단지 내가 상대의 슬픔을 어느 정도 노력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 그걸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것과 어느 정도의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에 뭐라도 써야 한다는 나의 윤리관 정도. 내가 이 글에서 어떠한 죽음을 기리고 슬퍼하는 것 또한 아이젠만의 건물밖에 안 되는 것일 터이니. huhu의 루이스 칸처럼, 나의 기행문을 핑계 삼아 어딘가 떠도는 말들을 주워 담아 보았다. 우리가 보았던 Taubensee 호수 사진을 공유합니다. 



 지루한 천국보다 괴로운 지옥이 좋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건 나의 상상력 안에 천국과 지옥 사이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 이후의 시간이 천국도 지옥도 아니길 바란다. 뿌리가 박히면 새로운 곳을 찾아 튕겨져 나가듯, 현생에 뿌리박고 살다 보면 좀 더 새롭고 신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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