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semite
계절마다 냄새가 다르다.
나는 봄이 졸라 싫다. 특유의 생명력과 신나 보이는 사람을 보면 내 처지가 비교되어 우울해진다. 꾸물꾸물 올라오는 따스한 기운은 등껍질을 따갑게 간지럽히는데 그 느낌이 굉장히 불쾌하다. 낮과 밤에 크게 차이나는 일교차도 띠껍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아니꼽다. 휘날리는 벚꽃은 술집 여자 향수 냄새만큼 단발적이고 저열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정절을 지키던 지고지순한 눈송이를 잊은 사람들, 아름다운 눈은 녹아 없어져 엇비슷하게 화려한 벚꽃잎에 휘몰아치듯 빨려 들어간다. 봄은 천박한 계절. 나를 어지럽히고 슬프게 만드는 계절. 짧고 화려한 계절. 꽃내음은 조신하지 못하다.
한 해가 거듭 될수록 여름은 좋아진다. 예전에는 땀이 나는 게 싫었다. 땀이 옷을 적시고 목이 마르고 하여간 사람을 푹푹 찌게끔 하는 여름이 싫었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순전히 남들을 의식해서였다. 땀냄새가 날까 봐. 가벼운 옷이 전혀 멋지지 않은 나의 몸매를 드러내게끔 하니까. 못생긴 내 엄지발가락이 쓰레빠 밖으로 튀어져 나오니까. 내가 점점 뻔뻔해지는 것인지. 내 냄새가 어떻든 내 몸이 어떻든 발가락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막 풀어헤치고 뜨거운 태양에 몸을 맡기는 어떤 홀가분함. 몸 구석구석 묵은 곰팡이를 살균하듯 뜨거운 햇빛 아래 뛰어다닌다. 디톡스라고 할까나. 하여간 장마의 무겁고 웅장한 빗줄기도 시원하고 거리낌이 없다. 좋아진다. 여름과 화해하고 있다.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 아직까지 단풍의 아름다움에 눈이 가지는 않지만, 가을은 예전부터 썩 맘에 들었던 계절이다. 음악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날씨랄까. 단점이 있다면 담배가 빨리 탄다. 여름에 한 가치 피던 담배 가을에는 두 가치를 피워야 한다. 슬슬 동네 어르신들이 드럼통에 뭔가를 태우기 시작하는 계절. 하늘이 높아지는 건지 뭔지 공창이 느껴지는 그런 계절이다. 슬슬 모기도 죽어가고 부패하던 것들이 숨을 죽여가는 시간. 스멀스멀 스모키 한 향들이 곳곳에서 등장해 술맛도 나고 딸기도 기다리고 굴도 기다리는 그런 경건하고 쾌적한 시간.
겨울 냄새는 특히나 다양하다. 낮은 온도 덕에 불쾌한 냄새를 가장 덜 맡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냄새들만, 생존한 것들만 향을 낸다. 차가운 바깥공기에 숨을 쉬는 기분은 생존신고를 하듯 확실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겨울은 가장 따뜻한 계절이다. 국을 끓이고 압력밥솥에 밥이라도 하면 창문에 끼는 뿌연 자국이 나를 설레게 한다. 벽난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한국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고. 벽난로가 없는 환경에서도 벽난로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계절. 손이 시리다는 핑계로 손도 잡고, 추우면 포옹도 하고,,, 뭐,,, 옆에 여자 친구가 있으면야 더 추워져라 워이 워이... 눈이 내리고 온몸이 시리게 오돌돌 떨어도 인간의 겨울은 따뜻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겨울은 가장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계절. 맡지 말아야 할 냄새가 없는 계절.
사담: 용산에 살고 있는 존경하는 맛집 블로거 형님은 여수보다 일산이 멀다고 했다. 맛을 찾으러 가는 동기부여는 물리적인 환경을 뛰어넘는다. 일산에도 맛있는 게 물론 많겠지만 여수에 더 자주 가게 된다. 여수에도 맛없는 곳들이 많지만. 겨울은 그러니 여러모로 따뜻한 계절이다.
한 겨울에 요세미티에 간다. 요세미티는 세 번을 방문했는데, 두 번이 겨울이었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철 산간지방 방문은 겨울에 열광하는 내게 너무나 설레는 일이다. 나를 언제나 따뜻하게 품고 사는 여자 친구와 함께 했다. 스노우채인도 없이, 겁도 없이 눈 덮인 요세미티를 운전하며 이곳저곳을 살포시 옮겨 다녔다.
봄이 우울한 노스텔지아를 자극한다면 겨울은 활기 넘치고 행복한 노스텔지아를 자극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끌어주는 썰매에 올라타 끌려다니다가 도착한 아이스크림 집에서 먹은 초코아이스크림. 신년이 되면 이북 출신 할아버지를 따라가 먹던 평양냉면. 차가운 음식을 겨울에 먹는 이유도 겨울이 따뜻해서다.
사람의 뇌에 감정의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과 후각 청각을 저장하는 부분이 거진 같은 위치에 붙어있다고 한다. 심지어 감정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 손상을 입으면 후각 청각을 저장하는 뇌가 그 기능을 대신한다고 한다. 특정한 냄새를 맡고 그때가 떠오르고 특정한 음악을 듣고 그때 그곳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 그 자체가 아닌 기억에 대한 감정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굉장히 과학적이라고 한다. 근데 그게 그렇게 과학적으로 궁금했던 사람이 있었을까.(문송) 그래도 신기한 건. 기억에 대한 감정을 기억한다는 사실. 떠올려보면 이 현상이 작용하는 원리가 그런 듯하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평소에 기억으로 기억하지 못하던 어떠한 감정적인 부분을 톡 하고 건드리는 걸 느끼니깐. 기억에 대한 감정을 건드렸기에 해당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자주 있는 경험도 아니다. 오히려 그 기억에 대한 감정이 무뎌질까 봐 심지어 아끼는 음악들도 있으니깐. 냄새와 음악은 감정을 건드린다는 사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왜 하필 냄새와 음악일까. 두 가지의 공통점은 무형의 것이라는 것. 또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마다 소리와 음악을 구분 짓는 범위가 다르다는 것. 소리로서 감정 기억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감정 기억은 음악으로 인지하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갑자기 음악과 소리의 구분을 감정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의도와 태도로 구분을 짓는 것이 현대음악의 추세였는데. 감정 기억을 전제로 한다면 음악은 소리로서 감정을 기억하게끔 해야 한다. 누군가는 새소리를 음악으로 들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공장기계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으려나. 지천에 깔려있는 소리들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 무엇이 내게 감정적으로 남아있던 기억이었는지.
여자 친구가 요즘 탐조에 빠진 바람에 딱따구리를 구경하러 동네 뒷산에 간 적이 있다. 난 어릴 적부터 딱따구리를 좋아했는데 딱따구리가 주인공인 만화의 영향도 있었을 거고 뭔가 좀 특이해서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여자 친구와 딱따구리가 어디 있을지 숨을 죽이고 찾고 있는데 묵직한 나무를 뚝뚝뚝 뚫는 명쾌한 소리가 짤막하게 들리곤 했다. 소리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리고 쌍안경으로 새를 찾는다. "저기 있다."
이상하게 이날 들은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묵직하면서도 안정적이면서도 따뜻하면서도 명확한 새의 소리. 짹짹 우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새소리. 그건 음악이었다. 다시 듣고 싶고. 다시 듣는다면 그날의 그 기분이 생각날 거 같아서 마음이 뭉클해진다. 나중에 확인해봐야지 그것이 음악이었는지 소리였는지.
눈이 잔뜩 온 아침에 밖을 나가면 이상한 기분을 받는다. 들리는 소리가 이상해진다. 바닥 전체에 흡음재가 깔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무에도 눈이 쌓인 것이니. 그러니 온 세상 온 천지에 흡음재가 붙어 반사되는 소리가 없어진 것이다. 소리가 이상해진다. 먹먹~ 해지는 소리. 쓔왁~ 쓔왁~ 눈을 쓰는 초록색 빗자루 소리가 가까운 건지 먼 건지 조차 분간이 안되게끔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 소리도 진동이라서 음파가 직접적으로 고막을 만지듯 소리를 촉각으로 듣는 기분. 멀리 있는 사람의 소리가 압축되어 내 앞으로 전달되는 느낌. 밤사이에 눈이 잔뜩 내린 날 그 소리가 듣고 싶어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눈을 치우곤 한다. 아스팔트에서 하얀 눈이 뜯겨 나갈수록 소리는 다시 원상복구 된다. 어떤 아쉬움과 성취감이 동시에 오는 순간이다.
소리에는 냄새가 없고 냄새에는 소리가 없다. 시각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냄새와 음악이 붙어버리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게 만드는 힘이 생겨서. 무대 위에 존재하는 냄새는 없다. 새소리가 소음이 아니고 음악인 이유는 좋은 냄새가 나기 때문일 거다. 좋은 음악. 좋은 소리. 노스텔지아를 일으키는 청각적 자극은 냄새를 연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향수도 중요하고 몸을 잘 씻는 것 혹은 의도적으로 잘 씻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귀중품들은 공산품보다는 가죽이거나 페브릭이거나 하여간 냄새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소리는 냄새고 냄새는 소리다. 냄새나는 소리가 음악이고 소리 나는 냄새가 감정이다. 내 주변에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쌔근쌔근 잠을 잘 때 옆에 가서 포도시 누워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