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내게 소설의 첫 문장 중 최고의 문장이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 문장을 말한다. 구암은 소설 속 가짜동네이다. 구암이라는 동네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은 왜 구암의 건달들이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았는지에 대해 아주 길게 설명한다. 세상이 점점 시크해지고 단단해지고 차가워진다. 자본의 논리나 물질 만능주의적 사고는 건달들에게 양복을 입힌다. 피는 점점점 차가워진다. 유튜브 쇼츠에 천박한 여자가 돈으로 갑질하는 영상이 있었다. 댓글에 이렇게 써져 있었다. '천박함보다 가난함이 창피한 세상'.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매정한 말들이 돌고, 어떤 이는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말한다.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은 빨아 쓰는 거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될 나의 친구 조론가는 '걸레는 빨아도 수건이 될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인간은 원래 다 걸레야."
전쟁 같은 사랑과 결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글귀, 가장 아끼는 문장을 이 글의 첫 문장으로 썼다. 이 문장에 대해 깊게 이야기 나눈 두 친구가 있다. 하나는 전 글에 등장했던 원사장님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조론가 이다. 이 글은 조론가를 축하하는 글이다. 조론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글이다.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이벤트를 맞이한 조론가에게 진하고 정성스러운 축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끼는 문장을 처음에 배치했다. 그러고선 아주 아주 깊게 생각했다. 나는 조론가의 결혼을 축하하는가. 정말 나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기뻐하거나, 그에게 아주 잘 된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는가. 이 글은 축하의 글이 될 수 있는가. 그는 결혼을 했다.
Aldo Rossi 가 지은 납골당의 정문에서 들어가는 길.
나는 축의금을 내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경사에 대한 감흥이 크지 않다. 더해서 나의 축하가 금액으로 결정되는 것이 기분 나쁘다. 어지간하면 축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선물을 건네는 것이 기꺼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선물의 제품명을 인터넷에 치고선 금액대를 검색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려면 인터넷에는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는 제품을 구매해 선물하거나, 아싸리 직접 만들어버린 정성 어린 물건을 선물하는 것이 좋다. 내가 한 번은 지인을 집에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 지인은 우리 집의 멋진 풍경을 보고선 호갱노노 앱에 들어가 집값을 검색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남부에 작은 섬에 집을 짓고 사시는데, 그 집을 본 지인(외환거래 종사자)은 감탄과 함께 이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에 대해 궁금해했다. 스스로의 감상과는 관계없이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별점을 보고 영화의 평가가 바뀌는 불안한 영혼들, 위스키나 와인 같은 술을 먹을 때에도 비싸지 않으면 감탄하지 않고, 값을 모를 땐 평가를 유보하는 영혼들, 그런 족속들이 결혼을 하면 나는 축하를 하러 가주고 싶지 않다. 서로서로 결혼식장의 컨디션과 일정을 감안하여 식장의 견적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고, 신부의 드레스가 얼마짜리인지, 화환들이 얼마짜리인지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한 자리다. 사람들은 이 식장의 주인공이 본인의 발아래인지 위인지 측정을 몇 분 만에 끝낸다. 예식장에 뷔페식이 얼마짜리 인지도 다 알아서 맛이 어떻다 저떻다 떠들어대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입술들이 있다.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다. 다들 양복을 입은 건달들이 되어 이 병신 같은 세상을 유지하는데 몫을 톡톡히 한다.
축하는 축하 그 자체로 감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 조차도 경사에 낼 돈을 얼마로 할지 생각할 때 스스로가 역겹다고 생각했다. 나는 양복을 입은 건달은 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경사자리에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너무 불편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축의금을 내지 않는, 그래서 식권 없이 집으로 귀가하는 하객이 된다. (결혼식의 식권은 축의금을 내야 주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선물을 하기가 귀찮아 축의를 내고 싶어지는 결혼식에는 일체 가지 않는다. 이런저런 청첩장 모임에 많이 불려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밥만 얻어먹고 결혼식에 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이 내가 써야 할 돈에 응당 보답하듯 청첩장 모임에서 밥을 사고 식장에서 식권을 줘도 나는 지갑을 열지 않는,, 매너 없는 인간이다.
(한편으로는 청첩장 모임에서 밥을 사준 친지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 사람들이 싫은 게 아니고, 나는 이런,,, 모종의 현금 오가기 시스템이 진심을 방해하는 시스템을 싫어하는 거다.)
납골당 풍경 1
조론가와 나는 아주 오래된 사이다. 조론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나의 절친한 친구였던 현우가 있다. 조론가와 나와 현우는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물론 나와 조론가가 현우를 패싱하고 둘이서도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된 건 23살부터였다. 아주아주 우발적으로 조론가와 함께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다. 한 달 정도 되는 일정동안 조론가와 함께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를 갔다.
2011년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조론가와 현우와 나는 지적 허영심이 넘치는 인물들이었다. 바로 엊그제 알게 된 영화감독이 있다. 그 영화감독이 어디서 꽤 유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본다. 난해한 작가주의적 성향의 영화였다. 뭔 얘기를 하는 건지 잘 이해도 못하고 뭣도 모르면서 이해하는 척 감동을 먹는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전복된 감상후기를 가지고 조론가와 현우에게 해당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 묻는다. 조론가와 현우가 그 영화는 어떤 것이며 영화감독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당첨!!! 나의 솔직한 후기와 엊그제 알게 된 감독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답해주기 전 조론가와 현우가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해 타박한다. "야! 00 감독 몰라?! 00이랑 00 영화 만든 사람이 자나!!, 아이 이 자식들 영화 뭣도 모르네, 영화 안보냐? 똑바로 안 살래?"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현우도 어디서 주워들은 사진작가의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리면, "야, 00 전시회 같이 안 갈래?, 뭐?! 그 작가를 모른다고!? 너 왜 이렇게 교양이 없어 졸라 유명한 작가야. 같이 가자!", 조론가는 비교적 허영심을 밖으로 내보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교양 있는 척 꽤나 재수 없는 스타일로 나와 현우를 타박했다. 나와 현우와 조론가는 끊임없이 책, 영화, 여행, 그림 등등 문화예술에 대해 아는 척을 해댔다. 그리고 그 아는 척 경쟁을 위해, 지적 허영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부를 해댔다. 생산적인 관계였달까. 2011년에서 2016년 정도는 아직 천박함이 가난함보단 창피한 세상이었다.
노래하는 법 다 까먹어버린 걔는
거래하는 법을 배웠네 그게 여기서 오래 하는 법이라며 날 가르치네
첫 번째 나의 동기는 제일 잘하는 것 그거 말곤 없었는데.
이제는 그냥 이 과정에 남는 게 있기를 바랄 뿐이고
하루하루 조금씩 움직여. I’m still in my studio.
-이센스-
납골당 풍경 2
조론가와의 여행 루트도 순전히 지적 허영심에 의해 결정된 루트다. 조론가와 나는 도시들을 각각 맡아 가이드 역할을 하기로 했었고, 본인이 가이드를 맡은 도시에서 뭐라도 더 멋진 걸 아는 척하기 위해 공부했다. 이탈리아는 내가 맡았고, 조론가는 헝가리를 맡았던 기억이다. 아무도 안 가는 보스니아를 갔던 이유도 전 세계의 운명을 바꾼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사라예보 총성사건'의 현장을 탐닉하기 위해서였다. 거기 간다고 뭐 1차 세계대전이나 세계사를 얼마나 더 이해하게 되겠나. 정말 순 허세에 찌든 애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라예보의 건물들에는 총알자국이 많이 남아있었다. 조론가는 "이게 세르비아와의 내전에서 남겨진 상처야. 봐!"라고 말하면, 질 수 없는 내가 그 내전에서 크로아티아의 역할이 얼마나 야비했는지 설명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리들의 유럽여행.
이 여행에 현우도 함께하려고 했다. 당시에 현우의 집안사정이 힘들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현우는 학창 시절부터 씀씀이가 꽤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와 조론가가 갈 수 있는 여행경비를 현우가 모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했다. "그냥 부모님한테 좀 달라고 해. 돈 모아서 뭐 하냐 이런대 써야지! 같이 가자." 내가 뱉은 말이지만 어딘가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뭐가 뭔지.
납골당 풍경 3
이 글에 등장하지 않으면 삐질 친구가 하나 있다. '뜨리', 뜨리는 현우가 야구장에 놀러 갔다가 사귀게 된 친구다. 현우는 뜨리와 조론가와 나와 다 같이 친하게 지냈으면 했다. 다 같이 술도 몇 번 먹고 밥도 먹고 놀았다. 뜨리도 지적허영심이 넘치는 친구다. 조론가와 나와는 다르게 아직도 지적 허영심이 넘치는 친구다. 뜨리는 하던 일을 얼마 전에 그만두었다. 지금은 백수신세인 주제에 매우 교양 있게 사는 척 허세를 떤다. 막 와인 시음회 같은 곳도 다닌다.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는데 뜨리 지가 거길 왜 가는지. 시도 쓴다. 웃긴다 정말. 현재의 나의 피는 싸늘하게 식어하는 중이다. 현재 조론가의 피 또한 어느 구석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뜨리의 지적 허영심은 뜨거운 것이다. 뜨거운 뜨리!
뜨리와 현우와 나와 조론가는 팟캐스트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 '마녀사냥'이라는 연애 예능프로가 유행했다. 우리들은 우리 버전의 좀 더 나이브한 '마녀사냥'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유튜브가 막 성행하기 전 팟캐스트가 유행했다. 어떤 내용의 팟캐스트를 할지, 1편의 구성을 짜고 제목도 정했다. 녹음할 곳이 없던 우리는, 뜨리가 가지고 있던 후진 마이크 하나와 나의 노트북을 가지고 동네 모텔에 들어갔다. 방하나 빌려서 남자 네 명이 들어갔다. 분명 무인모텔이었는데, 방에 전화가 왔다. "한 방에 네 명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굉장히 부끄러웠다. 한 방에 네 명이 들어갔다가 걸려도 창피할 수 있는 일인데, 남자 네 명이라니,,,. 우리는 다른 모텔에 갔다. 방을 두 개 빌릴 돈은 없었는지,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작전을 짰다. "우선 선발대 두 명이 동성애자인척 하고 방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고선 10-15분 정도 후에 나머지 두 명이 동성애자인척 하고 그 방에 들어와. 그러면 한 번에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에 걸리지 않을 거야." 뜨리가 말한다. "나는 현우랑 갈게 니네들하고 가면 내가 눈이 너무 낮아 보이잖아. 차라리 현우가 좀 더 동성애자처럼 생겼고, 누가 나를 오해하더라도 좀 덜 창피하고 덜 억울해. 너네 둘이 나중에 들어오고 나랑 현우랑 먼저 갈게."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어차피 동성애자로 오해받을 거라면 뭐라도 상관이 없었다. 와중에 외모에 대한 체면이 중요한 뜨리가 가엽게 느껴졌다. 현우와 뜨리가 들어가고 나서 10분이 지나고 나와 조론가가 그 방에 들어갔다. 혹여나 걸릴까 봐 무서워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는데, 옆에 조론가가 나를 그윽하게 보는 거 같아 짜증이 났다. 나랑 어색하고 이상하게 눈이 마주친 조론가가 얘기한다. "야 떨리지 않냐?" 이게 무슨 코미디인지. 내가 대답한다. "너 때문은 아냐."
우리는 모텔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팟캐스트 1화 녹음을 잘 마무리했다. 나와 현우와 조론가는 녹음 내용이 맘에 들어서 우리가 나꼼수 마냥 너무 유명해지면 어쩌나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뜨리의 생각은 달랐다. 뜨리는 항상 좀 대중적이고 약간 보이기에 멋진 거만 하고 싶어해서 그런지 우리의 녹음본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약간 우리를 창피해하는 느낌이랄까. 아무쪼록 뜨리의 독선적인 판단에 의해 우리의 팟캐스트 녹음본 1화는 업로드되지 못했다.
그때는 미안했다 뜨리야. 얼마 전에 뜨리가 그 당시 녹음본을 카톡으로 보내줬다. 업로드 안 하길 참 잘했다...!
그늘에 가면 서늘해진다.
나는 독일에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조론가는 영화평론의 꿈을 찾아 평론수업을 듣게 되었다. 현우는 상해에서 학교를 다녔다. 독일, 한국, 중국에 사는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찐한 통화들을 해댔다. 그동안 들어왔던 음악들을 아는 척하면서 공유하고 영화를 공유하고, 각자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맨유팬인 뜨리가 얼마나 멍청한지 뒷담도 까고. 와중에 조론가가 '재현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사도바울이 된 거 마냥 조론가는 들떠있었고, 여태까지 봐오던 방식대로 영화를 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나와 현우에게 설파했다. 그러면서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막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그동안 누구도 못 알아들을 거 같은 말을 싸지르고 아는 척이나 하면서 개폼 잡는 평론가들을 엄청 무시했는데, 조론가가 딱 그 상태인 거처럼 느껴졌다. 나와 현우는 "조론가 너 너무 갔어. 너무 허세야. 그렇게 까지 가면 안 돼. 너 그거 못된 거 배운 거다 너 그거 안된다."라는 말을 계속했다. 조론가는 "아니 그게 아니라니깐! 우리가 보던 방식으로 영화를 보는 건 그냥 이야기를 보는 것 뿐이야 영화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고! 영화는 영화야!"라고 말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론가도 이제 똑같은 머저리 평론가가 되려는구나. 저런...'
그때는 미안했다 조론가. 지금에 와서는 사도바울이 된 나 또한 재현의 윤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2015년 말, 조론가의 집안형편이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조론가는 대단하다. 와중에 한 유명 신문사를 통해 영화평론가로서 등단하게 된다. 현우의 집도 더 안 좋아졌다. 현우는 영화얘기보다 돈 벌고 싶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광저우에 한 회사의 마케팅부서 인턴자리에 취직하게 된다. 나는 남미여행을 갔다. 지적 허영심이 교보문고 인문도서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던 낭만기가 지났다. 얄팍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슬슬 기어오르고 있다. 박근혜는 탄핵되기 위해 광장에 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이재명은 개새끼 소새끼 하면서 무대연설을 한다. 우리 셋이 있는 톡방에서 이재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현우는 이재명이 점점 좋아진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말했다. 나는 이재명과 같은 인물들을 정말 싫어한다. 현우는 중국에서 많이 외로웠다. 현우는 의지할 곳이 없는 타지 생활 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 현우는 부모님들끼리의 갈등상황과 유학비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러한 이유로 돈 벌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던 거 같다. 현우의 노트북을 뜯어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다. 당시에 보경이라는 무당년이 현우에게 잘해주었다. 그 무당년은 내가 기필코 만나면 쌍욕을 퍼붓고 죽여버릴 거다. 현우의 환경이 현우를 많이 힘들게 한 시기였고, 무당년에게 현우가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원래 이재명을 정말 싫어하던 현우가 이재명을 지지할지도 모르겠다고 한건, 그의 환경이 많이 힘들어져서, 마음이 많이 약해져서 그랬던 거 같다. 현우에게 딱 붙어서 잘해주던 무당년은 본인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고, 고흐 그림을 가져올 수 있으며, 한국에서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현우의 지인에게 고흐 그림 보내줄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단다. 기가 찬다. 현우는 그 여자가 너무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칭찬일색이었다. 원래 그런 사기꾼의 같잖은 말에 절대 흔들리지도 않고 당하지도 않을 거 같은 현우가 그런 얘기를 하니 아주 의아했다. 나와 조론가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니깐, 현우가 뭘 본 게 있겠지,,, 저 여자가 현우에게 잘해주니깐 뭐, '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한 번은 무당년이 나와 조론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서 현우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나 껄끄러운 이야기였다. 나와 조론가는 걔 너무 뭘 좀 아는 척하는데, 좀 이상한 애인 거 같으니 거리를 좀 두라고 했다. 나는 현우에게 그 여자에 대해 실컷 욕을 해버렸다. 그거 아주 무당년같이 구는데 그런 애들한테 자꾸 휘둘리지 말고 연 끊어버리라고! 왜 그런 미친년 하고 노냐고. 다른 때 같았으면 현우가 그러겠다고 답했어야 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병 환자의 얘기에 휘둘리지도 않을뿐더러, 나의 의견을 굉장히 존중해 주던 친구였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글쎄, 너보단 이 여자애의 말이 어느 것 하나 더 신빙성 있어."
나중에 조론가와 이야기 나눴지만 조론가도 아주 이상한 낌새를 느꼈었다고 한다. 그다음 현우와의 통화에선 더 이상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나와 현우가 사주가 맞지 않기 때문에 지금보다 멀리해야 한단다. 어이가 없었고, 난 다시 또 욕을 퍼부어댔다. 그 이후에 나는 남미여행을 갔고, 현우는 단톡방에서 이재명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을 풀어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현우가 얼마나 병신 같은 사람인지, 얼마나 나를 짜증 나게 했는지, 너 같은 친구는 필요 없다고, 현우 너 많이 변했다고, 어떻게 이재명을 지지할 수 있냐고, 그게 얼마나 많은 걸 의미하는지 아냐고, 막 쏘아댔다. 중간에 조론가가 급발진하며 화내는 나를 나무라는 톡을 보냈다. '자기 생각 얘기한 거 가지고 뭐 그렇게 까지 화낼 일이냐, 그냥 어느 정도 이재명한테 공감한다는 얘기 가지고 네가 너무 오버한다.' 나는 더 화가 났다. 조론가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조론가는 꽤나 이성적인 놈이라서, 내 편을 들어주고 말고 이전에 극노하고 있는 나의 스탠스 자체를 나무랐다. 나는 반대급부로 조론가와 현우 모두에게 화를 냈다. 현우도 맞받아치며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그 내용 안에는 그 무당년이 했을 거 같은 껄끄러운 말도 실려있었다. 나는 조론가와 현우에게 절연 선언을 했다. 그 이후 톡방을 나왔다. 나는 당시 쿠스코에 있었다. 나의 여자친구는 쿠스코에서 선글라스를 사러 같이 움직이자고 했다가 나랑 싸웠다. 여자친구는 쿠스코의 어두컴컴한 숙소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현우랑 카톡으로 싸우고 있었다. 정말 우울하고 끔찍한, 후회되는 날이다. 쿠스코는 해발고도가 3000m 이상이다. 고산증에 약한 나는 머리까지 아팠다.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날이다.
현우, 조론가와 절연을 했고 1달 정도가 지났다. 2016년 2월 나는 남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2월 20일 나의 어머니 생일이자, 정주아저씨의 생일이자, huhu의 생일인 날에. 현우가 죽었다.
포기
조론가가 학창 시절에 좋아하던 여자가 있다. 그 여자 또한 재정신은 아닌 여자애였는데, 뜨리랑 소개팅을 했나 그랬을 거다. 그 여자애가 2016년 2월 20일 아침 10시에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애는 현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조론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소식 들었어?! 알고 있었어?!", 조론가는 아직 소식을 못 들은 상황이었고, 나는 현우가 죽었다고 말했다.
현우는 광저우에서 죽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중국에서 절차를 밟아야 했다. 현우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나와 조론가에게 현우의 장례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와 조론가는 우선 현우가 안치될 납골당을 정하러 다녔다. 해 잘 들고 좋은 위치에 자리가 있었다. 게다가 신축이었다. 자리를 정한 후 영정사진을 뽑으러 갔다. 재현의 윤리를 중하게 여기는 나와 조론가는 서로 위로의 말도 별로 없었고,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일을 착착 진행시켰다. 뜨리와 현우와 친했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장례준비를 함께 했다. 그렇게 나와 조론가 사이에 있던 현우가 저세상으로 갔다. 이재명을 죽이고 싶었다.
조론가는 나에게 재현의 윤리를 알려준 내 인생의 은인이다. 현우의 장례를 준비하며 재현의 윤리에 대해 정말 깊이 깨닫고 고심하게 되었다. 현우의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도 될 수 있고 농담도 될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걸레 같은 인간들을 많이 보았다.
무당년은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현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나를 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현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조론가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내가 현우에게 절연통보를 했던 카톡을 보셔서 그랬을 거다 생각했다. 조론가는 현우의 어머니 아버지를 볼일이 생기면 나를 곧잘 데리고 다녔다. 조론가는 내가 현우의 부모님을 보는 걸 좀 어려워할 때마다 "현우든 나든 네가 남미에서 돌아오면 언제든 화해할 준비가 되어있었어."라고 얘기해 줬다. 현우의 어머니가 현우의 죽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신 후 나와 조론가를 불렀다. 코젤맥주를 마셨다. 현우 어머니가 얘기하길, 그 무당년이 현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러고선 현우의 영혼이 지금 지천에 떠돌고 있다며 어쩌고 저쩌고를 해야 한다며 돈을 받아갔다고 한다. 몇백만 원 수준의 돈이었는데, 마음이 약해진 현우 어머니는 그게 진짜건 아니건 현우가 죽기 전 제일 가깝게 지냈던 그 여자에게 감사치례 차원으로 돈을 줘 돌려보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현우 어머니가 나와 둘이서만 만날 일이 생겼다. 그때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무당년이 현우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식으로 현우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나를 보기가 좀 힘들었다고 했다. 조론가의 말처럼 사람은 다 걸레다. 현우도 나도 현우의 어머니도 걸레다. 심지어 그 무당년도 걸레다. 근데, 그 무당년도 빨아쓸 수 있는 걸까. 난 이 세상이 대체 어떤 건지 모르겠다.
더 멀리.
조론가와 나는 현우가 없는 세상을 살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나와 조론가를 더 더 깊이 사귈 수 있게 해 주었다. 조론가와 나는 '재현의 윤리 교'라는 종교의 신봉자가 되었다. 조론가의 환경은 더 안 좋아졌다. 조론가에게 영화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꽤나 많은 부탁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론가도 돈을 벌어야 했다. 조론가는 평론가라는 직업을 밀고 들어가 버텨볼 만큼 돈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다. 조론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평론가의 길을 접고 취준을 할지, 못 버티더라도 갈 때까지 가보던지.
결국엔 돈얘기다. 현재의 돈 얘기고, 빚이라는 과거의 돈얘기, 안정적인 삶이라는 미래의 돈 이야기. 조론가는 평론가의 길이 돈과는 너무 멀리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 평론과 영화 그리고 글에 대해서 조론가가 진지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에게 깊게 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믿지 않았다. 조론가는 본인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해당하는 돈, 따라서 취준을 할 수밖에 없는 사유에 대해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본인은 갈 때까지 간 것이다. 그것이 본인의 한계인 거 같다. 자신이 없다. 그러기에 이 선택이 맞다.'라고 꾸준히 이야기했지만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취준을 하는 시간 동안 조론가의 글빨로 평론을 했다면 그 정도 연봉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조론가는 두려워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일거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무서워했다. 그래서 평론가의 길로부터 멀리멀리 떠났다. 조론가의 취업준비는 생각보다 길고 먼 일이었다. 나는 현우가 돈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남에게 함부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의 걱정들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천박함이 가난함보다 떳떳한 세상은 아녔다.
노래방
조론가는 초등학교 시절에 노래방에 가면 슬픈 노래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굉장히 외롭고 슬픈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냥 들으면 자의식 강한 초등학생일 수 있겠지만, 내가 보는 조론가의 성격이라면 그것이 진실된 감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론가의 환경에는 조론가에게 의지하고 있는 가족구성원이 굉장히 많다. 사실 조론가가 그것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조론가가 평론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의 한계로 표현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론가에게는 조론가가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역할론이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조론가의 인생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형성된 거 같다. 그게 조론가가 내게 얘기해 준 노래방 일화다.
조론가는 어릴 적에 스피드 스케이팅을 했었다. 초등학생시절에 선수생활을 목표로 할 만큼 진지하고 제대로 된 훈련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조론가는 연습도중 툭! 하고 자빠졌다. 부상으로 인해 스피드 스케이팅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조론가는 운동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조금은 일부러 넘어져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트랙을 돌 때 넘어지고 싶다는 찰나의 생각이 그를 넘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그는 운동을 쉬게 되었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집에서 편히 쉬면서 노는 게 좋았다고 한다. 귀여운 일화이다. 이 일화를 조론가가 설명할 때 항상 붙는 표현이 있다. "그 어린애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하하하." 이때의 선택이 조론가 인생에서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최초의 선택이었다. 조론가와 유럽여행을 할 때 조론가가 이 일화를 처음 이야기 했다. 조론가 스스로가 열심히 살거나 하는 건 다 이때의 선택 때문이라는 아리까리한 이야기를 했다. 후련한 포기이자,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섞여있다. 평론가의 길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할 때도 조론가는 이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비유로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론가가 그때의 선택에 대해 집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느꼈다. 잘 한 선택인지, 잘 못 된 선택인지, 그 와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자꾸 그때의 기억을 꺼내어 보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조론가가 노래방을 가서 슬픈 노래를 하며 외로울 때와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던 시절이 겹쳐 보인다. 일부러 자빠져 부상을 당하고 운동을 포기한 후 노래방에 들어가 외로운 아리아를 불렀을 조론가의 어린 시절에 응원을 보낸다.
그래서 곱씹어 본 것이다. 과연 나는 조론가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이 변했고, 돈이 중요해졌다. 나마저도 천박한 사업을 하고 있다. 돈에 신경 쓸수록 교양의 깊이가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사업을 하면 할수록 나는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평론가의 길을 등지고 시작한 취준, 그리고 취업의 길. 그 이후에 당연하듯 찾아온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과연 내가 축하해 줄 수 있는 선택일까. 조론가의 인생에서 조론가가 짊어졌던 무게를 툴툴 털고 본인의 꿈을 좀 더 자유롭게 누리며 고통받길 기도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조론가의 아내가 굉장히 조신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조론가의 결혼 결정이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넘어지길 시도한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가기 위해 도전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걱정도 되었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또 한 번 어깨에 무언갈 얹어놓고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조론가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게 될 결정이라는 게 과연 조론가만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일 수 있을까. 특유의 성격들 때문에 이기적인 결정 자체가 이타적인 결정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어머니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조론가도 그러하다. 나는 이 굴레 - 이기적인 것이 곧 이타적일 수밖에 없는 - 에 대해 큰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다. 조론가는 어떠할까. 나와는 반대로 원래처럼 잘 받아들이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그러니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조론가의 결혼을 축하하거나 저주하거나. 절친한 친구의 결혼은 언제나 내게 딱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주지 않는다.
천국
축하하기로 했다. 조론가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은 바뀌고 나도 바뀐다. 여름을 무척 싫어하던 내가, 제철 옥수수에 참맛과 우거진 녹색 풍경에 감화가 되어 여름을 좋아하고 있다.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날 좋은 날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바뀌어가는 시류에 지키고자 하는 것도 있다. 가난함이 창피할 순 있어도 천박한 건 없어져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사람들이 점점 천박해진다는 기분이다. 그것이 사실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느낀다. 바뀔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이 아주 많아야 한다. 바꾸면 안 되는 것도 있다.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궁금해해야 한다.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조론가의 결혼생활을 응원하기로 했고 축하하기로 했으나, 의심할 것이다. 조론가가 그 환경에 폭삭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 그 선택이 영원히 모호한 스피드스케이팅의 넘어짐이 아닐지. 돈을 벌다 보면 잊는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 같이 느껴질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하루하루가 스펙터클해야 한다. 너무 평탄해서도 괜찮고 너무 대단해서도 괜찮지만, 그것이 스펙터클이어야 한다. 나에게 재현의 윤리를 알려준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의 인생이 단순함에 가려져선 안된다. 거창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그것이 개인적인 소회를 위해서건 세상을 위해서건 쓰임 받아야 한다. 조론가는 그만큼 대단하고 아까운 인재이기 때문이다. 결혼생활과 돈과 현실이라는 장막뒤에 숨었다면, 더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론가는 이제부터는 선택을 해야 한다. 넘어져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핑계, 가족 모임, 회사에서의 위치 등,, 항시 조론가의 글쓰기 보다 우선순위 밑으로 내리는 훈련을 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줄 수 있는 배필을 만난 거 같아 다행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건 사기결혼이다. 내가 아는 변호사 있다.
조론가의 결혼식날에, 두려웠다. 나의 동료가 또 한 번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세상에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온 맘 다해 축하하고 싶으면서도 그게 마음속에서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선택 밖에 없었을까 하면서 혼자 아쉬워했다. 축하하고 싶어서 간 것이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내심 축하의 마음이 맹목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맹목적인 축하를 할 수 있는 빌미가 있다.
너의 결혼식 날에, 마지막에 사진을 찍을 때, 친구들 단상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쭈뼛쭈뼛 어디서야 하나 고민하며 뒤쪽 라인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뜨리와 네가 나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오라고, 가장 앞에 너의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정말 수많은 너의 친구들이 결혼식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너의 옆자리가 나의 것이었다. 네가 너의 옆자리를 내게 내어준 것에 대해 너무 고마웠고 영광이었다. 속으로 왈칵 울음이 나왔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신랑 측 1등 친구가 되어 너의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너와 나는 이 글에 써져 있는 모든 경험을 함께 했다. 어떤 의미에선 버텨온 것들이 있고, 서로 도와줄 수 없는 것들도 너무 많았다. 안타까워한 것도 너무 많았다. 너의 옆에 서 있을 때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흘러나왔다. 너와 만날 시간도 별로 없고, 같이 놀 시간도 별로 없지만, 나는 알고 있다. 너의 존재가 그저 잘 지내는 것이 내게 너무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현우생각이 났다. 많이 났다. 이재명이 아무리 싫어도, 이재명 싫어하는 죽은 현우보다, 이재명을 응원하는 현우가 살아있는 게 더 행복한 일이다. 너의 결혼이 내게 의심되는 사건이더라도 네가 결혼을 하고 건강하고 무탈한 것이 가장 큰 나의 행복이다. 어쩌면 이 문단의 글 만이 이 글에서 유일한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건강하고 오래오래 너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바꿀 수 없는 것도 너무 많고 바뀌면 안 되는 것들이 바뀌기도 하지만, 아무렴 무엇이든 어떤가. 결혼식날에 내게 1등석을 내어준 너의 그 배려가 참 슬프기도 하고 고마웠단다. 정말 고마웠고 슬펐다. 이런저런 이야기 다 덮어두고, 모두 다 덮어두고 너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어 졌단다. (네 옆에서 사진 안 찍게 해 줬으면 너 좆될 뻔했어..) 항상 뜨거운 피를 흘리며 살자. 살아남자. 행복하자. 마지막으로 너의 결혼을 축하하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 Aldo Rossi의 납골당 건물을 요리조리 살피게 해 주마. 잘 구경하고, 그때 하객 사진 찍을 때 네가 귓속말로 했던 약속 꼭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