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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달블루 Mar 28. 2024

Aldo Rossi 4 - 동냥

Verona

 베로나에서의 산책은 나를 행복한 거지로 만들었다. 굉장히 많은 분야의 문화유산이 남아있던 도시다. 나는 베로나가 남긴 문화와 예술과 기억을 동냥하며 여행했다. 

Castelvecchio Museo 앞 분수

 내 가까운 지인 중에는 현누나와 덕형이 있다. 둘은 부부다. 내가 뮌헨에 체류하던 시절 유일하게 알고 지내던 몇 안 되는 한국인. 둘은 부부사이라서 알콩달콩 잘 살았지만, 나는 외로운 싱글 이방인으로서 둘에게 의존하기도 했고, 타지에서의 신혼부부의 삶을 구경하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도 젊은 시절 베를린에서 유학을 했고 나를 낳았다. 현누나와 덕형은 뮌헨에서 아들 배키를 낳았다. 내 부모의 젊은 시절 유학생활이 그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며 관찰했다. 더해서 배키의 유년시절 행동들이 나의 유년기성격과 닮아서 더 애착이 갔었다. 

 너무 외로워서 술이 먹고 싶을 때는 덕형에게 술자리를 동냥했고 한국음식이 그리울 땐 현누나의 제육볶음밥을 동냥했다. 현누나의 음식은 인상 깊다. 우선 맛이 있었다. 밥을 잘 지었다. 진밥을 먹느니 설익은 밥을 먹겠다던 덕형의 철학덕에 현누나는 질지 않은 밥을 내주셨다. 제육볶음을 하던 까르보나라를 하던 현누나의 손은 정말 컸다. 현누나의 요리철학은 배부름에서 완성되었다. 부족한 적이 없었고 항상 상다리가 부러지게 스펙터클 했다. 쥐똥만큼 내오던 huhu의 요리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뱃속에 부족함을 잊게 해 주는 시간을 동냥했던가. 당시에 나는 현누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면서도 현누나가 해주는 밥만큼은 먹고 싶었다. 

Castelvecchio Museo 또한 Carlo Scarpa가 리모델링했다. 아름답다.

 덕형은 나와 여러 가지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우선 둘 다 독일어를 더럽게 못했다. 꿈이 큰 것에 반해 산만하고 불성실했던 나는 덕형과 어학원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여러 번 책상에 앉았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과 정치이야기, 그림과 음악 그리고 홍상수 영화이야기를 하며 놀아버렸다. 그때마다 독일어 성적은 낮아지고 있었다. 덕형과 나의 독일어 성적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정말 파렴치하고 웃긴 것이다. 레벨업 테스트에서 여러 번 떨어진 우리는 독일어 공부할 생각은커녕 재수강을 인정받아 레벨업을 꽁으로 이뤄내는 방법에 대해 짱구를 굴렸다. 우리가 다니던 어학원보다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괴테어학원이 너무 비싸서 못 다니는 것이라고, 우리 독일어가 별로인 건 싸구려 어학원 때문이라, 괴테어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을 보며 유학귀족이라고 폄하했다. 그리고선 역시나 매번 Wiederholung(재수강) 딱지를 받고 좌절했다. (내 기억에 하다 하다 안된 덕형은 괴테어학원을 잠시 다녔던 거 같다. 배신자!) 

 나를 만나기만 하면 술 먹고 공부 안 하는 덕형덕에 현누나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다. 초기에 덕형과 현누나가 이사할 일이 있었는데, 거의 내가 다 했다. 둘의 이삿짐도 들어주고 가구도 조립하고 2박 3일을 넘게 이사한 집에 머물며 많은 것을 도와드렸다. 아니 거의 다 내가 했다! 그것에 대한 고마움 내지 의리상 현누나가 나에게 잘해주는 거 같았다. 당시에 나는 심한 예술병을 앓고 있었는데 현누나는 나의 그 모습을 우스워했다. 나는 사활을 걸고 진지했었는데 말이다. 

 덕형과 현누나에게 술 먹자고 연락한 어느 날, 둘은 베로나에 여행을 갔다고 답장이 왔다. 배신감이 들었다. 베로나에서 오페라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나에게 사진을 하나 보냈다.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베로나 원형극장에 무수한 사람들과 흘러나올 음악과 행복한 커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나와 Wiederholung을 반복하는 덕형은 나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다. 부인도 있고 아기도 있고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나만 우울했다. 나만 우울하게 개소리나 떠벌거렸던거다. 덕형의 우울한 이야기들은 나와 정반대의 것이었단 걸 알게 되는 사진이었다. 많이 슬펐다. 나는 뮌헨 교 외 Pasing역 혼자 남겨진 거지였고, 덕형과 현누나는 베로나 원형극장의 화사한 유학귀족이었다. 많이 비교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베로나 원형극장을 가고 싶었던 것이. 그때부터였다. 베로나원형극장에 사랑하는 사람과 들러 오페라를 듣고 싶었던 것이. 그때부터였다. 뮌헨에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번여행에 베로나에 가게 되었고 오페라축제 100주년 기념 '아이다'를 들으러 갔다. 그것도 사랑하는 내 여자친구와. 

덕형~, 현누나~, 저도 이제 베로나를 다녀온 남자가 되었어요.


 베로나 오페라축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고전적인 형태를 고수하기 위해 마이크를 쓰지 않는다. 저 큰 야외극장에서 거대한 무대장치들이 움직이고 가수가 쌩목으로 노래를 한다. 오페라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 음정이 살짝 샵이 되어 들렸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 큰 극장에서 가수의 살짝 샵된 음정이 관객석에서는 완벽히 들어맞아 들렸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들이 인상 깊었고, 가수의 아리아는 볼륨이 크지 않지만 스피커로 들을 때보다 감동이 짙었다. 

 무엇이든지 기계화될수록 효율이 높아질수록 감동의 값은 저렴해지는 거 같다. 무엇이든지 직접 듣고 직접 만지고 직접 하는 게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늘을 직접 까서 요리하는 업장이 깐 마늘을 납품받아 쓰는 업장보다 맛으로 보나 태도로보나 아름다운 것이다. 자본주의가 너무 그럴싸해지면서 사람들은 효율을 찾게 되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 효율은 감동을 저해한다. 나는 효율적인 이 세상이 싫어졌다. 원래도 싫어했다. 독일어를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괴테어학원에 간 덕형에게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낀다고 전해주고 싶다. 


 지금은 독일에서의 이야기를 나누며 현누나와도 정말 친한 친구가 되었다. 가끔 힘든 것이 있을 때 둘의 집에 무턱대고 찾아가기도 한다. 덕형과 현누나는 독일에서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맛난 거 해주고 술 주는 현누나와 덕형에게 감사하다. 둘은 목동에 살고 있다. 조만간 또 목동에 들러야겠다. 그곳에 가면 나는 다시 예술병에 걸린 환자가 되어, 이 세상을 짊어지고 살아갈 사람처럼 말하게 된다. Pasing역의 거지가 되어 효율보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킬 수 있다. 둘에게 항상 술과 안주를, 사실은 함께한 추억을 동냥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의 추억들이 영원히 Wiederholung 하기를!!!


Castelvecchio Museo 실내에서 보는 밖
Castelvecchio Museo에 있는 어떤 것.- 조각을 받치고 있는 것이 예뻐서 찍었다. 내 스피커 다이로 쓰고 싶게 생겼다.


 일 때문에 대구에 들릴 때가 많다. 나는 대구를 좋아한다. 대구는 대표적인 소비도시다. 소비에는 효율이 없고 불확실한 감정과 비합리적인 선택들이 난무한다. 대구에는 예쁜 여자가 많다고 한다. 나의 여자친구도 대구에서 나고 자라서 비합리적으로 예쁘고 아름답다. 대구에는 맛있는 해산물이 많다. 우스갯소리로 대구는 삼면이 바다라서 그렇다고 한다. 대구에는 내가 좋아하는 콩국집과 이 시대 코리안 샤키테리아 대창순대집들이 있다. 뭉티기도 있고 맛있는 융드립 커피집들도 있다. 다쿠아즈 맛집과 젤라토맛집이 있다. 베를린에서 먹던 케밥의 맛을 잘 구현한 케밥집도 대구에 있다. 클래식 LP를 MINT급으로만 수집하는 음반가게도 대구에 있다. 대구는 그런 곳이다. 

 대구에 들릴 때면 나는 항상 원사장님께 연락을 드린다. 그분은 대구 토박이회사의 사장님이다. 원사장님의 사무실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건물에 있다. 원사장님의 방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천장에 뚫려있는 창에서 태양의 간접광이 책상을 비춘다. 어두운 거 같으면서도 밝은 기분이다. 원사장님의 책상을 보고 있으면 성스러운 집무실처럼 느껴진다.  Carlo Scarpa가 Castelvecchio Museo를 리모델링한 공간을 보았을 때, 원사장님의 집무실이 생각났다.  

 나는 원사장님에게 항상 책을 동냥한다. 원사장님이 추천해 주셨던 책들이 나를 감동시킬 때가 많았다. 타율이 좋다고 해야 하나... 원사장님은 내게 김언수의 책들과 천명관의 책들 그리고 '체인지킹의 후예', '맨홀', '스파링' 등등 읽고 나면 뜨거워지는 한국소설들을 추천해 주셨다. 모든 추천도서들이 읽지 않고 죽었다면 후회할 책들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라는 존재가 잘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남자로서 어른으로서 가족으로서 존경하고, Jay사장님과 원사장님을 존경하고,,, 또, 또,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대개의 어른을 속으로 깔보는 경향이 있다. 진심과 전심으로 많은 방면에서 존경하게 되고 닮고 싶은 어른이라는 게 내 주관에서는 잘 생기지 않는다. 원사장님은 내게 깊고 깊은 조언도 많이 해주셨다. 이상하게도 원사장님이 해주시는 조언은 내 마음에 와닿았고, 그분의 취향이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고 멋졌다. 그래서 더욱이 가까이 붙고 싶어 책동냥을 해댔다. 원사장님은 그럴 때마다 여러 책들을 추천해 주셨고, 다른 읽고 싶은 책들을 못 읽고 있을 때도 불구하고 원사장님의 추천도서는 모두 읽었다. 지금도 한 세 권쯤 빨리 읽고 후기를 남겨드려야 한다. 


Carlo Scarpa가 Castelvecchio Museo를 리모델링한 건물사진에 원사장님의 어록들을 붙여보았다.


"바카라도 그렇고 모든 도박이 그래, 베팅을 할 땐 아주 조금도 많이도 아닌 딱! 할 수 있을 만큼만 딱! 해보는 거야." 
"대구 오면 항상 연락하세요. 오늘은 대구에 잘 곳이 있나요? 도울 일 있으면 항상 연락해요."
"감성과 이성이라는 게 둘 다 존재하는 사람이 정말 드물어. 여수에는 너 대구에는 나"
"젊을 때 많이 해! 특히 술, 담배, 섹스 건강할 때  많이, 잘해야 해. 많이 하는 건 좋아. 오래 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거고."
"하으,, 사업이라는 게 찝찝한 것들이 끝나지 않는 거야"
"나,, 진짜 음악 많이 들었어. 진짜 많이 듣고 살았어. 정말이지 음악을 진짜 좋아해...."
"사실 얼마 전에 김언수의 '까불지 말고, 폼 잡지 말고, 어깨 힘주지 마'라는 말 덕분에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었어요."
"가기 전에 책 한 권 사줄게. 같이 나가자."

 내가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게 된 시점이었다. 당시에 큰 기회였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선 큰돈이 필요했고 내 회사에는 그 돈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굴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거 같았고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기에는 이미 아버지의 돈을 너무 많이 빌렸다. 더해서 아버지의 돈을 무한정 빌리는 건 뭔가 사업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배가 덜 고팠나...) 주변에서 내가 돈을 좀 꿔볼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찾았다. 몇몇 사장님들의 번호를 수첩에 나열하고 전화를 걸까 말까 수백 번을 고민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사업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 없는가 하는 고민에서부터 돈을 꾸겠다고 전화를 하는 것이 맞는가 안 맞는가, 이 사업이 정말 될만한 사업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무서운 시간이었다. 이 돈을 꿨다가 못 갚으면 어떻게 하지. '못 갚으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는 놈이 돈을 꾸겠다고 전화를 하는 게 맞을까. 우리 집안에 남한테 돈을 꾸고 못 갚은 사람은 없는데, 내가 돈을 못 갚고 나서 나의 평판을 넘어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수첩에 적어놓은 사장님들이 이런 전화를 한 두 번 받는 것도 아닐 텐데, 그분들 생각에 나 또한 파렴치한 놈으로 보이면 어떻게 하지. 내가 사업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안 되는 건데,,, 다시는 원사장님께 책동냥도 못하고 좋은 이야기도 못 들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사사로운 고민을 하는 놈이 돈을 꿀 자격이나 있는 걸까. 내가 아직 덜 배고파서 체면에 대해 고민을 하나. 다른 사업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돈을 어떻게 꾸고 투자는 어떻게 받는 거지. 사장님들께 돈을 꾸겠다고 전화드렸던 무수한 사람들이 다 나 같은 상황이었을까. 아니 아니, 내가 좀 더 염치가 있을까. 아니 아니, 내가 더 염치없는 놈일지도 몰라. 하, 이 전화를 드리는 게 이렇게 힘들 정도면 내가 돈을 안 꾸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안 꾸고 싶다. 그냥 이 기회를 흘려보내야 할까. 그러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어. 아냐 아냐, 지금 이 생각은 내가 돈을 꾸기 껄끄럽다고 괜히 안일해지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구대표님과 남대표님과 원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구대표님은 나를 꾸짖으셨다. "네가 하는 사업에 내가 왜 돈을 줘야 하니?" 냉정하고 맞는 말이었다. "너 사업한다고 유세 떨면 안 된다. 네가 그 돈이 없으면 못하는 일인 거야. 주변사람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그 일이 진짜 할 수 있는 일인건지 잘 생각해라." 백번이고 천 번이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후회했다. 너무너무 후회했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대표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네~, 제가 생각할 땐 그건 신용보증을 하시거나 하여간 기관에 신청을 하셔서 받는 게 맞을 거 같네요?"/ 내가 말했다. "아, 저희 회사가 아직 신보를 쓸 내용이 없는 회사라서요... 매출액도 재산도 뭐가 잡혀있지가 않으니 기관에서 돈 꾸기가 힘들어서요."/ "godalblue님 저희는 투자하는 회사이지 돈 꿔주는 회사는 아니에요~."/ "저희 회사에 투자하시면 안 될까요."/ "언제든지 멋진 기획을 해주신다면야 투자합니다!"/"아,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제가 다음번에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할게요. 이런 전화드려서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녜요~. 다음에 좋은 자리로 뵈어요!"

 원사장님께는 문자를 남겨놨었고, 남대표님과의 전화를 끊은 후 원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오셨다.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을 해드렸고, 돈을 꾸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첫마디 첫 말씀이 "잘했어요. 잘했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잘했어요. 그런 얘기할 때 창피하다고 생각하거나 피하지 마세요. 사업 원래 그래요. 돈 꾸러 다니는 거고 갚으러 다니는 거고 원래 너덜너덜한 거예요. 대표는 그런 거예요. 잘 전화하셨어요. 얼마가 필요한 거죠?"였다. 나는 사실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내가 길게 고민한 것이 당연한 거라는 위로가 느껴졌다. 이 전화를 걸기 전까지 내가 무엇을 고민했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는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원사장님도 이런 경험이 있으셨던 걸까? 아니면 나같이 파렴치한 놈에게 대응하시는 레퍼토리였을까. 얼마가 필요한 거냐고 묻는 말에 나는 필요한 돈의 액수를 말씀드렸다. "아,, 그 돈은 힘들겠는데요? 못 도와줘서 너무 미안해요. 혹시 다른 걸로 도울 일 있으면 꼭 좀 말해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이런 전화 나한테 했다고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거니깐 괜찮아요. 항상 이런 일 있을 때 전화하세요. 잘했어요. 잘했어. 도울일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얘기해 주세요. 사업이 이런 거니 언제나 당당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구대표님이나 남대표님 또한 좋은 분들이다. 정말 멋진 분들이고. 나는 그분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또 말씀드렸다. 그때는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 무리한 부탁을 했습니다.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사업 똑바로 하겠습니다. 구대표님과 남대표님은 괜찮다고 다독여주며 술을 사주셨다. 정말 멋진 분들이다. 하지만 원사장님은 위대한 분이다. 

 원사장님께는 사과드리러 찾아뵈기도 어려웠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죄송한 마음에, 그때의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 것 자체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왜 그런 전화를 드렸을까. 그렇게 좋은 분께 왜 나는 그런 전화를 드렸을까. 출시하려던 신제품은 어렵사리 당시 제조회사에 빚을 지고 출시했다. 처음에는 꽤나 잘 되었다. 출시 한 달 만에 10만 개 이상 팔렸다. 물론 필요했던 돈이 채워지지 않아서 마케팅이나 다른 플레이들을 못했고, 현재는 망했다. 

 신제품을 어렵게 출시했던 시점에 원사장님께 제품을 들고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근황이야기를 나누고, 책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함께 녹차를 끓여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해성사를 하듯 사과드렸다. "사장님 그때는 사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사업이 처음이다 보니, 너무 잘 모르다 보니 너무 쉽게 생각한 거 같습니다.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나의 사과에 대한 원사장님의 답변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전화로 해주셨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다시 해주셨다. 괜찮다고 해주셨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서로 책과 음악 그리고 스피커에 대해 동냥하며 지낸다. 대구에 가면 꼭 원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나는 그분의 50대 이후의 삶밖에 모르지만 내 나이 적어도 50대 이후는 원사장님과 똑 닮기를 원하며 근황을 여쭙게 된다. 어느 시점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음악은 어떤 걸 들으시고 책은 어떤 걸 읽으시는지 원사장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평생 대구에 기웃거리며 살고 싶다.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대구에 계신 원사장님께는 책을 동냥하지만 어른의 삶도 동냥하게 된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잘했어요. 그런 얘기할 때 창피하다고 생각하거나 피하지 마세요. 사업 원래 그래요."





오늘도 역시 무덤을 찾았다.


 미래주의그룹에 핵심이자 행동대장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무덤을 보러 갔다. 보치오니는 '미래주의' 하면 떠올리는 조각을 만든 사람이다. 


미래주의를 대표하는 보치오니의 조각상

 미래주의자들은 운동하는 속도와 기계를 사랑했다. 보치오니의 조각상은 기계적이면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장면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미래주의의 수장 마리네티와 그의 동료들은 이탈리아인의 주식인 파스타를 버리자고 주장했으며, 대안책으로 다람쥐 냄새를 맡으며 비행기 베어링을 핥는 요리법을 제시했다. 어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쇠를 핥고 맛보는 기괴한 요리들을 개발했다. 분자요리와 같은 가스트로피직스라는 장르가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미래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보치오니는 미래주의 그룹에서 행동대장격이다. 미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미래적인 삶의 꽃은 바로 전쟁이었다. 미래주의는 파시즘 철학에 보탬이 되는 예술운동이었고, 전쟁을 찬양했다. 마리네티와 다른 동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군입대를 하지 못했지만 보치오니는 대차게 군입대를 했다. 전쟁터의 탱크와 총 미사일은 미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고, 그 작품들과 함께 미래를 위해 움직이는 활동인 전쟁이야말로 인류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희망했다. 아주 조금 허무한 것은 보치오니가 전쟁터에서 총과 수류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베로나 기차역 근교에서 말을 타다가 자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주의 전쟁광 그룹의 행동대장은 베로나에 묻힌 것이다. 아이러니하고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이고 은유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한 눈물로'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 보치오니의 자리.
보치오니를 애도하는 동료들이 연필로 뭐라 뭐라 써놨는데 해석해보고 싶다. 


Aldo Rossi가 베로나 근교에 만든 건물을 보러 갔다. 



  Aldo Rossi와 미래주의 사이 연결고리는 사실 내가 지어낸 것이다. 파시즘적인 것, Aldo Rossi적인 것, 미래주의자들의 사상, 이탈리아적인 것, Carlo Scarpa의 작품들 모두 나에게는 하나의 뿌리를 느끼게 한다. 그 원천을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힘을 내보 자면, '보수주의자의 진보성' 같은 거랄까. 그리고 그것을 처음 느끼게 해 준 것이 Aldo Rossi의 작품들이다. 

 예술에서의 정치성은 선택을 강요받는 아이디어의 한계이다. 그리고 창작자의 '아이디어의 한계'가 연속될 때 작품은 작가 개인의 깊은 감성을 뿜어낸다. 그것이 디테일한 것이든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든 정치성은 하나의 결로 수렴해 나아가야 한다. 작가가 선택을 보류하거나 피하게 된다면 '아이디어의 한계'를 보여줄 수 없다. 좋은 작품은 이 '아이디어의 한계'를 정직하게 나열하고 수긍하는 것이라서 아름답게 보인다. 즉, 인간이 어디서 추해지는지, 어디서 멈추게 되는 것인지, 그 연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이 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예술성이라는 것은 정치성이 극으로 달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보수가 되었건 진보가 되었건, 좌지우간, 극으로 달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예술성이고 파시즘적 사고흐름과 맞닿아 있는 거 같다. 미래주의적 사고와 파시즘적 사고에 기초한 이탈리아의 근현대 디자인은 '모더니티'라고 말이 바뀌어져 있고 현재의 수많은 디자인철학에도 영향을 깊게 주고 있다. 심하게는 미니멀리즘 또한 파시즘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더 심하게는 미스 반 데 로에와 르 코르뷔지에도 파시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건물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아이디어의 한계'는 고유한 것이었겠지만.


Aldo Rossi의 건물에 있는 카페. 이 카페에서 파는 빵이 정말 맛있었다.

 Aldo Rossi의 건물들은 파시즘과 미래주의적인 것보다는 좀 더 변태적인 바리에이션과 원시적인 면모가 있다. 파시즘적 기틀 위에서 Aldo Rossi는 더 과거의 것을 찾고 있었던가. 미래주의적 사고의 끝은 결국 원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새로울 것도 과거의 것도 아닌 듯한 Aldo Rossi의 작품들은 내 마음을 아리송달송하게 흔들고 있다. 

 간단하고 단순한 파사드에 큼직하고 묵직한 장식들이 얹어진다. 그 장식들은 건물을 기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기념하고 있을까. 또 왜 장식들은 반복되어야 할까. 건축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나는 Aldo Rossi에게서 받는 영감과 영향을 길게 설명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파시즘에서의 날카로운 감성에서 조금 더 둥글어지고 낭만적이고 유머 있는 정치적 맥락이 Aldo Rossi이고, 파시즘과 미래주의는 서로 의존하고 있고, Scarpa의 디테일은 파시즘을 조각내서 붙이고 있고, Aldo Rossi와 Scarpa는 각자 이탈리아적인 것에서 시작해 개인적인 소회로 번쩍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둘은 각자 이탈리아와 건축과 도시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 Scarpa는 미시적 세계의 것을 보고 있고, Aldo Rossi는 거시적 세계의 것을 보고 있다. Aldo Rossi의 거시적 세계관은 도시를 넘어 집단기억과 개인의 기억을 서로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Aldo Rossi의 많은 건물에서 - 모던한 입면에 둥근 것을 쓸 때, 냅다 초록색 모뉴먼트를 생성시킬 때, 자기혐오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자가당착이나 자아비판이 반복되는 시퀀스에 숨겨지고 외관의 모습은 장소를 공간화하고 있다. 장소를 공간화하는 그의 유머에는 도시로부터 따돌림당한 실패의 기억이 담겨있다. 그리고 Aldo Rossi의 실패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그의 기억이 도시에 스며들고 있다. 그곳에 내가 방문한 것이다. Aldo Rossi의 유머를 알아듣고 있다고 자청하는 내가 베로나에 간 것 이전에 Aldo Rossi의 건물에 간 것이다. Aldo Rossi의 건물과 장식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쓸쓸하고 작고 소중하고 귀여운 유머가 있다. 

 그의 '아이디어의 한계'는 둥근 것과 각진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것에 있다. Aldo Rossi가 제공하는 반복적인 연출(공간 안에서의 경험)과 장소에서의 이물감을 연출한 디자인(베로나의 장소성에서 많이 빗겨 나간 듯한 건물)은 안과 밖, 둥근 것과 각진 것, 개인과 집단, 장소와 공간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에 그쳐있다. 그러니깐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자랑하되, 알기를 포기하고 있다. 나는 Aldo Rossi의 이런 정직함이 너무 좋았다. 정직하고 따뜻한 건물들이었다. 위로가 되는 것이다. 

 

Aldo Rossi의 시크니쳐 시퀀스

 나는 나의 여자친구에게 위로를 동냥한다. 나는 내 여자친구 앞에서 한없이 불쌍한 남자이고 싶다. 나의 분노와 슬픔이 Aldo Rossi의 건축과 닮았다. 나는 나의 분노와 슬픔을 인지하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슬픔을 아주 잘 느끼고 분노를 아주 많이 표현한다. 인지의 영역에서 갈 때까지 가는 편이다. 나의 유머 또한 차이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나의 유머 있는 몸짓과 언행은 '이 세상을 어찌 살런지~' 하는 '아이디어의 한계'를 보인다. 그러니 꽤나 예술적이고 정직하고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수고스러운 나의 삶을 바라봐주는 이 하나 없다가 나의 여자친구가 나타난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다. 나를 '고약할지는 몰라도 많이 불쌍하니까 좀 안아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시키는 시간이 3년쯤 걸렸던 거 같다. 애인사이라는 관계 안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그건 바로 우리 둘의 유머였다. 나의 여자친구의 유머 또한 Aldo Rossi의 것과 닮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로 유머러스한 여자다. 아주 웃기는 유머다. 본인이 얼마나 첨벙거리고 뚝딱거리고 사는지, 그 모습이 얼마나 유머러스한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모습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 때쯤, 나의 여자친구 또한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의 모습을 위로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의 애정행각은 우리 둘이 직접 만든 세계관이다. 그러니깐 장소보다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차이가 있는 개개인이었던 우리 둘의 사랑이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둘이 극하게 달 할 정도로 싸우던 지난날의 소통법과 기억법과 위로법이야 말로 집단에게 기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Aldo Rossi의 건물이 그러하듯, 우리의 고유한 유머들은 따돌려지는 것들이다. 공간을 장소화 하고 싶은 은밀한 사랑이었다.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Aldo Rossi의 유머가 왜 어려운 것인지. 이런 자뻑이 있었던 걸까!? 아무쪼록 나의 속 깊은 내면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것은 유머의 힘이다. 정말 유머의 힘이다. 


전날 어둠 속에서 떠올렸던 수없이 많은 단어들이 있었다. 

그 말들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대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절박한 말들. 

어쩌면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나만의 감정들. 

따뜻하지만 날카로울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단어들. 

용기를 낸다면, 혹은 용기가 아니라 궁지에 몰린 사냥감의 심정이라도 있는 힘껏 마음속에 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당신은 납득할까?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일전에 읽었던 소설에 나오던 글이다. 이 글을 나는 여자친구에게 메일로 써 보낸 적이 있다. 물론 내 여자친구는 그 편지를 읽씹 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읽씹 했다.!!

 내가 바라본 Aldo Rossi의 세계관과 나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하다 저 부분이 생각났다. 저 문구는 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기 전에 내뱉었던 말들이다. 저렇게 가녀린 마음이 쓰다듬어지길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은 위로를 동냥하는 것이다. 나는 광명에 사는 여자친구에게 위로를 받으러 갈 예정이다. 


목동에서는 술과 안주를, 대구에서는 도서추천을, 광명에서는 위로를, 

목동에서는 추억을, 대구에서는 어른의 삶을, 광명에서는 사랑을 동냥하는 요즘을 베로나 기행문에 남겨두게 되었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너의 품에 안겨있을 때가 최고로 안전하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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