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ere To Eternity

지상에서 영원으로

by 박상진

오늘은 문밖을 나서면서부터, 오랫동안 벼르다 만 일을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 마음먹었다. 지난 며칠간의 산행으로 인해 뭉쳐진 종아리 근육이나 풀 겸 바닷가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내킨 김에 바닷길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으로 완주를 목표로 걸어보기로 한 것인데,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있는 온기 덕분에 마음속에서 진작부터 응어리져 있던 긴장감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막내를 하루 내내 집에서 지켜보는 것이 안쓰러워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선 것이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 가까운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우선 호흡이 안정되면서, 첫 며칠간 올라왔던 종아리 근육이 함께 풀리며 이제는 웬만큼 걸어도 그다지 피로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제법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집에서 출발해서, 여남동 등대 쪽을 먼저 들렀다가 되돌아서 영일대를 지나 여객선 터미널 등대 쪽으로 간 다음 이를 반환점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데는 얼추 내 걸음으로 이만보가 넘게 걸릴 것 같다. 환호공원 샛길로 빠져 여남동 표지석이 있는 바닷가 산책로에 이르러서 보니, 멀리 포스코를 끼고 완만하게 돌아 동해로 빠져나가는 영일만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몸집 큰 화물선들이 여기저기 마치 섬처럼 둥둥 떠 있다. 마침 그 사이를 울릉도로 가는 썬라이즈호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를 보고 있자니 오늘 산책 코스와 맞물려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From Here To Eternity, 우리말로 옮겨 놓은 영화 제목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이다. 영일대 해안길의 끝에서(From) 끝까지(To) 걸어서 온전히 완보(完步)해 보고자 작정하고 나선 길인데, 영일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대형 화물선들이 마치 함대처럼 무리를 이뤄 정박해 있고 때마침 오늘은 일요일의 평온한 아침인 것이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결은 그날, 영화 속 진주만의 아름다운 해변을 연상케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아직은 컬러로 방송이 송출되지 않던 중학생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흑백으로 더빙한 작품을 명화극장, 아니면 주말의 영화를 통해서 보았을 것이다. 버트 랭커스터, 몽고메리 클리프트, 어네스트 보그나인, 프랭크 시나트라, 데보라 카와 도나 리드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주조연을 맡아 열연한 작품인데, 나에게는 외화의 참맛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반항아 제임스 딘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40대의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가 출연한 사후 작품을 보고서 감명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현실 속에서 연상되는 영화 속 장면. 무리 지어 있는 화물선 사이로 새벽에 출어한 소형 어선들이 귀항을 하고 있고, 반대편으로는 여객선 터미널을 출발한 썬라이즈호가 미끄러지듯이 영일만을 빠져나가고 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이 점점이 나타나는가 싶더니만, 요란스러운 굉음과 함께 편대를 이루어 덮칠 듯 해안으로 몰려와서는 마구잡이로 기관총을 난사하다 이내 카미카제로 전함을 침몰시키는 영화 속 장면들이 오버랩되면서 잠시나마 진정되던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다.


여남동 빨강 등대와 가까워지니 이제 거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를 앞두고 있는 스카이워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화장실 공사와 간이 주차장의 포장과 주차면 도색이 완료되어 이제 또 하나의 체험형 볼거리가 이곳 북포항에 생겼다. 더욱이, 스카이 워크를 걷다가 계단을 따라 아래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둥글게 제방을 쌓아 안전하게 어린이들이 물놀이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올여름 이곳에서 벌어질 풍경이 벌써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또한, 작년 11월에 처음 개장하여 성황리에 개방 중인 환호공원의 스페이스 워크와도 멀지 않은 곳이, 그 사이에는 전망 좋은 카페와 커피숍, 물회로 유명한 횟집 등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전보다 더욱 핫해진 관광명소로 부각되어 유명세를 치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시 영화를 생각한다.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애증이 이 영화의 큰 흐름을 이끌고 있다면,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돋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버트 랭커스터와 데보라 카의 해변가 키스신과 프랭크 시나트라가 전사한 후 눈물을 흘리며 트럼펫을 불던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연기가 아직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당시 어린 나이의 나는 말 그대로 뭐도 모른 채 데보라 카를 사랑했고, 몽고메리 크리프트의 야성에 반했으며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사악함에 분노하면서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전우애에는 감명을 받아 이후 그가 부른 노래 My Way를 평생의 최애 곡으로 삼았으며 버트 랭커스터의 중후한 연기에도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이후, 컬러로 재방영된 이 영화를 보다 성숙한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나 TV 드라마로 제작된 시리즈물까지 정주행 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영화의 제목에 함의되어 있듯 비극적 내용과는 별도로, 영화 속 주조연 배우들이 연기하는 적나라한 인간 군상들 하나하나에 깊숙이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득 이곳에서 정리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오늘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은 지금 포항에서 가장 핫한 곳이다. 스페이스 워크가 있는 환호공원 앞 해안도로에 이르니 전에 보이지 않던 흰색 실선이 도로 양편으로 그어져 있고, 가로수와 가로수를 이어서 걸어 놓은 플래카드에는 이곳이 특별 주차구역임을 알리고 있었는데, 몇 발작 더 나아가니 도로면 위에도 큼지막한 글씨로 같은 내용이 도색되어 있다. 벌써 그 흰 실선 안쪽을 따라 많은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차되어 있고, 건너편의 단골 횟집인 깃대 횟집과 아리랑 횟집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손님들로 넘쳐난다. 그렇지! 그만하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스페이스 워크든 스카이 워크든 이곳을 찾은(From Here) 사람들은 이제부터 영원히(To Eternity) 그 기억이나 추억을 평생토록 안고 갈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마치 보석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손을 맞잡고 공원을 걷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이 봄날 이곳의 화창한 해안도로와 공원길과 스페이스 워크는 앞으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물의 공원 언덕진 곳을 힘들게 올라와 미술관으로 돌아가는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유모차를 끌고 있던 남편이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만한 곳을 묻길래 공원 안 놀이동산으로 안내해 주었다. 경주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으로 삼성 2군에서 중학 동창인 양일환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은 적도 있다는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직 프로 야구선수였다고 한다.


부부의 기분 좋은 감사 인사를 뒤로 하고 한참을 걷다 돌아다본 공원에는, 짜랑짜랑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계절을 일깨우는 바람소리와 함께 봄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포항 환호공원의 스페이스 워크

포항 여남동에 있는 스카이 워크

여남포구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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