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는 우릴 즐겁게 한다

by 박상진

말로 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글로 쓸 때보다 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그때그때 변화무쌍하게 내용의 조화를 부릴 수 있고, 어휘나 말의 수위를 상대방에 따라 형편에 맞도록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장감인데, 이야기의 반응을 보면서 더 나아가야 할 순간과 물러서야 할 때를 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슬픈 이야기는 말로 전달할 때보다는 글로 나타내는 것이 더 슬플 때가 많다. 말로 가슴 내려앉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흔하긴 하지만 글로 슬픈 이야기를 읽을 때보다는 그 여운이 오래가지 않고 깊지도 않다. '가슴이 철렁했다'는 말은 놀랍거나 슬픈 일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주로 쓰는 표현인데, 말 그대로 우선은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에 주목을 한다.


물론, 즐겁거나 슬픈 일에는 화자(speaker)가 직접 관여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자녀의 취업이나 부모의 사망같이 본인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 그 감정의 색깔은 우선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내가 기쁨으로써 즐겁고, 내가 슬픔으로써 가슴 아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일단 감정의 순치(馴致)를 통해 내 내면에서 먼저 걸러져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즐겁거나 슬퍼해야 할 몫은 주로 듣는 사람, 즉 청자(listner)에게 있다.


지나 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저마다 아쉬움이 남거나 후회스러운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학생들을 정신없이 가르치던 초임교사 시절이 바로 그러한데, 주어진 50분의 수업시간 대부분을 오로지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일에만 쏟아부었다. 이 지역 공립 명문 고등학교인 포항고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었기에, 일분일초가 아까워서라도 수업 중 농담은 일절 용납하지를 않았다. 안 그래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마구 닦달함으로써 가시적 효과들이 실제 나타나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보다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교사로서의 에너지가 거의 방전되어 갈 무렵 교육 환경의 변화와 함께 학생 우선의 교육 풍토가 대세를 이룸으로써 수업 중 교사와 학생 간의 소통이 보편적인 교실 풍경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침 수학능력시험에서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뀌고, 문법보다는 읽은 내용의 문해력을 검증하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수업의 방향도 사고력을 확장하고 그 외연(外延)을 넓히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업의 효율성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뛰어난 독해력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까다로운 EBS 교재를 읽고 행간에 숨은 뜻까지 소화할 수 있는 학생이 한 교실에 불과 두셋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교육 당국이 현장의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니 이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교사의 몫이다. 사실, 처음부터 마땅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수시를 통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것이다. 어려운 수능 대신에 상대적으로 쉬울 수밖에 없는 내신성적으로도 대학 진학이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일부 뛰어난 학생을 제외한다면 굳이 수능을 치를 때까지 머리 싸매가며 공부할 이유도, 시험을 잘 보아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직 교사로서 스스로에게 하는 고백이지만, 한계를 뛰어넘고자 촌음(寸陰)을 아껴가며 노력을 게을리 않던 옛 제자들은 너무 고마워서 미안하고, 교직 말년에 이르러 맞은 근래의 제자들은 교사로서 너무 해 준 것이 없어 부끄러우면서 미안한 것이다.


되돌아보니, 수업 시간에 재미난 이야기로 서로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젊어서는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은 학생들에게 너무 근엄하게 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버지 같은, 말하자면 꼰대 같은 선생님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교직을 시작할 때나 마칠 무렵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매 순간 교사로서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했고 그들은 또 이를 알아주고 잘 받아들여서 노력으로 보답을 해 주었다는 점이다.


우스운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에서 시작된다. 입담 좋은 사람은 말로 상대방을 쉽게 즐겁도록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데, 웃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과는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다. 평소 입담 좋은 사람이 부럽긴 하지만 그만한 재주가 없으니, 글로라도 재미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지난 일을 떠올리다 그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잇는다.


음주운전이 거의 용인되다시피 한 시절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으로, 막 교직에 발을 내디딘 때였다.


당시, 학교에는 교장선생님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가용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교감선생님이 소형 승용차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퇴근 이후로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다시 와서는 야간 자율학습을 마칠 때까지 교무실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다가 한두 분씩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자가용을 구입하게 되는데, 결국 독특한 개성과 나름 카리스마까지 갖춘 임 선생님이 우리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어느 날엔가 학교로 자가용 차를 몰고 출근을 한 것이다.


퇴근길 술자리는 급하게 마련되는 법이다. 그날도 종례를 마치고 나서 책상 정리를 하면서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나루 끝 선술집으로 모이라는 연통(聯通)이 돌았다. 학년 당번 선생님을 제외하고 일부는 걸어서, 또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나는 임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당시,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술자리에선 학년주임 선생님 주도로 우선은 업무 이야기가 주를 이룬 것 같다. 그러다가 임 선생님의 제안으로, 술도 깰 겸 해서 시내 육거리 근처에 있는 단골 당구장에 모여 2차로 술값내기 당구를 치기로 했다.


다시 그리로 헤쳐 모여야 했으므로 난 당연히 임 선생님 차의 조수석에 동승을 했다. 나루 끝을 지나 시내로 접어들면 곧 도착할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재미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음주를 하긴 했지만 음주단속은 거의 않던 시절이고 아직 8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으니 주당들에겐 아직은 초저녁이었다. 이제 육거리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육거리에는 중앙에 로터리가 있어서, 신호 없이 교통의 흐름대로 차량이 진입한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돌아 나가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퇴근 무렵이나, 지금처럼 주당들이 1차를 마치고 이른 귀가를 할 무렵이면 늘 교통 체증이 발생해서 사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 차가 흐름의 우선 순서를 무시하고 곧장 직진을 해서는 좌로 돌아가는 길에 슬쩍 끼어들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곤 있었지만, 사고 위험이 늘 있는 곳이라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미 같은 방향으로 성큼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영업용 택시를 보자 나도 모르게 양발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끼익, 간발의 차이로 우측으로 핸들을 돌려 방향을 틀자마자 급정거한 영업용 택시에서 벌컥 문이 열리더니 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운전수가 막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거의 동시에 우리 차도 가까스로 멈춰 설 수 있었는데, 양 차 사이의 틈새가 팔꿈치 하나에도 못 미칠 지경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임 선생님을 바라보니, 허허 소리 내어 웃으며 내게 말한다.


"박 선생, 거기 문 좀 열어보소!"


얼른 창문 손잡이를 잡고, 잽싸게 돌리자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운전수가 한 발을 이미 밖으로 내딛고, 우릴 보더니 내리다만 엉거주춤한 상태로 소리 지른다.


"야이, CC발 넘아! 죽을라 카나, 뭐 이따구로 운전하고 있어!"


운전수를 향했던 내 눈이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임 선생님 쪽을 돌아본다. 아무튼 우리는 먼저 먹은 술이 있는 것이다. 임 선생님은 사람이 좋긴 해도 욕까지 먹고서도 마냥 웃어넘길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몸을 내쪽으로 스윽 기울이더니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이는 운전수를 향해 나지막이 한마디 한다.


"허허. 야이, 새끼야. 내 술 묵었잖아!"


느릿느릿 웃으면서 하는 말에 기가 찼던지, 움찔 막 내리려던 몸을 다시 차에 싣고선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알았다! 이 새끼야. 운전이나 좀 똑바로 해라! 조심해서 가래이."


아무 일 없었던 듯, 당구장이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임 선생님이 못 박듯, 이 한마디로 해프닝의 마무리를 지었다.


"하! 고 새끼 인상 더럽데. 차 놔 뚜고 토낄까 말까 고민 마이 했데이!"


임 선생님은 이후 학교를 옮겨 고향인 대구에서 교단에서 계속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퇴직 후 취미로 배운 색소폰으로 제2의 인생을 열고 계신다고 한다. 원래 재주가 많은 다재다능하신 분이라 당구도 당시 에버리지가 500이나 되었고, 노래면 노래, 악기면 악기 등 다루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있었던 일을 쓴 것이긴 하지만 글 속에서 당사자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예컨대, 음주운전에 관한 시각이 그때와 지금은 완전 다른 것이긴 하지만 교통량이 지금과 비교할 수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마냥 재미로만 읽어주기를 바랄 수만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술을 마시고 나서 네 살배기 막내를 태우고 신천대로를 음주 운전하며 신나 했던 시절이 있는데, 종종 아직도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다 큰 막내로부터 핀잔받을 때가 있다.


내일은 은퇴한 선생님들과 당시 제자들이 함께 하는 모임이 약속되어 있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갈 이야기를 미리 생각하다가 그만 지난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마 글로 쓴 이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난 이야기들이 참석한 여러 선생님과 제자들의 입으로 속속들이 오고 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태안, 구례포구 갯벌의 고동

구례포구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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