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젊음의 음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 커피를 처음 마시게 되었을 때의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둘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커피가 낯설고 귀했기 때문인데, 예전 대구에서 운수업을 크게 하셨던 고모님 댁에서 아마도 커피를 처음 마셔 본 것 같다.
어른들끼리 다과(茶菓)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다가 자리를 뜨면 찻잔에는 마시다만 커피가 남기 마련인데, 눈치를 살펴가며 홀짝 들이키고선 우선은 쓴맛에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뭔가 모를 애매한 단맛이 느껴져 혀로 입술을 에둘러가며 마저 마시곤 했다. 그럴 때면 이를 본 어른들이, 애들은 커피 마시면 뼈 녹는다라는 무서운 말로 겁을 주고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한참을 껄껄 웃으시곤 했다.
고모님 댁에 가면 커피 말고도 낯선 탄산음료나 서양 음식들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양키시장으로 더 유명한 교동시장에서 들여온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갖가지 미제 물품들이 주방 뒤편 창고 속에 박스채로 쌓여 있었는데, 뜻 모를 영어가 제품의 포장마다 선명하면서도 세련되게 인쇄되어 있는 것이 국내산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동종의 국산 제품들도 유사한 모습으로 유통되고 있기는 했으나, 우선 보기에도 당시 미제의 포장술이나 인쇄술에 비해 후져 보여 미제 물건 대부분을 처음 대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렌지나 바나나와 같이 난생처음 본 열대과일과 한 유리병 속에 골고루 섞여 있는 견과류, 풍선껌이나 초콜릿과 같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갖가지 과자들이 어린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는 모습을 어디 한번 상상이나 해 보시라!
늦은 밤, 어른들이 어울려 놀던 자리가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고모님은 단단히 여며놓은 보자기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곤 했다. 할머니 몫으로 따로 챙겨 놓은 것인데, 할머니와 함께 쓰는 방 다락에는 군침을 돋게 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넘쳐났고, 어린 마음에도 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할머니의 허락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야속한 생각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여 있었다.
그런데 여러 먹거리 가운데서 끝내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 바로 커피였다. 초콜릿 색을 띤 과립(顆粒, 알갱이) 형태의 커피를, 뜨거운 물속에 설탕과 연유(煉乳)와 함께 넣으면, 우선 보기에는 세상에 없을 맛일 것 같은 아름다움으로 은은히 잔 속에 녹아든다. 할머니는 이빨도 없는 합죽한 입으로 홀짝홀짝 입맛을 다셔가며 잘도 마시는데, 익히 알면서도 그 맛이 다시 궁금해져 슬쩍 곁다리로 마셔보지만 여전히 쓴 맛이 변함이 없다. 결국 나의 어린 시절 커피에 대한 추억은, 내 나이 또래에겐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가히 기절초풍할 맛을 지닌 다른 여러 미제 먹거리들에 밀려 쓸쓸히 다락방 뒷전으로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철이 들면서는 커피보다 가까운 곳에 늘 술이 있었다. 특히, 교직생활을 하면서 더욱 늘어난 주량은 결혼을 하면서 겨우 제어할 수 있는 정도에는 이르렀지만, 여전히 남들이 보기에 과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곤 했다. 다만,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자판기 커피를 간혹 마실 때가 있긴 했으나 그 마저도 담배를 피우느라 거의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실은 살이 더 찔까 봐 설탕 커피를 일절 멀리하기도 했었다. 간혹, 동료 교사들이 혼사나 상(喪)을 치른 후 답례로 다방 커피를 사곤 했는데, 배달 온 다방 아가씨가 교무실 원탁에 차려 놓은 커피 맛이 남다르기도 했지만 돈이 아까워서 마지못해 마신 적도 많았다.
어떻게 보면, 별다방(이것이 스타벅스를 지칭하는 말임을 안 것도 얼마 되지는 않지만)을 위시해서 몇몇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포항에 들어 설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커피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비싼 커피값에 화가 났고, 특히 로열티를 주고 마실 수밖에 없는 자칭 별다방 커피 애호가를 보면 돌아서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견고하게 굳어진 고정관념 탓에 이제껏 감으로만 느끼던 '커피의 맛'에만 천착(穿鑿)하여 커피 속에 깃든 고유한 문화나 정신을 외면해 온 것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길거리나 공원의 벤치에서 테이크 아웃해 온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청춘들을 지켜보며 '내가 여태껏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엉뚱한 궁금증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이는 마치, 주종 불문하고 오랜 세월 술을 마셔왔지만, 어느 날부턴가 와인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술은 술이로되 술 같지 않은 와인에 왜 사람들이 깊이 빠져드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품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교직을 마치기 서너 해 전부터 출근길의 내 손에는 늘 전날 얼려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요즘도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실 일이 있거나, 데이크 아웃해서 마실 때에도 오로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이것도 사실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말이지만)'이다. 다행스럽게도입맛이 유별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값이 싼 토종 테이크 아웃 커피 브랜드가 오히려 내 입에 더욱 맞다. 그렇긴 해도 매일 한, 두 잔은 기본으로 가족들이 모두 마셔야 하니 내 몫으로만 지출되는 한 달 커피값만으로도 족히 기십만원은 넘어서는 것 같다.
이젠 커피 전문점을 들러도 메뉴판에 안내되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이름이 내게는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한 때는 이름 하나하나에 주눅이 들어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가 커피값 내기 싫어한다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동네 커피 전문점에 들리면 반가운 인사를 먼저 건네 오는 예쁜 아르바이트생이 있고, 그녀가 미리 알아서 건네준 얼음 가득 채운 에스프레소를 집에서 우유를 타서 카페라테로 만들어 마실 때는 잔 당 돈을 천 원씩이나 절약했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절로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한다.
생각이 막다른 곳에 이르자 느닷없이 낮잠이 쏟아진다. 때맞춰 주방에서 내리고 있는 커피 향이 집 안 곳곳에 머물며 늦은 오후의 졸음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