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by 박상진

학교로 가는 길은 늘 심심했습니다. 2학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가까웠지만, 새로 배정된 반에는 같은 골목길에 사는 친구가 아직은 없었고, 양 어깨로 둘러멘 가방 속에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책들과 공책과 두터워진 수련장이 들어와 있어서인지 터벅터벅 혼자 걷는 발걸음을 더욱 무거웠습니다.


3월이 되었다고는 하나, 지난 설에 산 새 신발을 신고도 발끝이 계속 시린 것이 괜히 마음에 걸립니다. 부질없는 심통이 나 울퉁불퉁한 맨땅 위로 삐져나온 돌부리를 툭 건드려 보았습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힘없이 쑥 뽑힌 돌멩이는 몇 번을 구르더니 자신의 키만 한 거리 앞에서 멈춰 섭니다. 그 돌멩이까지의 거리를 슬쩍 가늠해 본 후 냅다 달음박질하고는 조금 전보다 더 세차게 발을 내질렀습니다. 고르지 않은 땅바닥을 이리저리 빠르게 굴러가던 돌은 잔뜩 성 난 자신의 속마음처럼 울퉁불퉁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몇 번을 더 튀어 오르더니만 끝내 길가의 전봇대와 부딪히고선 그 힘을 잃고 맙니다. 되풀이해서 돌멩이를 이어 차며 가다 보니 주위로 하나둘씩 무리 지어 걷는 아이들이 부쩍 자주 눈에 띄면서, 어느샌가 그 틈새로 선생님들이 양쪽으로 서서 아이들을 맞고 있는 교문이 불쑥 앞으로 마중하듯 나섭니다.


또래보다 머리만큼 웃자라 처음부터 뒷자리로 앉게 되었지만, 이건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복도 쪽 창가로 한 번씩 눈길이 머물곤 했는데, 그곳엔 머리를 양갈래로 곱게 땋은 여자 아이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선생님 말에 야무지게 귀 기울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공책 위로 받아 적는 연필 글씨에도 덩달아 힘이 실렸는데, 굳이 연필심에 침을 다시 바를 필요도 없이 짙은 손글씨가 또박또박 공책 위로 잘도 쓰이곤 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침을 바를 겨를이 없었던 건 어쩌면 그 아이를 몰래 훔쳐볼 때마다 까닭 모르게 입 속의 침이 자주 마르곤 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온 사방에서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더니 이내 여기저기로 벚꽃이 흩날렸습니다. 학교 갈 때 길동무가 생겨 더는 등굣길이 심심하진 않았지만, 정작 학교에 와서는 교실 안에서 무리를 지어 하는 놀이들이 슬슬 따분해졌습니다.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대로, 여자 아이들 역시 저들끼리만 서로 어울려 노는 통에 그 나이 또래가 할 수 있는 교실 속 놀이가 뻔할 수밖에 없었고, 몇 날이고 거듭해서 되풀이되는 놀이란 우선은 재밌어도 금방 싫증 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방과 후엔 곧장 집으로 가서 해야 할 일들이 저마다 산더미처럼 쌓였기에, 마지막 수업을 마칠 때쯤이면 누구든 서둘러 집으로 가기에도 바빴습니다.


갈래 머리 여자 아이의 집은 정반대 쪽이었습니다. 그 방향의 남자아이 한둘을 친구로 삼고 하굣길에 동무해서 무턱대고 몇 번 뒤를 쫓다 보니, 잘은 몰라도 대충 그 아이가 사는 동네의 골목길까지는 어림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되돌아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어져, 마음먹고 뒤를 따를라치면 나중에 늦은 귀가로 인해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감내(堪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에게 속내를 숨기고 몰래 뒤를 따르는 마음속 설렘이 아무리 크다곤 하나, 집으로 돌아와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아직은 어린 동생들 뒤치다꺼리를 할 때는 스스로 한심해서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 아이의 새초롬한 얼굴을 생각하면 금세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곤 했습니다.


유월 볕이 아침부터 유별나게 따갑던 어느 날, 한나절이 지나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세찬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졌습니다. 막 수업을 마친 터라, 집 가까운 아이들부터 비를 피해 책가방을 머리에 이거나 윗옷을 뒤집어쓴 채 하나 둘 교문을 빠져나간 후, 텅 빈 운동장엔 미처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빗물이 웅덩이 진 곳으로 흘러들어 고이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젖은 흙으로 흙장난을 하며 앉아 있었더니 거짓말처럼 구름 걷힌 하늘로 다시 따가운 햇살이 비치면서, 학교 3층 건물 지붕 끝 닿은 곳으로부터 저쪽 먼 하늘 쪽으로 턱 하니 커다란 무지개 하나가 걸렸습니다.


신발이 젖을세라 물웅덩이를 조심스레 피해 가며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 드니 벽돌을 쌓아 둔 공터가 보이고, 한쪽 구석 모퉁이에는 모래더미 아래쪽부터 거칠게 채로 쳐낸 자갈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문득, 쉬는 시간에 여자 아이 여럿이 갈래 머리 책상 주위로 모여 공기놀이를 하던 게 생각났습니다. 둘러싼 아이들 사이로 보이는 재빠른 손놀림과 한 손으로 모든 공깃돌을 훔치고선 떨어지는 마지막 공깃돌을 깔끔하게 마무리로 채어내는 그 작은 하얀 손놀림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하마터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뻔하기도 했습니다. 홀린 듯, 바빠진 손길로 자갈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치며 둥글면서 예쁜 돌을 고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 여기 있어!"

머리 뒤쪽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나풀거리는 분홍색 반팔 드레스를 입은 그 여자 아이가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서 있었는데 눈앞으로는 우선, 먼저 내민 흰 팔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살그머니 길게 뻗어 펼친 손바닥 위로 눈깔사탕같이 동글동글한 공깃돌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윙윙거리면서 졸음처럼 쏟아지는 아찔한 현기증에 감히 오래도록 손 위에 눈길을 머물지는 못하고 슬쩍 눈길을 피하면서 멍하니 바라본 하늘엔, 그려놓은 듯 형형색색 무지개가 여전히 시치미를 뚝 떼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날 이후 갈래 머리 여자 아이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남아있질 않습니다. 여전히 학교 갈 때는 심심한 날이 많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남자아이들과 더 자주 어울려 공터에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속마음과는 달리 남자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한 번씩 고무줄놀이하는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냅다 끊고 달아나거나 얼토당토않은 짓궂은 말들로 여자 아이들을 울 릴 때가 더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벌이고 나서는 며칠 동안 마음이 영 편치는 않았지만, 그럴수록 자기 주위로 모이는 남자아이들이 많아졌고, 어떤 날은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을 열면 서툰 글씨로 삐뚤삐뚤 급히 적은 것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의 곱게 접은 쪽지가 책갈피 사이에 끼어있기도 했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남 모르는 장소에 숨겨 둔 구슬이나 딱지가 문득 생각날 때가 있는 것처럼, 그날도 뒷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무심하게 창가로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리가 비어있었습니다! 여자 아이 둘이 짝이 되어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책상 한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는데 이를 깨달은 순간, 그 빈자리보다 더 크게 비워진 가슴속으로 헛바람이 몰아치듯 쿵쿵대며 두근거리는 심장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방학이 끝난 후로 그 아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 옆에 쌓아 둔 전과와 수련장 더미 사이로 다섯 개를 하나로 모아 숨겨 둔 공깃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 지라, 혼자 속절없이 방바닥에 공깃돌을 던지고는 하나부터 순서대로 개수를 늘려가며 놀이 삼아 공깃돌을 낚아 채 봅니다. 공깃돌 다섯 개를 모조리 던져서 바로 뒤집은 손등 위로 살포시 얹은 후 이를 다시 던져 그 손으로 공중에서 한꺼번에 낚아채는 기술은 여전히 어렵긴 했지만, 여자 아이들 노는 꼴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그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남몰래 연습해 둔 보람이 있었던지 오늘은 단 한 번으로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손 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다섯 개의 둥근 공깃돌 속에는 그날 아이가 골라 준 두 개와 함께 스스로 골랐던 세 개의 공깃돌이 함께 뒤섞여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서로 구별이 되지를 않습니다. 다시 공깃돌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살펴보고 있자니, 가슴 한 구석이 마치 체한 듯 먹먹해지면서 그날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와 나풀거리는 분홍색 반팔 드레스, 그 속에서 하얗게 쭉 내민 눈부신 긴 팔이 자신의 물기 어린 눈 속으로 마구 쏟아지는데, 그 뒤편 하늘로는 생기 잃은 무지개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더니 허공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며칠 뒤, 2학기 반장으로 뽑히고 나서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수첩을 교무실에서 가져오며 우연히 보게 된 그 아이 이름 위로는 붉게 두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아래엔 '전학'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상처 위로 덧난 두 줄의 긁힌 핏자국처럼, 먹먹한 마음 위로 선연히 덧 새겨진 그 두 줄의 붉은 흔적은 그날 이후 한참 지나서까지도 아릿한 생채기로 남았고, 이사를 가며 두고 온 공깃돌에 대한 아쉬움이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질 때까지 그 아이의 갈래 머리 얼굴은 일곱 색깔 무지개로 남아 꿈속에서 한 번씩 흐릿하게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되풀이하곤 했습니다.

영일만에 무지개가 걸렸네요.

영일대해수욕장에 무지개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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