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집아기

엄마의 자장가

by 박상진

눈을 뜨니 아직은 밖이 캄캄한 이른 새벽이었다. 물론 전날, 6시로 미리 알람을 설정해 두긴 했지만 마치 이른 시간에 골프 약속이 되어있을 때처럼 그만 선잠을 자고 말았다. 오늘은 여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태안에서 모처럼 1박 2일의 형제 여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동쪽 끝 포항 영일만에서 서쪽 끝 태안반도까지 가로지르는, 그야말로 동서를 횡단해야 하는 국내 최장거리 노정(路程)이다. 맵에서 추천하는 최소 소요 시간만 해도 4시간 40여분이 걸린다니, 가다가 휴게소를 두어 군데 들리고 주말 교통체증에 잠시라도 발이 묶이면 다섯 시간은 손쉽게 넘어설 것 같다. 광명과 대구, 포항에서 각자 알아서 출발하기로 했지만 집결하는 시간을 점심 때로 정했으니 거리가 가장 먼 나부터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의 제약을 거의 다 풀기로 한 첫 주말이어서인지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평소보다 많아 보이기는 했지만, 포항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는 상행선의 교통량이 상대적으로 한산한 것이 눈에 드러날 정도였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내려 세종시로 접어들면서부터 그만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확 짜증이 밀려온 것이다. 교차로마다 길게 늘어선 차량의 대기행렬이 자치시의 외곽을 거의 벗어날 때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포항시와 같은 변방의 한적한 동네에 살아서는 좀체 겪지 않을 일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막내가 홍성에서 군생활을 했기에 면회차 왔다가 주말 외박을 이용해서 태안으로 함께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어림짐작하여 해안길로 접어드니 익숙한 바닷가 풍경이 실루엣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마침 날씨가 흐린 데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여, 아득히 펼쳐진 갯벌을 배경으로 서해 먼바다 쪽 수평선부터 흐릿하더니 순식간에 가까운 바닷가로 해무가 잔뜩 몰려왔다. 좀 전의 짜증스러움은 씻은 듯 사라지고, 동해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색다른 풍경 앞에 잠시 넋이 달아날 듯했다.


어머니는 이미 보자기 가득히 한차례 쑥을 뜯으신 후 내가 도착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준비해 온 김밥으로 점심 요기를 한 후 30 여분 앞서 도착한 대구의 막내 여동생과 광명 큰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함께 태안 바닷가 인근의 야산에 올라 난생처음으로 고사리를 뜯었다. 사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비록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이지만 어릴 적 나물 하던 시절에 대해 깊은 향수가 있다. 한 달 전 어머니가 코로나에 확진이 된 후 기력이 많이 쇠해지셔서 여행 날자를 여러 번 어지럽게 옮긴 끝에, 고사리와 쑥의 채취 시기와 맞춰서 어렵사리 날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닷가 모래턱 능선 가까운 쑥 군락지(群落地)에서 홀로 남아 쑥을 뜯는 어머니의 날랜 손놀림은, 비록 여태 본 적 없어 이번이 처음이지만 아마 재발랐던 예의 처녀시절 솜씨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사리는 야산의 비탈 여기저기서 억센 땅을 비집고 올라오고 있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채취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우선 시골 마을에는 나이 든 노인들이 대부분 살고 있고, 설사 채취해서 정성스레 말려둔들 고마워하며 맛있게 먹어 줄 자식들이 곁에 없으니 굳이 발품을 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식용으로 대중화된 고사리는 고사리 농장에서 전문적으로 재배하거나 수입해서 공급하면 그뿐이니, 이처럼 사람의 발길이 쉬이 드나들 수 있는 야산이라 할지라도 고사리가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다. 두어 시간, 셋이서 함께 딴 고사리 순으로도 순식간에 두 개의 배낭을 가득 채우고 넘칠 정도였다.


다시 해안 바닷길로 내려와서 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쑥을 뜯고, 나는 갯벌 가까운 데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미처 바닷물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갯벌의 웅덩이에선 마치 봄 아지랑이 같은 해무(海霧)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더니 마침 불어 온 산들바람에 실려 살랑살랑 흔적도 없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숙소로 잡아 둔 펜션은, 다시 차로 10여분 이동해야 할 거리에 있었다. 방은 하나만 예약해 두었는데, 최근에 지은 듯 하루 이틀 지내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 구례포구 둘레의 사구(沙丘)를 둘러보았는데, 태안 해상 국립공원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갯벌과 사구,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섬들이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어 서해안 특유의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까마득히 이어진 갯벌과 광활한 사구는 또한 온갖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는 생태공원이자 보고(寶庫)이기도 한데, 앞으로 체험형 관광지로 더욱 잘 보존하고 가꿔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자 때맞춰 해무가 물러나면서 서쪽하늘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평선에 다가갈수록 지는 해의 붉은빛이 더욱 짙어지면서 이젠 수평선 아래 먼바다까지 붉은 물감을 온통 풀어놓은 것 같다. 특히 잔잔히 밀려오는 붉은 물결과 그 보다 짙은 적갈색의 갯벌, 해안 가까운 모래사장 위를 거닐고 있는 일가족의 실루엣은 마치 달력의 화보(畵報)를 현실 속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오랜만에 남매가 함께 한 자리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마련한 술자리에서 어머니의 덕담과 함께 건배사가 있었다. 말씀은 않으셔도 이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을 어쩌지는 못하시리라. 애써 밝은 표정으로, '아들도 있고 딸도 함께 있어 좋다, 좋다'를 연발로 말씀하시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서 노랫말이 귀에 익숙한 흘러간 옛날 가요를 두어 곡 연이어 부르시는데, 둘 다 그 내용이 이별가인지라 이를 듣는 동생들은 웃고는 있지만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느닷없이 아이들 젖먹이 시절이 떠올랐다. 큰 애는 도무지 밤잠이 없었다. 엄마의 품을 동생에게 내줘야 했으니, 비록 말은 않았어도 마음으로는 애가 탓임이 분명했다. 밤늦도록 동화책을 읽어 주던가 아니면 장난감을 갖고 한참을 함께 놀아주어도 잠들 시간만 되면 쉬이 잠들지 못하고 칭얼대기 일쑤였다. 한 번은 슬픈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아이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다가 그만 섬집아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신의 처지처럼 엄마와 어쩔 수없이 떨어져 홀로 남은 섬마을 아기의 홀로 남은 슬픈 이야기 속에 몰입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양볼을 따라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는 난 사실 내심으로는 신이 났다. 이야기의 마무리로 동요인 섬집아기를 불러주면, 정말 거짓말같이 아이는 편안해진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막내 여동생이 귀가 살짝 어두운 어머니의 주의를 몰래 살피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야, 엄마 노래에는 뭔가 한이 실려있는 것 같제?"


수년 전,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어머니와 함께 창원 공원묘원에 있는 죽은 큰 여동생의 안식처를 찾은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에 어머니가 생각지도 못한 노래를 부르시는데, 난생처음 들어보는 당신의 노래이기도 했거니와 목소리의 떨림과 변주(變奏)가 가슴에 너무나 사무치게 들려 운전 중 앞을 가려오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가슴으로 묻은 죽은 딸의 안식처를 처음 찾아가는 엄마의 애절함이 노랫가락 마디마디마다 절절하게 맺혀있는 슬픔보다 어찌 더 애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제 어머니 곁에는 평생을 함께 살아온 지아비마저 없는 것이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마음이 심란해서 더욱 길어질 것 같은 밤이었으므로, 난 일부러 일찍 잠을 청했고 여동생들은 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주말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잔다고 서둘러 술자리를 정리했었다. 까마득히 짙은 밤, 우리들이 묵고 있던 숙소는 자장가 속 섬과도 같았나 보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어도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술자리에서 미리 불러 준 어머니의 자장가는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가 되어 모두가 어머니의 큰 품에서 하나같이 팔베개를 한 채 섬집아기와 같은 곤한 잠에 빠져 든 것이다. 오로지 어머니만 깊어가는 밤에 잠 못 이루고,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멀리 있는 지아비와 딸 곁으로 밤을 새워 달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동생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밤은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곤한 잠을 잤노라고. 그리고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도무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론 내내 섬집아기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작별 인사를 나누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인 끝에 입을 기로 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둔 엄마의 자장가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엄마의 품은 그리움 때문에 더욱 그리워질 날이 때가 되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엄마의 자장가를 함께 목놓아 불러보리라, 그리운 울 엄마의 노래를!


물안개가 봄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바닷가 풍경

기암괴초가 어우러진 바닷가

모래톱과 사구

모래언덕을 넘는 연인

구례포 해안 풍경

모래사장과 갯벌

서해안 일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