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파도를 희롱하는 법

by 박상진

오늘은 사실 아침 늦게 눈이 떠지기를 바랐다. 월요일부터 단단히 마음먹고 다시 시작한 아침 산책은, 3일이 지난 목요일 아침이 되자 온 몸이 쑤시면서 첫 고비가 찾아왔다. 전날 전해 들은 일기예보로는 오전 중에만 비가 내리고 열한 시 이후로는 줄곧 구름만 살짝 끼는 날씨라는데, 스스로를 변명할 구실로 삼고자 눈 뜨자마자 바로 밖을 살피니 내심 기다렸던 비는 오지 않고 구름만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행장도 꾸리지 않고 다시 누워 어떡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공원 산책로 곳곳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을 벚꽃이 사뭇 궁금해져서 운동화 끈을 다시 조이기로 마음먹었다.


맨몸뚱이 하나로 산이나 들로 쏘다니면서도 자연의 조화로움에 대해 저절로 깨우칠 때가 있다. 꽃이 필 대로 핀 벚나무 아래를 생각 없이 지나다가, 밤새 비바람에 시달리다 떨어졌을 꽃잎들이 문득 떠올랐다. 비바람이 심한 날이면 꽃비로 함께 내려 연분홍 꽃잎들이 여기저기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예년의 봄날 흔한 길거리 풍경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무슨 영문인지 길거리가 깔끔하다 못해 말쑥하기까지 하다. 누군가가 대빗자루로 길거리를 벌써 쓸고 지나간 듯 꽃잎은커녕 겨울지나 떨어진 낙엽조차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그래! 그래 봐야 아직은 산천초목에 물이 한창 오르고 있을 이른 봄날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부실만큼 환한 꽃망울은 세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견고하게 꽃잎들을 보듬고 있다. 어느 순간 분홍 물이 꽃잎마다 차고 넘치면 그때부터는 물빛이 옅어지면서 그 생기를 잃게 되리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니 결코 더는 미련 가질 일이 아니지만, 단지 그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로 며칠만이라도 더 나뭇가지에서 매달려 있다 지기를 바랄 뿐인데 때맞춰 불어오는 꽃샘바람은 이마저도 용납하지를 않는 것이다.


바닷가에 이르니, 우중충했던 하늘에서 푸른 물빛이 듬성듬성 비치더니 숭숭 뚫린 구름 사이로 햇살이 잠시 비쳤다간 금세 사라진다. 샛바람에 거칠어진 파도가 밀려와 방파제를 두드리니 거센 물보라가 일면서 이슬 같은 물방울이 바람에 실려와 얼굴을 간질인다. 혹시 날이 개여 햇빛에 얼굴이 그을릴까 봐 목에 두른 넥 워머를 양볼이 다 덮이도록 끌어올리니 답답하긴 해도 더 이상 얼굴이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덩달아 괜한 심통이 나서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영감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배를 탔다. 혼자서 가까운 바다에 나가 통발이나 자망으로 고기를 잡거나 힘이 부칠 때면 종종 낚시꾼을 배에다 태우고 용돈벌이를 하기도 했었다. 기상이 악화되어 물질을 나갈 수 없을 때는 하루 품삯이라도 건질 요량으로 아는 안면을 찾아 어시장 주변을 기웃거릴 때도 있었다. 그런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는 하영감인데 오늘은 어민회관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바다로 나가 오전 내내 빈 배에다 몸만 싣고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다. 바로 그날인 것이다.


벚꽃이 한창 꽃망울을 터트릴 이 즈음, 몹쓸 병에 걸려 두어 해 병치례를 이어가던 마누라는 병이 급작스레 깊어지자 거의 손 쓸 틈도 없이 바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벌써 4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두 살배기 딸내미를 남기고 차마 감기지도 않았을 눈을 감고 만 것인데, 죽은 마누라는 바로 자신의 첫사랑이었고 막 뱃일에 재미를 붙여가던 때였다. 그런 하영감은 마누라가 세상을 떠난 후 근 5년 가까이를 술에 절어 살았다고 한다. 죽은 제 어미를 빼다 박은 듯 닮은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었을 때 때맞춰 혼담이 들어왔고, 오랜 망설임 끝에 재취로 맞은 아내는 운 좋게도 별 흠잡을 데 없는 초혼의 처자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하영감을 알게 된 것은, 동네 단골 선술집을 드나들다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주인장의 주선으로 서로 안면을 트게 되었는데, 당시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었고 영감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스무 살가량의 터울이 있었다. 비록 나이 차이는 컸지만 첫딸이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둔 학부형의 입장이어서인지 선생으로 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처음부터 유별나서, 친해지고 나서는 하대하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한사코 마다하여 부득이 서로 공대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하영감에게서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굳이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퇴근길에 자주 드나들던 단골집이어서 만나게 되면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으니, 사실 청해서 만나는 경우는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벌써 소주 한 병이 비어져 있고 다른 병도 반쯤 마시다만 채였다. 뭐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기조차 어려울 만큼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모르긴 몰라도 뭔가 큰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부부싸움 끝에 가출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하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묵묵히 세 잔 술을 거푸 따라 혼자 마시는데, 그제야 고개를 슬그머니 들고서 나를 보더니 예의 사람 좋은 목소리로 하영감이 말을 건넸다.


"박 선생, 말이유. 이건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말인데, 사실 오늘이 죽은 내 마누라 제삿날이라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어, 잠자코 술을 따르고는 다시 입에다 털어 넣었다.


"죽은 마누라의 기일이란 말이오. 어느 해부터인가 마누라 제사를 따로 모시기가 눈치 보여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데, 그럴수록 그 사람이 더 그립더란 말이오. 마누라 재 뿌린 곳으로 배를 타고 나가서 이렇게라도 마누라를 보고 오는 날이면 한 동안 마음이 풀리곤 했는데..."


뭐라 할 말이 없어 잠자코 맞은편 탁자의 잔만 비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툭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탁자 위로 두어 방울의 눈물이 더 떨어지고 나서야 하던 말이 이어졌다.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 마음으로는 잊는다, 잊어야 한다 다짐해 보지만 커가는 딸 애를 보면 나도 모르게 처잣적 마누라 생각이 나는 거라. 이럴 땐 평소 안 그러던 집사람도 때맞춰서 어찌나 성질을 부리는지..."


술기운에 풀려버린 하영감의 말투에는 뭔가 모를 아련함이 배어 있었다. 횡설수설하며 다른 말들이 잔뜩 이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을 못 이기는 듯 앞으로 머리를 조아린 하영감의 정수리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흰머리만 듬성듬성 보였다.


'그래, 하영감이 그날 말했던 곳이 바로 이 근처였어!'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 곳에는 공교롭게도 낚싯배 한 척이 고즈넉이 바다 위에 떠 있었고, 봄 도다리를 잡고 있는 듯 어부의 손놀림이 몹시 분주해 보였다. 예전 이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순환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뱃길 만이 열려 있었던 곳,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설머리까지 한참을 걸어서 가면 산비탈이 곧장 바다로 흘러내려 더 이상 걸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그 막다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아마 꽃 같은 마누라를 마음속에서 차마 지우 지를 못하고, 망설이며 고르다가 비탈진 이곳의 봄꽃에 마음이 끌렸던 게지. 그날 아내의 유골은 이곳 어딘가에다 뿌렸지만, 대신 한 떨기 봄꽃을 가슴에다 품고 왔을지 모를 일이지.'


구름에 가려 사라졌던 햇살이 다시 바다 위를 비추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일순 깨웠다. 좀 전보다 더욱 많아진 햇살이 여전히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슬금슬금 파도의 뒤를 쫓고 있다. 더 이상 지난날의 하영감에 대해 떠오를 만한 개인적인 추억이 없는 것이다.


사실, 하영감은 일흔을 넘긴 지 몇 해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내가 예전 살던 곳을 일부러 찾을 일이 없었으니, 그의 부고를 알 턱이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는 자신이 살아 있었을 일흔 즈음의 이맘때, 바닷길을 산책하다가 근처에 떠 있는 낚싯배를 바라보며 자신을 떠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음을 아마 짐작인들 했을까?


가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하니, 완연히 개인 하늘에서 활짝 드러난 햇살이 새가 모이를 쪼듯 톡톡 따가움을 살갗에 더한다. 몸서리치듯이 파도가 덩달아 잔 물결을 일으키더니 이내 방파제의 그늘 아래로 냉큼 몸을 숨기고 만다. 햇살이 파도를 희롱하여 아지랑이로 피어나는 오늘의 봄바다는, 내게는 무척 가슴으로 아프다.

포항을 대표하는 환호공원 안 벚꽃나무

포항 앞 바다
포항 가까운 바다에는 여전히 해녀들이 미역을 딴다.

포항 구항에서 문어를 잡는 사람

어부는 오늘 이시가리와 아구를 많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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