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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Dec 17. 2022

No Way Home

이 글은 작년 이맘때 쓴 글입니다. 올해 4월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되면서, 이전에 쓴 글을 한 자리에 모으려고 하던 중에 이 글을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초겨울 날씨로는 그다지 쌀쌀하진 않지만, 약간은 헤살대는 듯한 바닷바람이 촉수(觸手)에 비수(匕首)라도 감춘 듯 살갗에 은근히 소름을 돋우며 몸을 웅크리게 만든다.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자 코끝이 아려 온다.


멀리 서쪽으로 노을 짙어가산등성은 어둠 속에서 그 끝을 흐리며, 오늘 하루의 안식(安息)을 찾아 동해의 푸른 물결 속으로 스며들어 스스로를 공양(供養)한다.


몸에 한기(寒氣)가 드니 왠지 마음이 쓸쓸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해마다 이맘때가 되어 분주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내일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곧 연말연시, 세모(歲募)가 바로 눈앞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거리 곳곳에서 들려오고, 옷깃을 단단히 여민 연인들은 그들만의 안식처(安息處)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분주하게 누비고 다녀 연말 거리 풍경으로 온당(穩當)치 아니한가?


어제는 막내와 모처럼 시내 나들이를 했다.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Spider-Man No Way Home)을 보러 영화관에 들린 것인데, 도무지 연말연시(年末年始)의 해거름 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한산했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氣勝)을 부리고, 이로 인해 정부가 불가피하게 집합 금지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연말연시를 맞은 사람들 마음마저 속박(束縛)하거나 구금(拘禁)하지는 못했을진대,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상가 네온 불빛만이 인적 드문 거리를 쓸쓸히 채색(彩色)하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어 오랜만에 중앙로를 걸었다. 문득, 대구의 동성로를 헤매고 다니던 어릴 적 이맘때의 풍경이 오버랩되었다. 그곳 상가(商街) 이름 역시 중앙상가가 아니었던가? 말쑥한 교복 차림의 젊은 날의 내가 제과점 안쪽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유리창 너머로 수다를 떨고 있는 어여쁜 여고생들 얼굴이 그저 해맑기만 하다.


맞아,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둔 바로 그 해 겨울이었어. 이성(異性)으로서 처음으로  여학생을 내 마음속에 둔 것은! 아주 오랫동안 가슴 깊이 몰래 갈무리해 오던 분홍빛 소망이 갑자기 현실이 되고, 마음속으로 꼭꼭 감춰 두었주머니를 끌르, 그게 유리창 건너편을 서성이던 일방적 연모(戀慕)가 아니었음게 되었을  그 벅차오름이란! 저물어 가던 그 해 겨울은 그래서 더욱 찬란했고,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의 환희(歡喜)로 내 마음은 늘 넉넉했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살던 곳이 바뀌고 사람들 역시 변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 해가 마무는 세모의 거리 풍경은, 어디에서 살그 본질이 달라진 적이 없었다. 적어도, 코로나가 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중앙상가의 골목길로 들어서자 길 모퉁이 전봇대 아래에서 몰래 숨어 담배 피우던 아이들이 황급히 돌아 선다. 마스크에 얼굴이 가려지긴 했지만, 초로(初老)의 몸매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본연의 아우라까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는가 보다. 슬쩍 지나치며 돌아보니 마스크에 가려진 눈매가 고운 걸로 미루어, 유니 섹스한 옷차림 탓으로 보이쉬(boyish)하게 보이긴 해도, 영락없이 어릴 적 선망했던 앳된 그 여아(女兒)들과 다를 바 없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사이로, 잠시의 회상(回想) 속에서 아련한 잔상(殘像)으로 떠돌던 내 젊은 날 연인들이 유리창 너머로부터 와르르 한꺼번에 무너져 린다. 이젠, 마음도 정녕 노 웨이 홈(No way home) 되고 만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거리로 나서니,

 가까운 거리에는 이제 인적(人跡)마저 드물다. 하지만 내겐 돌아가야 할 안온(安穩)한 집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문득, 며칠 전부터 환호해맞이 공원 안, 물의 공원의 양지(陽地) 바른 벤치를 임시 거처(居處)로 자리 잡고 있는 젊은 노숙자의 검붉은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사이 바람은 더욱 거칠어졌고,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부터 날아와 황량한 거리 위를 휩쓸고 있는 낙엽만이 상가의 네온 불빛을 하나 둘 워가며 새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인적이 드문 쓸쓸한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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