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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Dec 20. 2022

울릉도 김 선생님

김 선생님은 울릉도 사람이다. 나보다는 나이가 예닐곱 살 더 많다. 술은 좋아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는 않고, 게다가 일찍 취하는 편이다. 하도 오래전 일이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금세 서로 친해졌던 것 같다. 아마도 같은 학년을 담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김 선생님 이야기는 대부분 술자리에서 들은 것인데, 그 당시 우리는 퇴근길에 함께 어울려 학교 근처 대폿집을 마치 안방 드나들 하곤 했었다.


김 선생님은 국문학을 전공해서인몰라도 입담이 남달랐다. 술자리에서 말을 조곤조곤 풀어내기 시작하면 듣는 재미가 하도 쏠쏠해서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정도까지 말을 재미있게 하는가 하면,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택시를 탔는데, 물론 그날도 김 선생님은 술을 마시고 난 후였다.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 취중에 뭔가 썰을 풀긴 풀는데, 택시기사가 그만 김 선생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 목적지에 가까워졌는데도 이야기의 끝은 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택시기사가 김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이, 바쁘지만 않다면 택시비를 받지 않을 테니 나머지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없냐고 하더란다. 결국, 30여 분간 시내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다 난 후에김 선생님을 집 앞에 내려주었다고 다.


 일이 있었던 해 가을, 추석을 하루 앞둔 퇴근길 이야기이다. 3일이 연휴인 요즘과는 달리 당시는 당일만 휴무였기 때문에, 고향이 먼 선생님들부터 오전 수업을 마치고 자리를 비우자 교무실은  금세 어수선하면서도 헛헛해졌다. 내친김에 퇴근을 서두르고 있는데 김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대구까지 가는 데는 아직 여유가 많으니 경주가 고향인 도 선생님과 함께 셋이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슬며시 손을 끌었다. 말인즉슨, 명절에 고향 한 번 제대로 갈 수 없는 자신을 좀 위로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론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학교 앞, 단골 대폿집에 들어서니 주모(酒母)가 버선발로 사위 맞듯 우리를 반겨주었다. 명절 대목 며칠 전부터 손님 발길이 뜸해지기는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부추전과 고등어구이를 안주삼아 주모까지 넷이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저녁 먹을 때가 가까워져서인지 몰라도 정말 술이 술술 잘도 내려갔다. 가게 앞 입간판(立看板)을 들여놓고 가게 문까지 걸어 잠근 후에 주모가 쇠젓가락 장단으로 먼저 곡조를 뽑자 흥이 제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고향역'이나 '고향 아줌마'와 같이 주로 고향과 관련된 노래들이었다.


김 선생님이 노래를 부를 순서였다. 갑자기 손을 앞으로 휘휘 저어 젓가락 장단을 멈추게 하더니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노래를 조리기 시작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노래의 처음 몇 소절은 제 목소리로 불렀지만, 김 선생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오고 주모가 울먹이며 함께 노래 속으로 끼어들자, 때맞춰 도 선생님이 옷소매로 슬쩍 눈가를 훔쳤다. 그 미리부터, 내 안경 아래 양볼로도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서부터 추석에는 단 한 번도 고향인 울릉도를 가 본 적이 없다며 늘 신세 한탄을 했었다. 오늘 퇴근길, 셋이 어울린 자리에서 술김에 제대로 감정선이 터지고 만 것이다. 여덟 시를 훌쩍 넘기고 대폿집을 나오니 길거리는 벌써 한산해지고 있었다. 각자 제 갈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지고 나니, 그때부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구로 가는 막차가 밤 열시여 서둘러야 했고, 설사 30분 전까지 용케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남아있는 표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바로 다음날은 추석이었기에, 버스가 증차되지 않았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부득이 총알택시를 타야만 하는 것이다.


그날 자리를 함께 했던 도 선생님은 이듬해까지 함께 근무하다가 고향인 경주고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김 선생님과 둘이 함께 있을 땐 두고두고 이날 있었던 이야기를 재미 삼아 되풀이하며 웃고는 했다. 도 선생님은 자신의 모교이기도 했던 경주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몇 해 전 정년을 했다.


한 번은 김 선생님 집으로 놀러 갔다. 몇 해가 지나 오랜만에 동학년(同學年)에서 함께 근무를 할 때였는데, 지금처럼 날씨가 몹시 추웠던 때라고 기억을 한다. 동료 선생님들 앞에서도 사모님은 김 선생님을 "원수야!" 하고 이름을 부르곤 했다. 물론, 오랫동안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이전에 부부가 함께 떠난 학교 친목여행을 통해 서로서로 안면을 튼 가까운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선생님과 사모님은 국민학교 동기동창으로 이웃에서 함께 자란 어릴 적부터의 친구였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 갯바위 뒤로 몰래 불러서 갔더니 김 선생님이 느닷없이 뽀뽀를 하더란다. 결국,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변함없이 알콩달콩 다퉈가며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이자 부부로써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날 사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하루는 속이 되게 상하데예. 이 인간이 며칠을 두고 하루도 빠진 날 없이 술만 묵고 들어오는 거라. 꼴도 보기 싫어하던 참에, 찬거리가 떨어져서 시장 간다꼬 집을 나섰지예. 여섯 살짜리 큰 아이가 치맛단을 붙잡기에 얼라 좀 봐달라고 안켔능교. 그 카이 되돌아오는 말이, "얼라 봐주면 올 때 막걸리 한 통 사주나?"라길래 그런다고 했지예. 그래서, 장을 다 보고 나서 일부러 30분쯤 더 있다 집에 들어가 보이, 세상에나! 얼라가 화장대 위에 올라가 두 무릎 꿇고 양손은 머리 위로 든 채 꺼이꺼이 애닲게 울고 있는 거라. 열불이 나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예. 그 카이, 씩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시장 가서 안 오길래, 그 새를 못 참고 이 엄동설한에 여섯 살짜리 얼라한테 막걸리 심부름시켰다 안 카나. 두 통 사 오라고 시켰는데, 한 통만 사 왔다고 벌주고 있다고. 보소! 이렇심더, 우리 신랑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모두 포복절도(抱腹絶倒)를 했지만 김 선생님이기에 얼마든지 그럴만하는 눈치들이었다. ~허 하고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김 선생님이 얄미웠던지 사모님이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지났는데, 갑자기 으슬으슬 오한이 들더니 온 몸에 열이 나는 거라. 날은 그새 더 추워졌지, 이불을 둘둘 감고 누워 있는데 열두 시가 지나도 신랑이 오지 않데예. 팔다리까지 쑤셔서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만사가 귀찮아 신랑 올 때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 한 통도 없지, 정말 성이 나서 돌겠더라고요.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에 그만 눈을 떴지예. 옷을 벗고는 살금살금 근처로 기어들길래 이불을 양손으로 꼭 움켜잡고 꼼짝도 않고 있었지요. 그라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요 밑으로 손을  쓰윽 밀어 넣더니, "방바닥이 우째 냉골이고? 내가 퍼뜩 연탄 갈고 올게!" 이러데요. 생판 연탄 한 장 갈아 본 적 없는 사람이길래, "그래도 미안한 건 아는가 보지?"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들은 척도 안 했어예. 그라고 얼마 있다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길래 그냥 내버려 두었지요. 옆에 눕더니 금방 코를 골고 잘도 자두만요. 얼결에 나도 슬쩍 잠이 들었나 본데, 잠을 자다가 하도 추워 장판을 쓸어보니 방바닥에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거라. 겨우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가 봤지예. 하, 참!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더라고. 아궁이에 불기라곤 하나도 없기에 미심쩍은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다 타서 하얗게 재만 남은 연탄이 보이는 거라. 연탄집게로 연탄을 쓱 집어 올리니 생짜로 까만 연탄이 아래쪽에 놓여 있더라고요. 참말이지, 원수가 내게는 정말로 원수나 다름없어예!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가 차기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모님의 말투에는 김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면서 잔잔히 눈웃음을 지으며 신랑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열여덟의 나이, 때 묻지 않은 섬처녀의 풋풋함듬뿍 묻어나왔다.


이후, 김 선생님은 같은 재단의 중학교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직 중에 몸 한쪽으로 살짝 이상이 와서 일 년 가까이 고생을 하다가 정년을 맞았다. 간혹, 차를 타고 바닷가를 지나치다가 산책길에 나선 김 선생님 부부를 만날 때가 있었는데, 잠시 차를 멈추고 인사를 건네면 두 분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들리는 말로는 경산에 사는 첫딸 집에서 몇 년간 외손주를 돌보고 있다더니, 올 초에 집을 사서 포항으로 다시 이사 왔다고 다.


그러던 중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보(悲報)가 들려왔다. 사모님이 몹쓸 병으로 몇 년간 고생하다가 그만 소천(召天)하셨다는 것이다.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었고,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던 병이었지만 너무 급하게 하늘의 부름을 받았기에 주변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늘, TV를 보던 중에 갑자기 형님 생각이 났다. 김 선생님보다는 형님으로 부르기가 더 편했던 사이인데 그동안 너무 격조(隔阻)했고 무심하지 않았나 싶다. 급히 전화를 잇달아 몇 차례 지만 휴대폰이 계속 꺼져있다. 혹시라도 덩그러니 빈 방, 바닥에 온기조차 없는 냉골에 홀로 몸을 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스럽다.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전화를 하려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며칠째 동장군은 변함없이 기승(氣勝)을 부리고,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심신(心身)이 더욱 스산하기만 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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