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安東) 이야기

안동 3題

by 박상진

1. 安東驛에서

안동역이 가까워지자, 카오디오에서 듣고 있던 노래가 머릿속에서 씻은 듯 지워지면서 절로 다른 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아니지, 노래 속 맹세와는 달리, 난 약속을 지키러 지금 안동역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10여 일 전 따로 공간을 만들어 우리끼리 놀고 있는 카톡방이 안동 이야기로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여전히 왕성하게 일하고 있는 姜 변호사가 안동행을 제안한 것인데, 나와 더불어 安 전(前) 전무(專務)와 치과 의사인 韓 원장이 안동의 朴 사부(師夫)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후 몇 날 간, 일정을 서로 맞추느라 홍역을 치른 끝에 결국 일요일을 포함한 월요일까지 1박 2일의 여정을 확정한 것인데, 가히 백수와 현역의 입장이 서로 절묘하게 고려된 최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살고 있는 지역이 서로 다르니 함께 모여서 출발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고, 더구나 일요일엔 교회를 다니는 안 장로 님이 교회 앞마당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에 손주와 함께 놀아주고 나서 늦은 출발을 해야 했기에 안동역에 모이는 시간도 제 각각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충된 이야기가, 우선 1시에 안동역으로 마중을 나온 나와 강 변호사가 미리 만나 역 가까운 곳에서 놀다가, 4시 이후로 도착하는 안 전무와 한 원장을 한꺼번에 맞이하기로 한 것이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역(驛)이나 한번 구경삼아 둘러보려고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갔다. 대합실은 떠나려는 사람과 맞으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늘 보아오던 포항역 풍경과는 달리 생각 밖으로 한산한 편이었다. 도착시간까지 30 여분이나 남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는데, 대도시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역사 안의 편의시설 또한 단출해서 그야말로 시골역의 향기가 풀풀 났다. 역무원이 입구를 막아서 있던 가림막을 한쪽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보아 도착시간이 임박했나 보다 생각하던 차에, 갑작스레 '안동역에서'가 구내방송은 통해 흘러나왔다. 문득, 열차가 도착할 즈음엔 늘 이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나이 지긋한 역무원에게 다가가 기어코 묻고 말았다.


"수고하십니다. 혹시,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이 노래를 틀어주나요? 아마, 그럴 것 같아 여쭤보는 겁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역무원이 빙긋이 웃으며, 선뜻 그렇다고 대답해준다.


"뭐, 거의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 구십 프로쯤은 되려나. 다들 좋아하는 듯하고, 손님처럼 궁금해서 물어오는 분들도 계시긴 해요."


괜히 머쓱해지면서, 엄한 사람 붙들고 피곤하게 굴지는 않았는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노래가 끝나면서 도착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오며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찾고 있는 강 변호사의 낯익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이 보건 말건 둘은 반갑게 두 손을 맞잡으며 오랜만의 만남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실외에서 마스크의 의무 착용이 해제된 첫날 오후, 그것도 남의 눈 개의치 않고 탈마스크의 호사를 마음껏 누려본 아직은 좀 낯선 안동역 앞 풍경이었다.


2. 안동 고모

안동 하면 어릴 적부터 머릿속을 감도는 말이 하나 있다. 안동 고모! 몸에 있는 상처지만 언제 적부터 인지도 모르고 그 상처로 아팠던 기억조차 없는 상처, 안동 고모는 꼭 그와 같은 마음속 상처이다.


사실 난, 지금껏 안동 고모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이미 여러 해 전에 유명을 달리하신 분이니 앞으로도 아예 뵐 일은 없다. 이런 분이 어려서부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난 상처로 자리 잡고 있다.


한 번씩 할머니의 원망 서린 푸념을 들을 때가 있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늘 판박이로 되풀이되는 말이었다.


"그년은 지 어미가 죽더라도 안 들다 볼 년이여. 몹쓸 년 같으니라고."


과연 그랬다. 집안 혼사는 물론,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형제자매나 그 배우자들이 한분, 두 분 돌아가실 때까지도 고모님은 얼굴 한번 내밀지 않으셨다. 그러던 중 안동 고모부님이 먼저 별세하셨다는 기별이 왔고, 아마 할머니나 다른 형제들 눈을 피해서 몰래 아버지가 문상을 다녀오신 눈치였는데, 이는 사실 어머니의 성화를 못 이겨서였던 듯했다. 어찌 되었던 그냥 지나치기에는 홀로 된 손위 시누이의 처지가 신경 쓰였던 것이다.


어릴 적, 지나 온 세월 이야기를 바람이 스쳐가듯 설핏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의 어머니가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을 때는 대부분이 손위 시누이들은 이미 다 시집을 간 상태였다고 한다. 아버지 아래로는 여동생 셋과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함께 살았던 기억이 내게도 남아있는 막내 시누이는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몹쓸 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동 고모는 9녀 2남의 혈육 가운데 다섯 번째로, 어머니가 시집왔을 때 무척 어머니를 살갑게 대해주셨다고 한다. 가까운 안동으로 시집을 갔으니, 자주 친정을 찾았을 테고,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를 하던 올케가 늘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안동 고모는 이후 살아가며 겪게 될 다른 고모들보다는 훨씬 더 고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었기에 호감을 보태는 일이 오히려 더 손쉽게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할머니를 모시는 일과 관련해서 시누이와 올케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가 더러 있는데, 속으로만 끙끙 속앓이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할 때가 있다. 이럴 땐 어머니를 대놓고 편들어주는 고모가 한분이라도 가까이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번도 뵌 적 없는 안동 고모가 머릿속으로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난 대부분의 형제들은 대구에서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대구에 자리 잡아 운수업으로 성공한 넷째 고모부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운수업과 관련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워졌을 테고, 할머니와 함께 아직은 어린 두동생을 돌보아야 했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특별히 아낀 넷째 누나의 부름을 거절할 순 없었을 것이다.


결국 넷째 고모와는 담 하나를 낀 앞뒷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후 셋째와 여섯째, 그리고 막내 고모가 같은 골목길로 이사를 왔다. 당연히 할머니가 계신 우리 집 안방은 어른들이 저녁에 모여서 노는 사랑방이 되었고, 어머니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밤늦도록 이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니 왜 서로서로 한두 번씩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넋두리 삼아 늘어놓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늘 자신을 편들어 주던 안동 고모의 고마운 마음 씀씀이가 슬쩍 끼어져 있곤 했던 것이다.


처음 내가 들은 말로, 안동 고모가 대구에 발걸음을 끊은 이유는 심한 차멀미 탓이라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안동과 대구는 사이사이에 비포장 도로까지 끼어있는 먼 길이었고, 시외버스가 흔들리면서 차의 엔진에서 스며 나온 기름 냄새가 차 안에 진동을 하는 데다가, 차편이 많지 않던 그 당시에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늘 만원(滿員)인 상태에서 차가 운행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 토하기라도 하게 된다면, 아니 그런 실례를 모르긴 몰라도 이미 여러 번을 했을 것이고, 이런 낭패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처음은 그러려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안동과 대구 사이에는 고속도로까지 놓이게 되었고, 전해 들은 바로는 자식들도 가까운 곳에 번듯하게 자리를 잡아, 나이 든 고모님 부부를 모시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든 다 구경시키고 다닐 만큼 효심이 깊다고 했다. 그런데 여전히 고모님 부부, 아니 고종 사촌들은 이쪽으로 발검음을 끊고만 것이다. 더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동을 다녀오시기는 했지만, 고모님 부부가 안동 시장에서 장사하느라 여전히 바쁘게 잘 살고 계시더라는 말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해마다 이전보다 못한 할머니가 혹시라도 잘못되실지 몰라 험한 일 당하기 전에 서로에게 생긴 앙금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몰래 길을 나서긴 했지만, 한 번씩 다녀오실 때마다 역력히 엿보이는 실망의 기색을 얼굴에서 다 지워낼 수는 없었다.


한 번은 속상해하는 어머니에게 안동 고모가 대구를 찾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무어냐고 대놓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이미 나도 나이가 들 만큼 든 상태이기도 했고, 어릴 적부터 얼굴 한번 본 적도 없이 쌓이기만 한 마음속 그리움은 되려 상처가 되어 한 번씩 생각이 날 때마다 속상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건 시매부들이 서로 시샘하고 싸워서 안 그렇나. 뒷집 너의 고모부가 운수업을 해서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자 당시 안동에서 장사를 하던 다섯째 고모부 가슴에 속 불이 났던 게지. 한 번씩 안동에 들르면 동서들끼리 그때까지만 해도 술자리를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어느 날인가 대판으로 싸움이 났던 모양이야. 서로 불같은 성격에다 지기 싫어했으니, 화해도 않고 그 길로 뒤도 안 보고 돌아서 온 거야. 먼저 장사로 돈 좀 만지던 아랫 동서에게 더 잘 번다고 돈 자랑만 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뒷집 고모부의 그늘 하에 있던 다른 고모부들도 이 일이 있고 난 후 안동으로 발걸음을 끊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런지도 몰랐다.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할머니 만이, 다른 가까이 있는 딸들과는 달리 자신을 찾지 않는 안동 고모에게로 깊어지는 원망의 마음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안동 고모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 마음속 상처도 그만큼의 크기로 덧씌워졌다.


이젠 어머니 말고는 살아계시는 분이 손위로는 아무도 없다. 안동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어머니에게 안부를 여쭈는 중에 안동 가는 길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차마, 안동 고모가 생각나더란 말을 못 했다. 어쩌면 안동 고모는 내게 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깊이 난 상처일지도 모를 일이기에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내 마음의 상처는 거짓말처럼 그 자국이 흐려지더니 이내 무덤덤해져 버렸다. 오히려, 어머니만 상처를 영영 지우지 못한 채 안고 가실는지 모른다. 평생을 가까이서 어울려 살아왔던 다른 시누이들보다 더 큰 그리움으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할런 지 모를 일이기에, 잠자코 혼자서 삭힐 수밖에 없는 고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늘만큼은 내 마음 역시 아프다.


3. 마스크 이야기

이번 안동 가는 길는 마스크 이야기가 줄곳 따라다녔다. 우선 이날부터 야외에선 마스크를 끼지 않아도 되지만, 안동역을 비롯해서 사랑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나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낀 채였다.


한 원장을 태우러 안동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세 시간 남짓 남았으므로, 우선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예천의 맛집인 용궁 단골 식당으로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두어 팀이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살짝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실외인지라 망설임 없이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손에 쥔 호출벨에서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가 울렸다. 따로 순대국밥을 먹던 중에 옆자리에 주문한 고추장 돼지불고기가 맛있게 보여 추가로 주문을 넣었는데, 불맛이 도는 돼지불고기의 매콤한 맛이 국밥의 진득한 맛 못지않게 맛있었다.


시간이 빠듯하여, 근처의 삼강주막에 잠시 들렀다가 안동역으로 되돌아가는데, 서툰 길을 돌아가느라 걸린 시간이 만만치가 않아서 결국 한 원장을 20여 분간이나 더 기다리게 만들었다. 친구를 태운 후 병산서원으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오늘의 호스트 박 사부를 만나 잠시 설명을 듣고 있는데 예정보다 한 타임 늦게 서울서 출발한 안 전무가 안동역에 도착해서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다섯 명이 오롯이 박 사부의 아파트에 모인 것은 7시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술자리 이야기 끝에 오늘의 화젯거리인 마스크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원장을 고등학교 졸업 후 다시 보게 된 것은 이번을 포함해서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재작년인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행사를 할 때 양재동 더케이 호텔 연회장에서 만나,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음을 우연히 알고 나서 오늘의 두 번째 만남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이 카톡을 통해 소식을 이어가면서, 혹은 내가 쓴 글에 달린 댓글에 대한 댓글로 대화를 서로 나누며 오랜 세월 어쩔 수없이 쌓인 낯섦을 거의 씻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래간 만에 본 친구의 얼굴이, 그리고 그 말투까지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것처럼 낯설지 않고 편하기까지 하다. 그런 한 원장이 고향인 문경 사투리를 섞어가며 마스크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고 있다.


한 원장이 일하는 병원의 직원 가운데서 확진자가 몇 명 나왔는가 보다. 집에 있다가 PCR 검사를 통보받은 친구는 집사람과 함께 지정된 장소로 검사를 받으러 갔단다. 오미크론이 극성을 부리면서 전국적으로 확진 의심자들이 쏟아질 때였다. 긴 대기줄에서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는데, 아내가 일러주기로는 60세 이상은 별도의 줄에서 검시를 받을 수 있는데 마침 그 줄엔 대기자가 두어 명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새 가벼워진 마음으로 줄을 옮기니, 안내를 하려고 그 줄에서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던 자원 봉사자 한 사람이 얼른 검사지를 들고 가까이 다가 오더란다. 그러면서 깍듯이 하는 말이, "어르신 도와드릴게요, 휴대폰 줘보세요.", 이러더란다.


한 원장은 파마해서 헝클어진 머리에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완전한 백발이었다. 게다가 의심 확진자들 사이에서 조심하느라 눈 아래까지 단단히 마스크를 한 채 줄을 서 있었으므로 사람 좋은 눈매만 살짝 드러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눈 가의 잔주름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판에 가린 마스크 사이로 눈 가의 잔주름만 더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안내판에 일러둔 절차에 따라, 휴대폰을 막 꺼내서 순서대로 접수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어르신, 이리 주세요. 얼른 휴대폰 달라니까요."


QR 코드를 찾느라 이리저리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은 신문물에 취약하기 그지없는 영락없는 80대 노인의 진땀 흘리는 듯한 표정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그런 노인이 말도 듣지 않고 허둥거리면서 꼰대처럼 뻗대기만 할 뿐이었으니, 저도 모르게 자원 봉사자의 말 끝이 약간 사납게 올라갔었던가 보다.


다시 휴대폰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뿌리치며, 기어이 친구가 참다못해 한마디 내지르고야 말았다.


"아니, 됐어여! 이 양반이 됐다는데도 자꾸 그러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온 겨우 60대 초반의 현직 치과의사가, 도무지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마스크 속 구십 노인으로 부지불식간에 둔갑하고만 웃픈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어진 친구의 이야기는 퇴근을 하려고 전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좀 덜 붐비는 노약자 석 앞에서 막 자리를 잡으려는데, 앉아서 이를 빤히 지켜보고 있던 노파가 앉은 채로 비비적 비비적 옆으로 자리를 물리더니, 빈자리로 눈짓을 하며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툭 던진다.

"여기 앉으시우."


못 들은 척 외면하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데, 이젠 모두가 들리도록 더 큰 목소리로 친구의 뒤통수에다 대고 마치 확인 사살하듯이 한마디 더 내뱉더란다.


"영감님, 내 말 못들었수? 여기 자리가 비었대도. 얼른 이리 와서 앉으셔!"


"아니, 됐어여!"


무안하면서도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오른 친구는 차마 더 모진 말로 응징하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돌려 복잡한 사람들 틈으로 자리를 옮겨 그 속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 두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는 술기운으로 들어서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느 쪽 일이 먼저였든 간에 첫 번째 일 때문에 두 번째 일을 겪을 때는 더 단단히 화가 났을 것 같다. 물론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을 아닐 테지만, 어이없이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속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친구뿐이겠는가.


오늘, 마침내 마스크를 벗게 되었으나 사실상 온전한 탈 마스크는 아니다. 아마,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는 날이 오면 두고두고 마스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안동의 첫날밤, 마스크 이야기로 날은 깊어만 가고, 우리의 우정도 그만큼 겹겹이 쌓이고 있다.


예천 용궁 단골식당

병산서원의 툇마루에 앉은 친구들

초간정에 앉아있는 친구들 (by 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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