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을 깎다

버릇

by 박상진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서 읽다가 무심결에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엄지손가락에다 대고 아래위로 문질렀다. 알싸한 감촉이 신경계를 통해서 머릿속에 불편함을 전달한다. 신기한 것은 분명 이런 감각은 엄지의 피부를 통해 전달이 될 테지만,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은 신경조직이 분포되어 있을 리 없는 손톱의 각질이다. 손톱의 각질을 달리 표현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보다가 엉뚱하게도 그 성분이 되는 말을 알게 되었는데, 단백질의 일종인 케라틴이다. 아무튼, 각질이 긁히면서 느껴지는 감각에 신경이 곤두서서 주위를 살피니 손톱깎기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아니, 살펴볼 필요도 없이 늘 있던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얼마 전 ,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들과 함께 태안반도의 구례포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마련된 술자리를 마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둘레둘레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말이 오가는 중에 막내 여동생의 사연을 귀담아듣다가 여동생의 손길을 쫓게 되었고, 다시 손가락의 손톱에 눈길이 머물렀다. 손톱을 물어뜯어서 생긴 손톱 주변의 상처나 손상 하나 없는 예쁜 손가락이고 손톱이었다. 속으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의 재미난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고 손톱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여동생의 손톱을 물어뜯는 오래된 버릇에는 오빠인 나의 영향이 크다. 막내와 나는 열 살의 터울이 지는데,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세상 일을 가리기 시작할 대여섯 살 나이의 어린 동생 앞에서, 오빠라는 사람이 허구한 날 손가락을 입에 넣고 무엇이 저리도 맛나는지 물고 빨고 있었으니. 아마 그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이러했음이 분명할진대, 이후 어린 동생의 입속에 늘 물려있는 손가락을 보면서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려니 하고 무심하게 지나쳐버렸다. 아직은 손톱을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이빨이 단단히 자리 잡진 못했고, 그래서인지 누구도 막내의 손가락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대학 다닐 때의 일로 기억을 한다. 밥을 먹다가 엄마의 느닷없는 질책이 이어졌다. 막내의 밥 먹던 손을 낚아채시더니 손톱 주위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야단을 치시는데, 그때서야 밥상 위에서 붙들려서 엉거주춤 오도 가도 못하는 동생의 손톱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과연, 엄지 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인 검지, 가운뎃손가락인 중지 손톱 가운데서 성한 것 하나 없었다. 슬그머니 밥 먹던 손을 아래로 내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불똥이 바로 내게로 튀었다.


"다 큰 오빠가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맨날 손톱을 물어뜯고 있으니, 도대체 애가 뭘 배울 수 있겠노!"


무슨 변명거리를 늘어놓겠는가? 손톱을 두고 어머니로부터 나무람을 들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날만큼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직은 열 살 남짓의 나이 어린 막내 동생 앞인 것이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이런 버릇이 단단히 든 사람에게는 참아낼 수 없는 유혹과도 같은 것이다. 난 이 버릇을 적어도 서른 중반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도 완전히는 버리지를 못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의 질책이 심각할 지경까지 이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질곡 같은 모진 버릇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이 버릇이 시작된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봄날의 어느 날, 한 울타리의 옆집에 살고 있던 사촌 누이가 마루에 걸터앉아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열 살의 나이였고, 누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더 많은 손위였다. 당시 누이는 3 공단에 있는 공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바로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었었다. 그런 누이가, 지금으로 보자면 사춘기로 접어들어 방년의 나이가 바로 눈앞인데 자신의 용모에 왜 관심이 없었겠는가?


책을 내려놓더니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손톱깎기 일습(一襲), 즉 네일 킷(nail kit)이다. 대뜸 손톱을 깎더니, 다시 줄로 문질러 손톱 날의 예기(銳氣)를 무디게 하고, 사포로 거칠어진 면을 고르면서 마무리를 한다. 다음은 손톱을 감싸고 있는 주변 살을 조심스럽게 칼질하여 잘라내 손톱을 에워싼 선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서슴없이, 이 모든 과정을 손가락을 옮겨가며 되풀이한 후에 마지막으로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모든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그 열중하는 누이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낮에 본 누이의 손놀림을 떠올리며 손톱을 깎고 난 후에, 연필 깎기용 칼로 기어코 손톱 살에 손을 대고 말았다. 서툴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손톱 살이 거슬려 여러 번 같은 곳에 칼질을 하다가 그만 손톱 아래의 속살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손톱 주위로 금방 핏물이 스며 나왔다. 서둘러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핏물을 빨아냈는데, 어린 마음에도 쇳독이 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처음 칼에 베어 통증을 느낀 이후로 같은 부위로부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아릿함이 되풀이되는데, 그 통증이 그리 싫지가 않은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손톱 주위로 붓기가 있더니 이내 곪아서 부풀어 올랐다. 결국 생각지도 못한 생손을 앓았는데, 새순 돋 듯 새 손톱이 돋아나고 얼마 안 있어 누렇게 말라버린 옛 손톱이 쑥 빠져버렸다.


멋모르고 시작한 일이 그만 독하디 독한 버릇이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까지는 몰랐지만, 중학교로 진학해서는 수업 중 나도 모르게 손톱 밑을 후벼 파고 있을 때가 있는데, 샤프의 촉이나 핀을 이용하여 손톱과 아랫 살 사이를 비집고 일어난 가시랭이를 떼어내느라 수업내용을 놓치기 일쑤였다. 이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여서, 수업 중에 선생님에게 걸려 지적을 받거나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불려 가서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러건 말건, 손톱이 험해질수록 아릿한 통증이 주는 감각적인 희열에 더 깊이 빠져들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손톱이나 주변 가시랭이 살을 물어뜯는 일의 빈도도 그만큼 더 잦아졌다.


특히, 당구를 칠 때는 왼손 손가락을 당구대 위에 활짝 펼쳐 지탱하고 검지만를 둥글게 말아서 그 사이로 큐대가 드나들도록 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손톱이 노출되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손톱의 험한 꼴을 보고 친구들이 타박하는 일이 많았는데,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귀에 거슬려도 그저 묵묵부답,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밥을 먹다가 듣는 하숙집 모친의 핀잔이나 꾸지람은 엄마의 그것에 못지않은 강도로 가슴속을 후벼 팔 때도 있었지만 그저 속으로 삭이며 가슴앓이할 뿐이었다. 나 역시도 이 질긴 버릇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기에.


심지어는 애들을 가르칠 때도 이와 비슷한 속앓이를 한 적이 있다. 도독질도 해 본 사람이 하는 법이어서, 선생님 눈을 피해서 딴짓하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인데, 감히 그런 내 눈을 속이려 하다니. 그리고 난, 딴짓하는 아이들의 성적이 어떻게 해서 곤두박질치는지를 학창 시절의 경험을 통해서 이미 뼈저리게 느껴보지 않았던가.


손톱 밑을 파다가 교실 앞으로 불려 나온 애들은 우선 풀이 죽어있기 마련이다. 다른 애들 보기에 쪽 팔리고 스스로 생각해봐도 민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눈물, 콧물이 다 쏟아지도록 야단을 쳐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나쁜 버릇을 삭초제근(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녀석들 가운데는 당돌한 녀석이 끼어있을 때도 있다.


"선생님도 늘 손톱 갖고 장난치잖아요! 아까도 교무실에 앉아서 손톱 파고 있두만."


교과서를 들고 있는 왼손을 빤히 쳐다보며 하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둘 사이에 벌어질 일을 미리 상상하며 흥미롭게 교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덩달아 한쪽으로 모이면, 난 괜한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린다. 결국, 이 독한 버릇 앞에 선생이나 학생 모두가 굴복하고 만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결혼이었다. 본인보다는 배우자에 대한 배려가 이 질기디 질긴 버릇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손톱 파는 일을 두고, 아무리 누가 뭐라 말한들 크면서 늘 들어오던 핀잔이고 꾸지람이니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이 보다 더 큰 구박을 받더라도 철갑을 두른 듯한 이 버릇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가 되고 체면에 금이 가는 일이라면? 내가 쪽 팔리는 것이 아니라, 개도 안 먹을 내 못된 버릇으로 인해서 배우자가 쪽팔려하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생기고 아내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주위의 시선을 부쩍 의식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세수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가지런한 손가락, 아니 깔끔한 손톱 매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이제야 그 지난한 버릇에서 비로소 해방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막내 동생 역시도 결혼한 이후에 이 지독한 버릇에서 벗어난 듯 하니, 아마도 내가 한 추측에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을 것 같다.


컴퓨터 책상 모서리진 곳에 놓아둔 손톱깎기를 손에 쥐었다. 손끝에서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나 손톱 여기저기가 근질거린다. 그 속에는 참을 수 없는 아릿한 통증의 희열도 뒤섞여 있다. 하지만 난 열 살배기 풋내기가 아니다. 이젠 손톱깎기만으로도 능숙하게 손톱을 잘라내고 그 뒤에 딸린 줄을 이용해서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할 줄도 안다. 버릇이 아무리 내 감각을 속이려들 지라도 이젠 그런 유혹 따위엔 쉽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기분이 산뜻해지는 아침이다.


《 포항 철길 숲, 불의 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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