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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04. 2022

포항 3 미(浦項 三味)

음식 이야기

1.

흔히 음식 속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면에서 보자면, 조리 방법이나 재료, 음식의 맛이나 식감(食感), 그 음식이 처음 유래된 곳 등등이 음식을 말할 때 우선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깃거리이다. 그러나 음식에 감정을 이입(移入)하면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985년 3월, 포항에서 고등학교 교사로서 첫발을 딛고 나서 난생처음 먹었던 생소(生疎)한 음식이 바로 밥식해였다. 시작부터 식해(食醢)를 식혜(食醯)로 잘못 알아들었는데 보통 식혜라 하면 먹다 남은 쌀밥을 엿기름으로 우려낸 물과 함께 삭혀서 먹는 전통 음료로, 흔히 경상도에서는 단술로도 부르는 그 식혜를 말한다. 단술과는 약간 다르지만, 안동 식혜는 이쪽 지역의 별미 음식으로 멥쌀이나 찹쌀로 지은 밥에다 무나 사과, 배 등을 고춧가루나 생강과 같은 향신료(香辛料)와 섞어 엿기름으로 우려낸 물로 발효(醱酵)시킨 인데, 어릴 적 명절이나 잔칫날 종종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와는 달리, 생선을 토막 내어 여러 식재료와 버무려 젓갈로 삭혀 먹는 식해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주로 가자미나 명태를 좁쌀과 함께 발효시켜 먹음으로써 그 지역 고유의 음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가자미를 삭혀서 만든  함경도 고유의 가자미식해가 특히 유명하다.


하숙을 처음 시작한 곳은 학교와 가까운 덕수동이었는데, 흔히 나루 끝이란 옛 지명으로도 불리는 곳이었다. 아마도 오래전, 죽장면이나 기계면의 높은 산에서 발원(發源)한 계곡 물이 동해 바다로 흘러내리는 강 하구(河口)에 이르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실개천을 따라 거룻배에 사람이나 짐을 싣고서 포항 시가지 여기저기를 드나들던 나루터의 끝이 바로 이곳이었던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하숙을 하면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하숙집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였다. 서둘러 출근해야 할 하숙생들을 위해 반드시 찌개나 국이 곁들인 아침상을 차렸는데, 날마다 몇 가지 맛깔난 반찬을, 그것도 아침, 저녁으로 돌아가며 상에다 올려주셨다. 다만 하숙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어느 날, 아침상에 올라온 처음  본 반찬 하나만큼은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았다. 먹다 남은 밥에다 채로 썬 무를 생선과 함께 고추장으로 버무려 놓은 듯 보이는 이 음식은 전날 과음(過飮) 한 탓인지는 몰라도, 보기만 해도 비위(脾胃)가 뒤틀려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하숙집 아주머니가 특별히 맛나다며 밥식해 속에서 얼마 없어 보이는 생선을 따로 골라내어 밥 위에다 얹어주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밥식해가 입맛에 맞는 음식임을 깨닫게 된 것은, 이후 포항에 살면서 여러 음식점을 전전하며 찬으로 흔히 내어놓는 밥식해먹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맛에 길들여지면서부터다. 결혼한 후 하숙집 아주머니의 손맛이 그리울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밥식해인데, 이젠 이를 맛볼 기회가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스무여섯 살에 처음 만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어준 밥을 6년이나 달아서 먹게 되었고, 그 사이 하숙집 아지매라 부르던 말도 모친이란 보다 편한 말투로 바뀌었다. 정말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나를 보살폈던 그 모친은, 재작년 당신이 평생을 의탁(依託)하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召天)하셨다.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빈다.


2.

과메기를 처음 먹은 것도 학교에 부임(赴任)한 바로 그해, 늦은 가을이 더욱 깊어져 깜깜한 밤거리로 칼날 같은 바람이 거리 위 낙엽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포장마차 총무를 줄여서 '마총'이라 불렸던 나는, 퇴근 무렵이 되자 만만한 명의 선생님을 엮어 술자리 약속을 잡았는데, 그날 선배 선생님이 목적지로 정해 둔 곳은 '워커힐'이란 술집이었다. 평소처럼, 퇴근길의 포장마차에서 뜨뜻한 오뎅 국물에다 닭갈비나 피조개를 안주 삼아 소주나 마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얼핏 듣기에도 귀에 기분 좋게 쏙 들어오는 '워커힐'로 간다니, 틀림없이 맥주나 양주를 마시는 바(bar) 일 거라 지레짐작되어 오후 내내 들뜬 기분었다.


시내가까워지자, 익숙한 발걸음으로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뒤편 골목길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몇 굽이를 곧 무너질 듯 보이는 2층 건물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굵은 매직 글씨로 '워커힐'이라고 투박하게 갈겨쓴 나무간판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입구 쪽에 야트막히 걸려있는 게 보였다. 실내의 후끈한 열기와 함께 곤로에서 타는 석유 냄새가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막 입구로 들어서는 코끝에 진동을 했다. 좁은 실내에는 곤로 하나 씩 둘레로 탁자와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고, 탁자활짝 펼쳐진 신문지 위로는 볏짚으로 아가미를 어 두릅으로 엮어 말린 꽁치들이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韓 선생님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꽁치 대가리 위 지느러미를 따서 껍질을 벗겨내더니 몸뚱살을 갈라 내장훑은 후에 발라낸 껍질과 뼈를 곤로 위에다 얹는다. 꾸덕꾸덕한 꽁치 살을 받아  吳 선생님은, 이를 실파, 마늘과 함께 물미역으로 둘둘 말아 붉은 초고추장에 듬뿍 찍고 나서는 한 입 가득 입속으로 욱여넣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바로 손질한 과메기인데, 꽁치를 해체하는 과정도 그렇고, 훑어낸 내장과 뼈를 잠시 곤로 위에다 슬쩍 익혀서 먹는 모습도 그리 달갑게 보이진 않았다. 내게 건네준 나머지 반쪽의 손질한 과메기를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날것 그대로 먹지 못하고, 곤로 위에서 익힌 후에 소금을 찍어 먹었는데, 이건 평소 먹던 꽁치구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의 첫 과메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대 밖의 장소에서, 결국 실패한 시식(試食)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술자리는 안주보다는 분위기라고 하지 않던가! 이후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술자리가 빈번해지더덩달아 과메기를 먹는 일이 잦아지면서 손수 과메기를 장만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고, 우리들 사이의 우의(友誼) 친목그만큼  두터워졌다.


 당시만 해도 일부 주당(酒黨)들만이 직접 장만해서 먹던 과메기는, 내장과 를 발라낸  자연 건조가 아닌 냉장으로 대량으로 말리는 기술에 더해져 위생적인 관리가 가능해짐으로써, 포항을 대표하는 겨울철 먹거리이자 경향(京鄕) 각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계절 음식이 되었다. 과메기를 안주삼아 함께 인생을 논할 때, 형 같은 든든함으로 버팀목이 돼주었던 두 분 선생님은 너무나 아까운 나이로 예기치 못한 사고와 병환으로 유명(幽)을 달리하시고 말았는데, 잊히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비감(悲感)스러운 마음이 더 커져갈 뿐이다.


3.

시내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육거리 근처에는 단골 길거리 다방(茶房)이 있었다. 당시 주변은 포항시청과 세무서, 경찰서 등 관공서(官公署)가 밀집되어 있어서 차 주문 많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만만치 않, 소위 말하는 다방 아가씨들이 다른 변두리 다방 아가씨들보다 월등히 예뻤다. 단골로 삼고 드나들던 다방은, 건물주이기도  다방 마담의 아들이 내가 근무하던 사학재단의 중학교를 나와 지역 명문인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마침 내가 처음 다방에 발을 들이바로 그해에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이라는 나의 믿을만한 신분에다 교육에 대한 신뢰가 더해져 마치 나를 손아래 동생처럼 반갑게 맞아주곤 했었다. 늦은 손님이 마저 자리를 비우고 나면, 노른자 띄운 쌍화차나 도라지 위스키를 느긋이 마시면서 마치 세상 일을 다 아는 듯 허세를 부리곤 했다. 어떤 때는 마담 누님이 슬그머니 돌아서서 웃음을 감출 때도 있었는데, 사회에 막 나온 핏덩이 같은 초임교사가 어찌 그 노회(老獪)한 웃음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해 여름은 마침 오징어 풍년이었다. 대구로 가지 않는 주말이어서 뭘 할까 망설이다가, 밥부터 먼저 먹어두자는 심정으로 시청 가까운 곳에 있는 순두부집으로 가던  잠시 다방엘 들렀다. 토요일 점심때여서인지는 몰라도 마침 홀에는 손님들이 없었다. 인기척을 듣고 마담 누님이 내실 밖으로 나오더니 얼굴을 알아보고는 곧장 안으 끌고 들어갔다. 아무리 단골이기는 해도 선뜻 내실로 발을 들이기가 뭣해서 잠시 주삣거리며 는데, 점심으로 오징어 물회를 만들어 놓았으함께 먹자는 것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다방 아가씨 둘마침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와 내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던 참이라,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고부터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를 몰라 참으로 난감(難堪)하기 짝이 없었다. 눈앞의 물회를 바라보니, 무채와 채로 썬 오징어 위에다 다진 마늘과 김을 고명으로 올려두었는데, 그 위로 참기름과 고추장을 두어 숟갈 버무려 놓은 채였다. 비벼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는데, 잠시 손짓으로 멈추게 하고는 물회를 담은 그릇에다 각얼음을 몇 조각 띄우더니 숫제 물까지 흥건하도록 부어준다. 숟가락을 입에 기도 전에 갑자기 비위(脾胃)가 틀렸다. 회를 무침이나 날로 먹지 않고 물에다 말아먹는다니!


결국 젓가락으로 고추장 국물에 담긴 오징어를 깨작깨작 골라먹는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보통 대구에서 오징어회라고 하면, 냉동 오징어를 끓인 물에 살짝 데치거나 아예 익혀서 성뚱성뚱 썰어 먹는 과, 산오징어를 그대잘게 회쳐 먹는  모두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포항에 온 이후로 물회니 뭐니 할 때도 손질한 생선회를 그저 초장을 흥건히 해서 비벼먹는 정도로만 생각했었기에, 지금 눈앞 고추장 국물 속에 담긴 오징어는 그 맛은 불문하고라도 먹는 방법조차 꺼려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젓가락질을 잘못하 흰 와이셔츠에다 붉은 고추장 국물을 잔뜩 흘리고 말았으. 실실 웃고 있는 다방 아가씨들 앞에서 정말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물회를 먹게 된다. 맛있는 물회 집이라면 시장 안의 남루해 보이는 횟집이라도 찾아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한 번씩 하숙집 앞을 지나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꼭 다방이 있었던 건물 쪽으로 눈길이 다. 시청이 새로 건축한 청사(廳舍)로 이사 나가면서 근처에 있던 다른 관공서들도 시내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주변의 다방들이 함께 떠나면서, 상가 건물에서 하나,  간판이 내려지더니, 언제부터인가 단골 다방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달을 전문으로 하는 티켓 다방만 몇 군데 살아남아서 업 중이긴 하지만, 내게 있어 단골 다방사라진 육거리는 희미하게 남은 몇 조각의 과 함께 그저 잊혀진 거리일 뿐이다.


길바닥으로 '아가씨 구함'이라 적힌 전단지(傳單紙) 한 장이 세찬 봄바람에 치여 양쪽 귀퉁이가 찢긴 채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닌다. 가는 길, 죽천 바닷가 물횟집에서 오징어 물회나 한 그릇 후련하게 말아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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