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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04. 2022

별은 가슴으로 흐른다

외갓집 풍경

어린 시절, 나는 밤이 무척 싫었다.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까마득히 먼 날의 밤은 외가에서 보낸 여름날의 먹장구름같이 무겁고도 짙은 밤이다. 그런 밤이면 장대비라도 곧 쏟아질 것 같이 마음이 우중충해졌는데, 사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돌아서서 남몰래 눈물을 찔끔거린 적도 있다.


외할머니의 방에선 늘 누룩냄새가 났다. 머리맡 구석진 곳에 있던 등잔불에 불이 켜지고, 더위를 물리려 활짝 열어젖힌 덧문의 문턱을 타고 넘어온 바람이 제풀에 씰룩이면 심지의 불꽃도 덩달아 크게 일렁이면서 언제부터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는 낯선 그림자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다. 특히, 모서리 진 구석의 그늘은 밤이 깊을수록 더욱 짙어지는데, 그 까만 어둠 속으로 웅크려서 몸을 숨길 때면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눌러 둔 엄마 생각이 다시 불쑥 솟아나곤 했다. 쏟아지는 졸음에 못 이겨 모기장 속으로 몸을 들이면, 외할머니는 눈물 그렁그렁해진 내 두 눈을 엄마 같은 살 냄새가 나는 손으로 쓰윽 한차례 훔치고는 무릎배게 위에 나를 뉘인 후 손부채로 바람을 만들어 더위를 쫓아내주곤 했다.


외사촌 누이는 나보다 불과 몇 달 밖에 늦지 않은 여동생이지만 한 번도 이름을 부른 적 없이 늘 오빠라고 불렀다. 외가에 온 첫날부터 뒤를 따라다니며 조물조물 챙겨주려는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운지, 생각이 어긋나 고집을 피우는 일이 있을 때 조차얼굴 붉혀가며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 누이의 손에 이끌려 논두렁, 밭두렁 길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저 멀리 야트막한 구릉(邱陵) 위로 뭉게구름을 곱게 이고 있는 원두막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원두막 아래의 이랑 골골마다 푸르게 갈래진 잎사귀 사이사이로 살포시 몸을 웅크린 수박 무게를 못 이겨 땅 속으로 머리를 살포시 묻은 채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올망졸망 나란히 누워 농밀(濃密)익어가고 있었다.


옹골차게 익은 샛노란 참외를 낫으로 서걱서걱 겁 없이 깎아내는 누이의 손길을 쫒다 보면 입안으로 절로 침이 고였다. 어미 제비의 처분을 기다리는 제비 새끼들처럼, 저 먼저 달라고 보채듯이 입을 오물거리고 있 동생들은 아랑곳 않고 반으로 싹둑 가른 참외를 어김없이 손에 쥐어주는데, 눈치 없는 어린 오라비는 냉큼 큰 입으로 한 입 베어 물고는 입속 가득히 고이는 달달한 맛에 어쩔 줄 몰라했다.


멀리 아래로 보이는 마을 집집마다 굴뚝에서 한 올 한  피어오른 연기가 땅거미 짙은 분지(盆地) 위에 모였다가 쌀뜨물처럼 한꺼번에 서산(西山) 위로 풀리고 나면, 이내 먼 하늘부터 어둠이 짙어오면서 마을 어귀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때맞춰 들리곤 했다. 미리 준비해  호롱불을 처마에 달고 수숫대나 갈대를 엮어 만든 발을 사방(四方)에서 내린 후 담요로 바닥의 잠자리를 고르고 나면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한 보금자리가 꾸며졌다. 주변으로 들리는 것이라곤 온갖 풀벌레 소리나 개구리의 쉼 없는 울음뿐인데, 웅웅 거리며 한 번씩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 까만 어둠 속에서 날아든 반딧불이 사방으로 실낱같이 흰빛을 뿌리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눈을 어지럽히고 었다.


외숙모가 머리에 이고 온 밤참을 내려 주고 간 후, 한참을 더 놀다 허기가 지면 대광주리에 담긴 보리밥을 아쌀하게 지진 된장과 함께 생나물을 듬뿍 넣어서 양재기 채로 비벼 먹곤 했는데, 된장을 살짝 풀은 고추장에다 참기름 섞어 골고루 무쳐놓은 쇠비름 무침 또한 별미였다. 낮에는 물만밥을 한 술 떠서는 풋고추나 멸치를 고추장에다 찍먹는 으로도 한때 끼니로 충분했는데, 수박이나 참외를 먹어서 잔뜩 불러진 배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자면 한참을 더 정신없이 놀아야 했다. 


밤참 물리고 난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울 때면 빠트리지 않는 것 바로 귀신 나오 이야기이다. 줄거리가 이미 알려진 전래동화나 전설  귀신 이야기, 굶주린 호랑이가 사람 잡아먹이야기나 마을의 연고 없는 무덤 이야기가 그 당시 주로 나눴던 무서운 이야기일 성싶다.


밤이 깊어지면서 하나, 둘 쓰러져 잠이 들면 참았던 오줌을 누러 가야 했다. 좀 전 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오싹하거나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는데, 애써 내려온 사다리로 곧장 돌아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멀치감치 떨어진 으슥한 곳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면 후련해진 몸을 따라 마음속마저 여유로워졌나 보다. 방향을 가늠하려고 올려다본 하늘은 그야말로 별 총총이었다. 더할 수 없이 까만 밤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아래로 후드득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영롱한 별들이 은하수로 무리를 지어 흐르고, 온 사방에선 별똥별이 긴 꼬리를 여운(餘韻)으로 남기며 이리저리 낙서하듯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이른 나이로 나를 낳으신 어머니가 애틋하셨던지, 기억이 닿을 만한 어린 시절에는 줄곧 외할머니가 에 있었다. 집으로 놀러 오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시골장터로 가서 쇠고기 국밥을 먹고 난 후엔 어김없이 외갓집으로 따라가서 몇 날을 보내야 했는데, 낮에는 시골집 마당에서 닭의 꽁무니를 쫓아 정신없이 나대다 보면 머릿속에서 엄마 생각을 깡그리 지울 수 있었다. 그러다 다시 밤이 이슥해지면, 아직도 곁에다 두고 어미의 보살핌이 필요했을 어린아이에게는 우선 떠오른 것은 어미의 손길이었을 것이다. 못내 그 손길이 그리웠던 나머지, 암만 참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찔끔 흘린 눈물 이내 양볼을 타고 뚝뚝 아래로 방울져 흘려내렸다.


별이 가슴으로 쏟아져 내린 그날 이후 더 이상 난 밤이 두렵지가 않았다. 물론, 눈물 흘린 적도 없었다. 그날, 마치 각인(刻印)처럼 가슴속에 새겨진 마음속 별들은 그 이후로 마음의 고향이며 안식처(安息處)가 되어 주었다. 모두가 도회지(都會地)로 떠난 외가엔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진 않지만, 아직도 밤하늘을 보면 여전히 별은 쏟아지고, 그 쏟아져 내린 별은 가슴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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