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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05. 2022

왜 그냥 보고만 있어요?

어린이날

종이 신문을 읽어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행정실로 배달된 신문을 교무실로 가져와서 읽은 적은 있지만, 보통은 터넷으로 주요 기사를 검색해서 보곤 했다.


종이신문은 어릴 적 손님들이 집에 올 때 종종 사 오던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 화려한 포장지를 뜯으면 선물상자 속에 개별 상품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는데, 초콜릿이나 쿠키, 웨하스 등 좋아하는 과자부터 먼저 골라먹다 보면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제과회사의 땡처리용 과자였다. 


종이신문 속 기사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전면의 헤드라인 기사에 눈길이 가지만, 양면으로 펼쳐서 페이지를 넘기면 자신이 늘 먼저 보게 되는 섹션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스포츠 면의 프로야구 기사를 가장 먼저 보게 되는데, 팀별 순위를 확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응원하는 특정 팀의 경기 결과를 선수들의 전날 활약상과 함께 세부적인 지표까지도 일일이 확인해 보곤 했다.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경제면의 주식 동향인데, 지금껏 주식에 투자해 본 적이 없으니 아무리 자극적인 기사로 눈길을 끌려해도 관심이 가지 않는. 내게 있어 주식이란 입맛에 맞지 않아 물상자 속에 마지막까지 남은 땡처리용 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서 볼 때는 처음부터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편식이 가능한 것이다. 반면, 종이신문을 볼 때는 비록 관심이 덜한 분야라 하더라도, 시간이 남아돌거나 무료해 있을  무심코 신문지를 넘기는 일이 있다. 별생각 없이 기사의 타이틀을 읽어 내려가다 그 아래로 몇 줄 읽게 되고, 결국은 기사의 내용에 빠져 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특집이나 기획 기사가 그러한데,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病理現象)이나 소외계층을 다룬 심층취재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땡처리로 상자 속을 채운 것이라 할지라도 내다 버리지 않는 이상은 모두 먹어치울 때도 있는 이다.


그런데 종이신문이든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서 , 내가 놓치지 않고  기삿거리가 있다. 바로 교육정책 청소년 관련 기사이다. 특히 입시와 관련된 교육정책은 해마다 큰 변화를 보이기에, 유의미한 데이터의 확보와 함께 유익한 진학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폭과 같은 사회적 병리현상의 종(從) 요소인 청소년은, 굳이 교육자가 아니더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누구져야만 하는 것이다.


학교를 그만둔 지 2년째 접어드니, 선생 물이 조금씩은 빠지고 있다. 방송이나 인터넷 포털에서 달라진 교육정책이나 입시제도에 대해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인 것이다. 머릿속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는 영어 단어나 문법 예문들이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혹은 반대로 그 보다 더 많은 숫자로 잊히고 있음을 깨달을 때 서글픈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 또한 그뿐이다.


하지만, 선생 물이 빠지고 있다고는 해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있다. 바로 가르침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에 관한 일이다. 어쩌면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여전히 나를 선생으로 바라봐 주는 시선이 있기에, 남은 선생 물이라도 차마 어쩌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날 난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이는 교단을 떠나고서도 마찬가지인데, 혹시라도 흐트러질지도 모를 마음가짐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일단, 교사로서의 신분을 밝히고 나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행동에 제약을 두게 된다. 내심으론 아무리 교사로서의 마음가짐을 공고히 들, 교사인 줄 꿈에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방종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신을 숨기면 그만큼 방종의 덫에 빠지기가 다. 다시 말해, 속절없이 방종의 덫에 걸린 채 선생답지 못한 행동을 되풀이함으로써 빈축을 사고 있는 선생님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자신만 전혀 모르고 있는 점이다.


아파트의 같은 통로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반갑게 맞아주며 아는 척부터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라며 나를 볼 때마다 먼저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도 있는데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가 있다. 그럴 때도 난 일일이 돌아가며 학년을 물어보거나, 각각의 눈높이에 맞춰서 격려의 말을 건넨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걸 물으면 꼰대라고 막내가 면박을 주지만, 그러면 도무지 누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같은 통로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내가 선생인 줄 대충은 알고 있고, 그래서인지 이들의 대답하는 말투 역시 공손하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사실 십수 년 전에 이 아파트로 처음 입주했을 때 젖먹이 꼬마로 만났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라서 대학생 어른이 되었는데도 이들이 나를 부를 때는 여전히 '선생님'인 것이다.


오늘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단지(團地) 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도로 우측 편 보도 위를 걷다가 예닐곱 살은 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아무런 낯섦도 없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네 다.


"안녕하세요. 학교에서 놀다가 잠바를 놓아두고 왔는데, 지금 그걸 찾으러 가요."


어리둥절한 기색을, 속으로만 감추며 맞장구쳐 주었다.


"그랬구나. 빨리 가야겠는데. 학교 마친 지 오래되진 않았어?"


여전히 공손한 표정으로 뭐라고 쫑알대더니, 깡충깡충 경쾌한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일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쟤는 왜 생전 처음 본 나에게 아는 척 인사를 한 거지? 그것도 제 볼 일을 나에게 일일이 알려주면서까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마도 아이의 눈에는 내가 학교 선생님으로 비쳤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 난 선생 물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막내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막내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애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까지는 좋은데, 절대귀엽다고 함부로 터치하지는 말라고. 사실, 좋은 뜻으로 사회적 약자를 도우려다 의도치 않은 말이나 신체적 접촉으로 인해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선의의 피해자들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어린 아동이나 미성년의 청소년들과 연루되어, 우연한 접촉이나 생각지도 못한 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떤 말 못 할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도 그러할 텐가? 또래의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폭언을 당하고, 용돈이나 소지품을 빼앗기는 자리를 우연히 지나칠 때도 마냥 외면하고만 있을 것인가? 아이들은 매번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왜 그냥 보고만 있어요?!'


아침 일찍 문을 열면 엘리베이터 앞에 아무렇게나 반으로 접어 던져 놓은 종이신문이 있다. 이웃집 동생이 받아 보는 신문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 있으그 자리에 잠시 서서 관련 기사를 읽어 볼 때도 다. 동생에게 미리 일러두었으니, 현관 앞에 가지런히 펴서 놓아둔 신문을 보고도 오해는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한 달은 청소년들과 관련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별로 눈에 띄질 않았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짤랑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가 건물에 있는 태권도장에서 간이 놀이터를 꾸며놓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고 있다. 내일은 어린이날인데, 베란다 밖으로 훤히 내다 보이는 환호공원 광장에서는 모처럼 만의 어린이날 행사도 열릴 것이다. 이날만큼은, 종이신문이나 인터넷 포털 어디서든 사람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어루만지고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반가운 이야기들이 넘쳐나면 좋겠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들판을


오월은 푸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누가 뭐라든, 오월은 바로 너희들 세상인 것이다!


<보고만 있진 않을 거야, 어디에 있던 네가 이 척박한 세상에서 꽃을 피운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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