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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05. 2022

선장(船長)은 옷으로 말한다

하숙집 이야기

며칠 사이, 날이 맑고도 깨끗하다. 봄꽃이 피는 시기와 맞물려 날씨가 큰 심술을 부리지 않으니, 코로나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그나마 좀 위로가 된다.


옛날 하숙하던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자면 아무리 못해도 10여 분은 걸렸다. 걸어서 출근해 본 사람이라면 그날그날의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서, 지금과 같이 변덕이 심한 봄철에는 눈을 뜨면 이내 창문을 열고 바깥 날씨부터 살피기 일쑤였다. 무턱대고 길을 나서다가는 가던 길에 비를 만날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내내 멀쩡하던 날씨가 퇴근 무렵이 되면 한바탕 소나기로 쏟아져 발이 묶인 적도 여러 번인 것이다. 이럴 때는 귀찮더라도 우산을 챙겨가라는 하숙집 할매출근길에 귀담아듣지 않았던  두고두고 후회스럽기까지 했었다.


한 번은 대구 본가(本家)로 가지 않은 토요일 오후에, 나른해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햇볕 잘 드는 거실 마루에 누워 쏟아지는 오수(午睡)와 씨름하고 있었다. 하숙집 할매가 안방에서 나오더니, 발로 날 툭 건드리며 지나가는 말로, 팔다리가 이토록 쑤신 걸 보니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질 거란다.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긴 해도 급작스럽게 비가 내릴 만큼 짙은 구름은 아니었고, 일기예보에도 비 소식은 없었다. 모처럼 맞은 당번 없는 토요일 날, 오갈 데도 없어 잔뜩 심통이 나 있던 참에 별 쓸데없는 소릴 다 한다며 대놓고 면박(面駁)을 니, 대뜸 비가 오나 안 오나를 두고 맥주 내기를 하자는데 불감청(不敢請) 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 그것도 거저 맥주를 마시게 주겠다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틀렸고 할매의 말이 옳았다. 어둑어둑해지자, 마른하늘로 물기 가득한 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만 느닷없이 베란다 물받침 위로 타닥타닥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맞을! 결국, 맥주를 담은 봉지를 양손에 나눠 들고 더욱 거세진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하숙집 문 안으로 들어설 때는 스스로의 경박(輕薄)함에 분노가 솟구쳤다. 예순을 넘는 노회(老獪)한 나이가 되면 절로 깨닫는 것이지만, 수명(壽命) 다한 노을이 제 색깔을 잃어 잿가루 날아가듯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바다로부터 샛바람까지 불어오면, 그럴 땐 어김없이 세찬 빗줄기와 함께 뼈마디가 시큼시큼 저리더란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십 대 철부지가 세월이 익어갈수록 몸에서 우러난 노인의 예지력에 대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하숙집 할매는 말년에 경증(輕症)의 치매(癡呆)를 앓으시다 구순(九旬)을 서너 해 앞둔 어느 날, 평생을 의탁(依託)하신 당신의 주님 품 속으로 영영 다시 못 올 마지막 귀한 발걸음을 하셨다.


석규 형은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퇴근해 보니 한 동안 비어 있던 중간 방에 새로운 하숙생이 이사를 온 것인데, 우선 나이가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데다 얼굴 생김새가 탤런트 김성환과 판박이여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환영식이 있었는데, 말투가 걸쭉한 데다가 허스키한 목소리가 영락없는 김성환으로,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노래를 부를 때는 스스로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는 트로트가 가히 절창(絶唱)이어서 무대 앞자리에서 김성환의 공연을 직관(直觀)하는 듯했다.


석규 형은 포스코와 그 계열사를 대상으로 비품을 거래하는 회사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어서, 좀 더 친해지기 전까지는 모두 최 소장님이라고 불렀다. 퇴근 후, 저녁 식사까지 마치면 하숙생끼리 어울려 장기를 두는 일이 많았는데 잡기(雜技)에 두루 능한 석규 형과 장기 고수인 권 선생이 서로 호적수여서 다방 커피나 맥주를 걸고 내기를 자주 벌였다. 그럴 때면 다른 하숙생들은 그동안의 승률을 나름대로 계산해서 그날 승부에 확신이 서는 쪽으로 편을 들었다. 훈수는 절대 불가여서 자신이 든 쪽이 이기기를 마음 졸이며 응원했는데, 대체로 권 선생이 6할의 승률을 거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석규 형은 판이 큰 승부에서 예상 밖의 선전으로 승부를 뒤집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보통 장기판벌어질 때는 편이 반으로 갈리곤 다.


이 당시 부산에서 시작된 가라오케 붐은 가까운 도시로 확산이 되어 서서히 북상을 하더니 마침내 포항에도 상륙했는데, 우리 하숙생들이 단골로 찾은 곳은 육거리, 우체국 맞은편 건물 지하에 있던 아리랑 가라오케였다. 하숙집에서 시작된 술자리가 2차로 이어지면 늘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곤 했는데, 옮겨 온 술자리 분위기가 막 달아오르려 할  이미 열한 시를 넘어선 밤늦은 시간이었다.


당시 가라오케는 요즘 노래방과는 다른 점이 많았는데, 함께 온 손님들이 방을 하나씩 따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놓은 널따란 테이블의 스툴에 일행들끼리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성인 가라오케 마스터가 노래 신청을 받아 음원을 재생해 주는 노래 반주기 '가라오케'를 통해 신청곡을 틀어주면, 노래를 신청한  순서에 따라 일행들이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


마스터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두어 차례 술잔이 돌아가고 있는데, 바로 맞은편으로도 손님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전주(前酒)가 있는 우리 일행과는 달리, 건너 편의 풍채가 건장한 손님들은 감청색 제복을 입고 있는 데다 금테 둘린 흰색 정모 머리에 그대로 것으로 보아 이 술자리가 1차인 듯 보였다. 오랜 항해하고  뒤 막 배에서 하선한 후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보였는데, 양쪽 옷소매에 금색 테두리가 각각 서너 줄씩 수(繡) 놓인 것으로 보아 직책 꽤 높은 선원들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왁자지껄게 선곡(選曲)을 끝낼 때까지 맞은편 손님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제복이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묘하게 동화되어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상당한 위압감(威壓感)을 불러일으켰다. 포항에 온 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로 출퇴근만 되풀이해 온 탓인지는 몰라도 포항 살이가 이미 서너 해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로 느끼는 실생활에선 여전히 생소한 것이 많을 때였다.


우리 일행의 신청곡이 모두 불려지고 난 후 건너편 자리로 마이크가 건네질 때, 혹시라도 들릴까 봐 나지막이 소리를 죽이며 옆자리에 석규 형에게 물었다.


"형님요, 저 사람소매의 금 테두리가 서너 개는 되어 보이는데, 모르긴 몰라도 선장 아니면 기관장 정도는 되겠지요?"


"하모, 아무리 못되어도  다 갑판장 이상은 안 되겠나!"


마침, 그들이 해서 부르는 노래가 죄다 바다노래 일색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시작으로 '마도로스 부기'와 '아메리칸 마도로스'까지 중저음(重低音)의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부르는데, 틈틈이 맥주를 마셔가며 마이크를 이손 저손으로 옮기면서 부르는 노래 솜씨가 뱃전의 키 돌리듯 능수능란하여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남이 부르는 노래를 칭찬법이 없는 석규 형이지만, 이날만큼은 신이 나서 탬버린으로 홀 안의 흥을 돋워가며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는 꼴이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날, 우리 김성환 모창(模唱) 가수는 얼추 동년배로 보이는 두 마도로스의 사생팬이 되어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함께 했고, 덩달아 흥이 난 우리 일행도 함께 합석하여 밤늦은 주취(酒醉)와 가무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새벽 두 시쯤 하숙집 앞에 이르니, 쥐도 새도 모르게 기척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큰 걱정거리였다. 벨을 누르자니 당장 하숙집 할매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돌아서서 길모퉁이 전봇대에 모른 척 오줌을 누고 있는 석규 형의 낌새로 보아하니, 젊은 우리들끼리 알아서 해결해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몰래 눈치를 살피다가, 석규 형이 볼 일 보러 길 모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틈을 타서 담벼락 옆에 주차해 둔 석규 중고차 보닛 벼락같이 딛고 올라가서는 재빨리 하숙집 담을 타 넘었다. 대문을 열어  때는 석규 형의 두리번거리는 눈길을 피해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사실, 하숙생들이 밤늦은 귀가를 하면서 석규형 중고차의 도움을 빌릴 때많았는데, 이를 처음부터 알리 없었던 형은 아침 출근 때마다 노발대발 쌍욕을 하며 보닛 위에 발자국을 낸 범인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형의 눈치를 보면서 몰래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았고, 그 순간만 지나면 또 며칠은 아무런 일 없이 슬기로운 하숙 생활로 이어졌다.


가라오케를 다녀온 후 며칠 지난 어느 날 오후, 당번을 하느라 늦게 하숙집으로 퇴근했을 때였다. 미리 와서 오매불망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석규 형이 대뜸 내 어깨를 툭 치면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한다.


"박 선생. 지난번 그 선장님을 오늘 퇴근하던 길에 500번 버스 간에서 만났데이! 차를 안 갖고 가서 버스를 타고 으로 오는데, 낯익은 제복이 보여 손님들 틈새로 보니 글마가 글쎄 운전석에 턱 하니 앉아 있는 거라. 와! 반가우면서도 정말 미치겠더라."


그제야 무슨 영문인지를 알게 된 나도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내버스를 거의 타 본 적없었기에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이 입는 정복을 눈여겨본 적 없었다. 그런데, 영화 에서나 나올 법한 선원들의 제복과 그날 그들이 가라오케로 입고 왔던 정복을 구별하는 애당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연 많은 석규 형은 몇 해 전 평소 앓고 있던. 지병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단다. 모처럼 만난 하숙집 할매의 맏아들이자 친구인 원필이에게 들은 소식이다. 하숙시절, 하숙집 할매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면서도 그만큼 사랑을 함께 받던 우리 하숙생들은 하숙집을 떠나서도 한동안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가정적으로 불행하여 스스로 혼자 사는 삶을 택했던 석규 형은, 집안일에 대해서는 함구(緘口)하는 일이 많았지만 아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을 하고 또 졸업 후에 취업을 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세상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자랑을 늘어놓곤 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제 두 분은  세상에 없다. 과연 하숙집 할매는 먼저 간 석규 형을 여전히 아래에 두고 한량없는 사랑으로 보듬고 계실까? 두 분의 명복(冥福)을 손 모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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