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먹게 되었다. 그 사이를 잠시 기다리지 못해 커피를 사려고 아파트 상가로 내려간다. 가는 걸음에 심부름으로 삼겹살과 양파를 사 와야 했으므로 미리 장바구니를 챙겼다. 한 해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내 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삼겹살을 이만 원어치를 달라고 했는데 저울 위에 놓인 양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다. 조금 더 살까 하고 고민하다 슬쩍 아랫배를 스캔해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대여섯 개의 고만고만한 양파가 들어있는 양파 한 망의 가격표에는 삼천 원이 약간 넘는 금액이 찍혀 있다. 일일이 손으로 꾹꾹 눌러보고는 단단한 놈만 들어있는 것으로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음은 우유인데, 1,000ml 우유 한 팩의 가격이 양파 한 망의 가격과 비슷하다. 같은 회사 제품을 원 플러스 원으로 묶어 파는 것도 있는데, 낱개로 살 때보다는 합산한 가격이 팔백 원가량 더 저렴했다. 잠시 망설이다, 지난번에도 묶음으로 샀다가 유효 기간이 넘어설 때까지도 마저 마시지 못해 아깝게 버린 우유 생각이 나서, 진열된 상품들 가운데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날짜 좋은 놈 한 팩만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에서 보너스 점수까지 알뜰히 적립한 후에, 건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으로 향한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막 주문하려는데, 주인 아가씨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걸어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액에다 얼음만 넣는 거지예? 몇 잔 드리면 될 까예?"
사실, 조금 전 마트에서 미리 우유를 사 온 이유가 지금 주문하는 커피로 아이스 라테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서이다. 집에 가서 우유와 섞으면 한 잔 당 천 원을 아낄 수 있으니 두 잔이면 이천 원, 주문할 때 약간 쪽팔리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가성비가 이만저만 아니다. 주문해 간 커피로 각자의 입맛에 맞도록 물을 타서 마실 것이라 짐작하고, 톨 사이즈의 컵에다 얼음이 넘치도록 조심조심 담고 있는 주인 아가씨의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다. 더욱이 일곱 잔 주문할 때마다 한 잔의 무료 쿠폰이 적립되고, 스타벅스나 심지어는 맥도널드조차 이미 커피값을 인상했는데 이곳은 여전히 현재 가격을 그대로 유지해 주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커피맛이 한층 더 좋은 듯하다.
장바구니와 커피를 양손에 나눠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주말 들렀던 단골 물횟집이 문득 생각났다. 물회 맛집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일반 물회의 가격이 만 삼천 원으로 다른 집 보다 이천 원에서 오천 원가량 저렴해서, 주말이면 어느 정도의 웨이팅까지 감수해야 하는 곳이다. 물미역 무침을 비롯한 밑반찬에다 홍합과 멍게까지 한 상으로 함께 나오고, 당연히 끓여주는 매운탕에다 식사 중에 추가 반찬을 여러 번 요청해도 싫어하는 기색조차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집 물회 가격이 올랐다. 그것도 물경 이천 원씩이나 인상되어 만 오천 원이라니.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뭔가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지고 만 것 같은, 진한 아쉬움과 함께 섭섭하기까지 한 생각이 불쑥 솟구치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셰익스피어의 희곡 '쥴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공부할 때, 브루투스(Brutus)의 마지막 칼에 찔려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저가 최후로 부르짖은 말인 '브루투스 너 마저도?'란 인상적인 대사(臺詞)가 불현듯 머릿속을 파고든다. 감히, '죽전 횟집, 너 마저도!'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 대한 배신감에 함께, 숨 막힐 듯한 야속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시저의 대사 속 심정은, 주어진 상황만 약간 다를지언정 지금의 내 마음속 심정과 다름없는 것은 아닐까? 금세 어처구니없는 연상(聯想)이란 생각이 들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다만, 서로 믿음을 주고받아 온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일방적으로 깨어지면, 그 정도만 다를 뿐 깊은 상처가 되어 지속적인 아픔으로 남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이리라.
결국 모든 생각이 물가로 귀결되고 만다. 그날, 오고 가면서 보았던 알뜰 주유소의 리터 당 가격이 천구백 원을 훌쩍 넘어서 있고, 내가 즐겨 먹는 세 개짜리 묶음 보리 건빵이 천 원에서 천 이백 원으로 올랐으며, 컵 라면의 개당 가격도 대부분 천 오백 원을 넘어선 데다 소주나 맥주와 같은 일반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주류의 가격은 이미 올라도 너무 올랐다.
'그래, 이것은 결국 내가 장바구니를 들면서부터 알게 된 일들이야.' 한편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오늘내일 다르게 치솟고 있는 물가만 떠올리면 왠지 삶이 고달파지면서, 무거워진 장바구니만큼 내딛는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도 덩달아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