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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10. 2022

물티슈

아무런 생각 없이 나선 길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볼륨 해서 평소 애청(愛聽)하는 포크송을 들으며 걷고 있는데, 얼마 전 막내가 꼰대들의 꼴불견 중 하나라며 제발 아빠는 그러고 다니지 말라던 말이 생각났다. 주말 나들이를 하중이었는데, 인이어 이어폰으로 끼고 저만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걷던 녀석이 막상 내가 노래를 들으려고 블루투스 스피커켜니 슬쩍 심통 맞게 건넨 말이었다. 어릴 적부터 붕어빵 같다는 말을 들어온 우리 사이에 갑자기 네댓 걸음의 생겨난 순간이었다.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고 물빛 하늘에 푸르름이 더해지니 이내 하늘이 말갛도록 파래졌다. 파란 하늘이 수평선과 맞닿은 곳은 오히려 푸른 물빛이 빠져 창백한 회색빛을 띠고 있다. 참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날씨며 풍경이었다.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섰기에 우선 바닷길부터 기웃거렸다. 편히 걸을 수 있는 평탄길이어서 자주 다니긴 하지만 바닷길은 정말로 심심하다. 옆을 오가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궁금하지도 않고, 게다가 평일 바닷길은 한산하기 그지없어 서로 눈이 마주칠 일도 다. 


오롯이 블루투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노래 가사에만 몰두하다 보니 눈으로 보이는  모두가 프레임에 갇힌 정물화 속 풍경처럼 생기를 잃고, 가물거리던 의식마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무의식 속으로 함몰해버린다. 어느 한순간, 머리 뒤편으로부터 익숙한 멜로디들려오더니 이내 내가 걷고 있는 공간 속 노랫말과 뒤섞였다가는 썰물 빠지듯 멀어져 간다. 쏜살같이 눈앞으로 내달리는 MTB 라이더의 낭에는 신기하게도 내가 가진 것과 같은 브루투스 스피커가 달려 있는데, 달아나듯 사라지는 그는 왠지 모르게 서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세상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니 그새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멀어지고 있는 자전거의 뒤를 계속 쫓다 보니, 불현듯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 집  베란다에 애지중지 모셔 자전거가 떠올랐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두어 달 정도는 날이 잡히는 대로 자전거를 타곤 했지만, 올 해는 자전거가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두 바퀴의 바람만 빠진 상태 방치되어 있다. 살 땐 그래도 큰맘 먹고 산 자전거인데, 애물단지가 된 지금은 이 때문에라도 한 번씩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된다.


십 년도 더 지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당시 산악자전거 바람이 전국적으로 불어서, 비록 이른 유행과는 거리가 먼 포항이지만 출근길에 MTB를 타고 일터로 나서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수는 있었다. 원래는 노란색 근무복에 안전모를 쓰고 힘껏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포항제철소 사람들로 넘실대는 것이 오래전 포항의 거리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고,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헬멧을 쓰고 알록달록한 라이딩 복을 맵시 있게 입고 도로 위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라이더는 그즈음 부러움의 정도를 넘어 내게는 워나 (want to be), 다시 말해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출근길에 앞차와 꼬리를 물고 있는 내차 옆으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가 있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멀찌감치 사라진 자전거의 뒤를 쫓아가는데, 에둘러 돌아가는 길이 길게 정체되어 있었다. 속도를 늦춰 운전하면서 앞을 살피니, 조금 전 보았던 그 라이더가 자전거와 함께 도로 위에 널브러있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MTB를 처음 타본 사람일지도 모를 그 라이더는 바로 앞에 정차한 시내버스와 다른 출근 차량의 틈새로 빠져나 자신이 없어 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것인데, 페달에서 슈 클릿을 분리하는 동작이 발에 익숙지 못했기에 그대로 버스의 후면을 들이받는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아찔한 사고 현장을 보고 난 이후  머릿속에서는 MTB를 타는 모습이 한동안 감쪽같이 지워졌었다.


이듬해 이 되자, 가까이 지내던 후배 선생님의 끈질긴 권유 덕으로 MTB에 입문하면서 포항 근교의 산판길로 첫 라이딩에 나섰다. 그 후, 몇 차례의 원거리 라이딩을 거쳐 몇몇 선생님과 함께 내연산 수목원을 출발하여 청송, 영양, 백암을 거쳐 포항으로 돌아오는 2박 3일간의 장거리 라이딩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청송 주왕산에서 민박으로 장거리 라이딩의 피로를 풀며 보낸 그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바로 길을 나섰다. 지도를 보며 인근에 있는 오솔길을 골라 업힐과 다운힐을 되풀이하며 힘겹게 라이딩을 이어간 후에 기진맥진해진 몸으로 영양으로 이어진 지방도로에 이르렀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잠시 쉬어서 늦은 오후에 영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또 달리고 달린 끝에 백암을 바로 목전에 둔 구주령(九珠嶺)에 이르렀다. 동행한 모든 사람들의 심신 탈진하여 솜에 물 먹인 상태와 다름없었지만, 이튿날 목적지로 삼은 백암온천이 앞에 있었고, 구주령 고갯길은  힘들 것 없이 구비구비 아래로 이어지는 다운힐 구간이어서 잠시 여유를 갖고 쉬어가기로 했다.


구주령 고갯길 오르막 외진 곳을 찾아 저마다 세상없이 편한 자세로 퍼질러 앉거나 누워서 가쁜 숨을 고르던 중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이 선생님이 새벽부터 참아왔던 볼일이 급했던지, 누군가 건네준 휴지를 서둘러 받아 들고선 길섶의 숲이 우거진 곳으로 잠시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우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거나 칭찬하면서, 힘든 여정의 마지막 날 저녁에 함께 할 성대한 주연(酒宴) 미리 마음껏 즐기이야기 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삼십 분 가까이 지나고 나서도 볼일 보러 간  양반은 도무지 돌아올 줄 몰랐다.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기다리다 못해 막 찾아 나서려던 참에, 볼이 잔뜩 부은 얼굴로 돌아온  양반은 대뜸 화부터 내며 볼멘소리를 질러댔다.


“대체 이기 뭐꼬? 뭔 휴지를 이리 질긴 비니루 속에다 처넣어 놨노? 이제 큰일 났다, 정말!”


모두 뭔 일이라도 났는가 싶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툴툴거리면서 그가 내미는 손바닥 위로 눈길이 모였다. 그런 다음, 쉬지도 않고 연방 투덜대는 그의 입속을 바라보다가 그만 포복절도(抱腹絶倒)하고 말았다. 손바닥 위에는 금을 덧씌운 어금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말이 슬슬 새는 왼쪽 천정 어금니 쪽은 휑하니 비어 있었던 것이다.


사연인즉, 숲 속 깊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시원하게 일을 마친  뒷정리를 하려고 티슈의 비닐을 찢는데, 티슈의 비닐 포장이 좀처럼 뜯기질 않더란다. 손 끝에 힘을 주고 아무리 뜯으려 해도 도저히 어지질 않아 원래부터 성치 않은 어금니로 대뜸 물어뜯었는데 그만 금이빨이 통째로 뽑혀 나오고 만 것이다.


당시만 해도 물휴지가 휴대용 위생용품으로 일반화되어있지 않시절이라, 뼛속같이 촌사람인 이 양반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물티슈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위생적으로 잘 처리하라고 생각해서 건네 준 것이 하필이면 물티슈였는데, 주유소에서 주유하고 난 후에 사은품으로 흔히 받는 휴지로만 알고 가볍게 손으로 비닐을 뜯었으니 쉽게 뜯어질 리 만무했다. 그로서는, 손으로 안되면 그냥 이빨로 물어뜯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일인 줄 알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보다 서너 해 먼저 정년을 하고선 예전처럼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동반 라이딩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작년 여름, 아직은 코로나 크게 기승을 부리지 않았을 때 영일대 해수욕장 주변한차례 라이딩하고 나서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함께 모여 논 적이 있었다. 퇴직하고 난 후 모처럼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을 보면서, 당시 백암 온천 라이딩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훗날 장거리 동반 라이딩에 함께 할 것을 기약했다.


바닷길을 오가는 자전거를 이리저리 넋을 놓고 쫒다 보니 새삼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예전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원거리나 길을 타지는 못하겠지만, 원하는 목표 지점을 설정해두고 구간별 라이딩을 하거, 하다못해 운동 삼아 집 주변을 돌아보는 가벼운 라이딩이라도 다시 한번 해 보고 싶다.


집에 돌아와 마음을 정리하며 글을 쓰는 동안, 책상 모퉁이 위다소곳이 놓여있는 물티슈에 절로 눈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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