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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19. 2024

미국에서 총알택시를?

학교 건물의 층간(層間)에 방화문을 단 것은, 학교가 새로운 교사(校舍)를 지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흐른 였다. 걸음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스테인리스봉으로 만든 지지대를 계단과 복도를 따라 설치하기까지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사이, 맹인들을 위해서 점자(點字)로 된 발받침과 유도선(誘導線)이 화장실과 복도 모퉁이에 깔렸고, 휠체어가 쉽게 오르내리도록 계단의 턱을 없앴다. 퇴직 몇  전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이런저런 신체적 불편을 가진 장애인들이 큰 어려움 없이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Wed. July 10, 1996. Clear. 17:30-22:00 'Crazy for You' at West Virginia Public Theater.  이는 연수단 일지에 기록되어 있는 연수 사흘째의 기록을 추린 것으로, 실제로는 연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대학 측이 주선해 공연과 관련된 내용이다. Summit  Hall Cafeteria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다운타운에 있는 WV Public Theater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오케스트라를 위한 지정석이 무대 아래쪽에 마련되어 있는 오페라 전용장이었다.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마치 동네 앞을 산책 나온 듯 편안한 옷차림을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 대부분으로,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올드한 커플들이 많았다. 서로 몸을 부축하며 걷거나 휠체어를 밀면서, 함께 온 이웃들과 정겨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쯤 해서 머릿속을 후비는 궁금증 한 가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미국에는 왜 장애인이 많은 것일까?'


오늘만 더라도, 배우자의 손을 잡고 뒤를 따르는 맹인들과 목발에 의지한 채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지체 장애자들, 그리고 휠체어에 몸을 의탁한 노약자들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관람석 1열은 아예 휠체어 전용석으로, 공연이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매진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공연장에 들어서면서 난생처음 본 스테인리스 지지봉과 점자판, 건물 곳곳에 부착된 대피도, 복도 바닥에 그려진 유도선과 방향지시 화살표가 왜 필요한 것들인지 하나같이 수긍이 갔다.


우리 자리는 대학 측의 배려로 로열석 바로 뒷좌석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사회자의 호명(呼名)으로 연수단 소개가 있었고, 뜻밖의 환대에 멋쩍은 표정으로 미저미적 일어나니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Crazy for You'는 오페라라지만, 뮤지컬에 가까웠다. 노래를 곁들인 가벼운 연기에 관객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육신짓누르고 있는 고통에서 모두들 벗어난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날 공연을 보면서 각인된 인상은 주말에 있을 피츠버그와 필라델피아 여행을 통해서 더욱 머릿속 깊이 새겨졌다.


피츠버그와 필라델피아를 여행하는 데는 대학의 연수담당자인 George의 역할이 컸다. 우선, 연수 첫 번째 금요일을 피츠버그의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비워 놓았는데,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을 이어서 필라델피아로 여행하도록 추천한 것도 George였다. 연수를 시작하고 맞는 첫 주말이기 때문에, 내친김에 주말을 이용해서 필라델피아까지 방문하라고 귄유한 것이었다. 살짝 경비가 부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식사를 거르게 되면 모두 일곱 끼의 식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매끼 당 20달러 가까운 식대가 책정되어 있었기에 각자 약간의 비용을 갹출(醵出)하면 교통비를 포함한 여행 경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액수였고, 식대만 알아서 형편껏 지출하면 될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자연사 박물관이 없었기 때문에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규모의 크기나 방대한 양의 전시물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공룡 전시관이 두드러졌는데, 로비에 전시된 실물 크기의 공룡 골격과 공룡 디오라마(diorama, 스크린에 입체로 투시되는 공룡의 실물 형상)는 정말 볼만했다.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인류 전시관과 지질학 전시관, 다양한 동물 박제와 표본, 그리고 생태계의 변화를 디오라마로 보여주는 동물 전시관을 관람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유람선을 타고 쓰리 리버스, 다시 말해 세 개의 강이 만나 삼각주(三角洲)를 이루는 골든 리버스를 관광하는 기회를 가졌다. 피츠버그는 과거 강철 산업도시로서의 명성이 자자했으나, 제철산업의 쇠락(衰落)과 함께 도시의 여러 지역도 낙후되고 말았다. 이후, 지난날의 퇴락한 도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골든 리버스를 중심으로 문화와 예술,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롭게 융합된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골든 리버스를 유람선을 타고 가다 보면, 후일 야구선수 강정호가 몸담았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전용 구장 PNC 파크가 보이는데, 그때는 강정호가 이곳에서 맹활약을 펼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런데, 구명조끼를 한 시간 가까이 착용하고 있자몹시 걸치적거렸지만,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이들의 방침을 이해하고 난 라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골든 리버스 크루즈를 마치고 나서는 미국 북동부의 명문 피츠버그 대학교로 가서, 펜실베이니아 주의 초중고 교사들과 함께 TESOL 연구수업을 듣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런 토론회야말로 미국으로 연수를 온 목적에 가장 부합되면서도 배울 점도 많아, 전체 연수기간 중 가장 의미 있는 활동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만했다. 우리 연수단이 제출한 저널을 TESOL 신문에 실을 수 있느냐기에 이를 허락한 것도 뜻깊은 일이었다. 미국에서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는 연구중심 대학에서, 외지 교사들이 주도한 것이라긴 하지만 학술 교환활동에 참여해 그 편린(片鱗)을 엿본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토론회를 마치고 나서 캠퍼스를 둘러보다가 미식축구장을 지나치게 되었다. 한참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NFL의 명문구단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떠올랐다.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팀이기에 피츠버그 대학 풋볼팀과는 직접적인 연관이야 없겠지만, 꿈을 좇아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어린 선수들을 보고 있니 나도 모르게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두들, 파이팅!'


필라델피아로 가는 교통편은, 그저께 George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레이하운드 round-trip ticket으로 미리 예약해 두었다. 일요일 오후 피츠버그로 돌아와, 그곳 도착시간에 맞춰 절한 교통편을 구해 Morgantown으로 귀환하는 여정(旅程)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필라델피아까지 고속버스 편으로 6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금요일 밤 12시경, 버스가 출발할 무렵엔 피츠버그에서부터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피츠버그에서의 여러 활동으로 곤죽이 된 우리 일행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화장실이 있어 그때그때 용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밤새 달리는가 싶더니 어느 땐가 잠시 버스가 멈추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저녁 일찍, 입맛에 맞지도 않은 햄 샌드위치를 먹어서였는지 속이 쓰려서 뜨거운 우동 국물이 생각났다. 하지만 눈에 띄는 건 노란색이 선명한 맥도널드 로고뿐이었다. 그래, 이곳은 미국 고속도로였지! 결국, 입에 맞지도 않은 햄버거 세트를 사들고는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목 넘김조차 쉽지 않은 미국식 햄버거를, 콜라를 숭늉 삼아 그저 목구멍 속으로 욱여넣을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에 버스가 도착했을 땐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허리케인으로 발달되어서였는지는 몰라도, 터미널을 벗어나자마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바람이 기승(氣勝)을 부렸다. 진회색의 짙은 어둠으로 우리를 감싸 안은 이른 새벽의 필라델피아는 왠지 모르게 처연(凄然)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장중(莊重)하기까지 했다. 터미널 근처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나니, 날이 밝아오면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잦아졌다. 전직 항공사 스튜어드로 미국을 여러 차례 다녀간 적이 있다는 선생님을 한 분을 가이드로 앞세워 트롤리(trolley) 버스를 탔는데, 주어진 시간 안이라면 환승(換乘)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신기해하기도 했다.  


영국으로부터 미국이 독립할 당시는 13개 주로 이루어진 연합국가였다. 미국의 초창기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는, 당연히 미국 독립과 관련된 상징적인 건물과 유물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름난 곳부터 우선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미국 헌법을 제정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독립기념관을 필두로, 미국의 독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유의 종과, 조지 위싱턴이 머물렀던 카펜터스 홀, 그리고 미국 최초의 대통령 관저였던 인디펜던스 홀을 순차적으 방문했다. 필라델피아의 랜드마크의 하나인 시청 타워와 맞은편에 있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람까지 마치고 나니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하기저녁부터 먹기로 하고는, 현지인들을 일일이 탐문해 인근에 있는 한식당을 용케 찾아냈다. 전라도식 설렁탕과 함께 나온 깍두기가 너무너무 맛있었다. 하긴, 근 일주일째 입맛에 맞지 않은 양식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냐마는. 한 병에 만원 꼴의 소주를 네댓 병 마시고 나니 피로가 싹 가신 듯했다. 식당 주인의 소개로 서너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쇼핑몰을 찾았다. 필라델피아 도심에는 한인 타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흑인들을 주 고객으로 삼은 곳이었다.


낯선 한국인들이 무리 지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아담한 체구의 한국인 여자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우릴 맞았다. 하지만, 간단하게 우리 소개를 하고 나니 그제야 환한 얼굴로 마치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겨주었다. 마침 자리를 비운 남편은 공군 중령으로 군복을 벗었는데, 오래전 자신의 친정이 정착한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한국 사람을 손님으로 맞이한 것이 하도 오랜만의 일이어서 사실 우릴 보고 무척 놀랬다고 . 선물로 나눠줄 게스나 켈빈 클라인 청바지를 몇 벌 사 오라는 집사람의 당부가 기억나서 물어보니, 할인가격이 한 벌 당 20달러로 Morgantown의 반값도 되지 않았다.


쇼핑몰 진열대 사이에서 저마다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몸매가 뚱뚱한 흑인 여자들이 가게를 자주 들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해 주며 이들을 살갑게 맞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계산대가 있는 자리에 돌아와서는 까치발을 들고 그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감시하는 것이었다. 대 놓고 손님을 의심하는 모습이 낯선 데다, 나 역시 고객의 한 사람으로 의심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살짝 기분이 불쾌했다. 그래서, 흑인 여자들이 가게를 나가자마자 물어보았다. 주인 말을 따르자면, 흑인들은 도벽(盜癖)이 심해서 가게를 나가고 난 뒤 없어지는 물건이 너무 많아 어쩔 수가 없고, 흑인들 스스로도 주인의 감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했다. 미국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엿본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지면서, 수년 전 LA에서 일어났던 흑인 폭동이 생각났다. 폭동의 시발점은 흑백 갈등에 의한 백인의 인종차별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만, 폭동 후 약탈의 타깃이 된 것은 엉뚱하게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들이었다. 리큐어(liquor, 주류) 스토어나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코리안 타운과 이웃한 흑인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고 있지만, 흑인 공동체를 위한 기부에 인색하고 돈을 벌 이내 백인 공동체편입하고자 애는 한국 사람들이 평소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세 벌의 게스와 두 벌의 켈빈 클라인 청바지를 계산하고 나니 싸게 샀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연수를 마치고 나서 버펄로로 건너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고, 일주일 동안 LA를 비롯한 서부지역을 여행할 때 짐 때문에 생길 불편은 후의 문제였다. 호텔로 돌아가서 여장(旅裝)을 풀고 난 후 잠자리에 들자마자, 누군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꿀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피츠버그를 거쳐 Morgantown까지 돌아가 길이 까마득했던 것이다. 게다가, 낯선 길이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여행에서 돌아올 다음날 일정을 비워두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다른 데를 들러볼 겨를도 없이 곧장 터미널로 향했고, 가까스로 출발시간에 맞춰 예약한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피츠버그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근처에서 멕시칸 윙을 사서 끼니를  때우고는 Morgantown으로 돌아 교통편을 알아보려던 참에, 터미널 건너편에 일렬로 늘어 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택시에 캡을 올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법 영업을 하는 택시들 분명했다. 특히, 영화를 통해서나 본 적이 있는 검은색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 눈에 띄었는데 6 인승이었다. 마침, 우리 일행 여섯 명이 넉넉히 타고 갈 수 있는  차였다. 터프하게 생긴 땅딸막히스패닉 운전사는 상고머리를 하고 있어 께름칙하긴 했지만 흥정 삼아 말을 건네보니 의외로 말투가 순했다. 짧은 실랑이를 끝에 1 인당 20달러로 가격이 정해졌는데 Morgantown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리를 감안한다면 합쳐서 120달러(당시 환율로 따지면 10 만원 안팎)이면 서로가 만족할만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라더니 미국까지 와서 총알택시를 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연수 첫 주를 지나면서 겪었던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의도된 일이든 아니었든 간에  모든 일이 하나같이 생소하고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사람의 안전과 관련된 일들이 바로 그러했다. 산업화가 빨리, 그리고 폭넓게 한꺼번에 일어나면 그만큼 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를 것이고, 그리고 그 대가는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이었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발전된 사회, 적어도 당시 미국이란 나라는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이런 면으로는 훨씬 더  앞서 있었던 나라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더욱이, 주말여행을 통해 실물로 그 명성을 확인 유적이나 유물, 다양한 박물관이나 빼어난 자연경관은 미국이란 나라가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명을 계속 이 땅에 꽃 피우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미국 탐방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의 가슴을 한층  설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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