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영어선생님을 뽑으려고 면담을 하는 자리였다. 이력서를 얼른 펼쳐보았다.연수이력을 또박또박 눌러서 적은 단정한글씨체가 인상적이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영어를 택했다는 아쉬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결원(缺員)이 생긴 선생님을 보충하는 한편으로, 원어민 교사와막힘없이 소통하면서방과 후 영어캠프를 책임져 줄 인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West Virginia University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지 않는가!
'특색 있는 학교'를 기치(旗幟)로 내걸고 방과 후 영어캠프를 운영한 지가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인근 학교의 원어민 교사를 차출(差出)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캠프에 활용할 교재를 만들고, 학생들의 출석을 관리하면서 원어민 교사의 수당까지 결산해 주어야 하는 등 여러 골치 아픈 제반업무가 따랐다. 하지만, West Virginia University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받은 재원(才媛)이다. 비록 한 달간의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내가 현장에서 겪어 본 West Virginia University의 한국 유학생들은 개인의 유능함은 말할 것도 없고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마저 남다른 학생들이었다.
우리 교사 연수단이 주말을 이용해서 미국 중동부 주요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연수 담당자인 George의 역할이 컸지만, 그를 보좌한 한국인 유학생 백인숙 양의 도움 역시이에 못지않았다. 아침 일찍 Summit Hall로 출근해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세심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George를 비롯한 여러 담당교수를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데도정말로 진심이었다. 연수 중 예기치 못한 우발적 상황을 맞아서는 유연한 일처리 솜씨를 보여 우리의 신뢰를 듬뿍 쌓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백인숙 양이 우리에게 베푼 가장 뜻깊은 일은 연수단과 현지 교민과의 만남을 주선한 일이었다. 연수 두 번째 주 하루 일과를 마친 어느 날 오후였다. 이날은 마침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와서 Morgantown의 야외 공원이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백인숙 양의 뒤를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잔디 위를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목구비가 영락없는 한국인으로, 이곳에 와서 거의 처음 보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공원 잔디밭에 놓인 데크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리가 정열 되자 교민 대표의 환영사가 있었고, 연수단장의 자격으로구미 금오공고 김영국선생님이 인사말을 했다. 그릴 위에서는 스테이크와 소시지가 구워지고, 데크에는 집집마다 따로 준비해 온 음식과 신선한 야채가 차려졌다. 서로 정겹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교민들 사이에 이런 행사가 이전부터 자주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날 모임에서, WVU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서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이분 말에 의하면, WVU에는 많지는 않지만 한국 유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학구열도 대단해 대부분 성적 장학생이라고 한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 직종으로 진출하거나 대학 교수로 이곳에 남는데 바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백인숙 양의 평소 처신으로 미루어, 교수님이백인숙양을 칭찬하는 말에는 추호(秋毫)도 의심할여지가 없었다.
두 번째 맞는 주말은 워싱턴 D.C.로 여행하는 일정이 진작부터 마련되어 있었다. 주말을 이용해 가까운 도시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울 때 우선 놀란 사람이 George였다.마흔 가까운 나이가 될 때까지 본인조차워싱턴 D.C.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포항에살고 있는 사람이 불혹이 넘어서도 서울 한번 가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부자 나라에서?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몇몇 강사역시 George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워싱턴 D.C.는 피츠버그를 경유할 필요도 없이, 토요일 아침 Morgantown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바로 출발을 했다. 워싱턴 D.C.까지는 버스로 네 시간 가까운 거리이니, 공교롭게도 포항에서 서울까지 걸리는 시간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워싱턴 D.C.까지 바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없어서 간선도로로 갈아타야 하는데, 주변이 온통 산악지대여서 한여름의녹음(綠陰) 우거진 경치가 아주 볼만했다.
한 번은, 버스가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고 있는데, 골짜기를 울리는 굉음(轟音)이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맞은편 비탈진 곳에서 열을 지어 내려오고 있는 할리데이비슨 무리가 보였다. 금속 별이 도드라진 가죽 재킷을 입고, 스카프를 두른 데다 무릎까지 덮이는 긴 부츠를 신은 이들의 머리 스타일은 자신들이 타고 온 할리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내리막 산비탈의 그늘에 갇혀서 음영(陰影)이 더욱 짙어진 이들의 실루엣은 차츰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이내 차창밖의 잔영(殘影)으로 남았다.
워싱턴 D.C.는 좀 더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암흑 속에 갇힌 듯, 길고 길었던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경(全景)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지금껏 머릿속에 남아있는 워싱턴 D.C.의 첫인상이 바로 그러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려왔던 모든 궁금증이 일 시간에 확 풀렸을 때의 희열처럼 말이다. 과연, 미국에 오기 전까지 생각해 왔던 워싱턴 D.C.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선, 워싱턴 D.C. 어느 곳에 있든 볼 수 있다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을 이끈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1996년 7월 20일, 토요일. 이날은 애틀랜타 올림픽 한국과 가나 축구 예선전이 열린 날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터미널 곳곳에 내걸린 배너로, 한국과 가나의 축구 예선전을 홍보하고 있었다. 일부러라도 가서 응원해야 할 참에 마침 우리가 워싱턴 D.C.에 있으니 생각하고 말고 가 없었다. 경기장에 좋은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지출이어서 가장 값이 싼 티켓을 구하기로 했다. 우리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긴 해도, 그라운드가 내려다 보이는 사이드 라인 응원석에는 한복차림의 유명 연예인 몇몇이 관객들과 어울려응원에 한창이었다. 붉은 악마가 막 태동(胎動)하던 시기여서,지금은 원로가 된 여자 코미디언과 가수 김흥국이 응원을 주도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무튼, 윤정환의 결승골로 1대 0으로 가나를 이기긴 했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예선 전적 1승 1무 1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는데, 다른 조의 예선을감안한다면 무척 아쉬운 결과였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서둘러 백악관(The White House)부터 찾았다. 관람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서두르긴 했지만 건물 외벽을 따라 이어진 대기 줄이 생각 밖으로 길지 않았다. 무료함을 달래주려 일정 거리를 두고 악사(樂士)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고, 백악관 가까운 광장 앞에서는 파리 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이 아카펠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저 스쳐가며 들은 노래였지만 천상(天上)의 화음(和音)이란 말이 무색(無色)할 만큼 듣기 감미로웠다. 정작, 백악관 안으로 들어서서는 줄을 따라가며 구경하느라 몇몇 집무실 말고는 별다른 감흥(感興)을 느끼거나 기억할 만한 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계획에 없던 축구경기를 관람하느라 워싱턴 D.C.를 둘러볼 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한국 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던 기억은 마치 어제일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과 국회 의사당(U.S. Capital Building)가까운 곳에 있어서 방문하기가 용이하기도 했지만, 눈으로 직접 본 화강암 벽의 부조물(浮彫物)과 전장(戰場)에서 정찰 중인 군인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스테인리스 조각상, 희생된 용사(勇士)들의 넋을 기리는 추억의 웅덩이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먼 이국땅에서 초개(草芥)같이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의 희생을 떠올리게 해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워싱턴 D.C.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굵직굵직한 역사적 건축물과 박물관, 이를 품에 안고 있는 공원이 있다. 국회의사당, 링컨 기념관, 워싱턴 기념탑, 백악관,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e),아름다운 국립공원(National Park)과 공원 속 잔디 광장인 내셔널 몰(National Mall)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데, 여행이튿날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한 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었다. 그만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여유를 갖고 보아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일찍,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서둘러 내셔널 몰 잔디광장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19개에 이르는 박물관과 연구센터, 국립 동물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박물관인 국립 자연사 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과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국립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을 순서에 따라둘러보기로 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보다 규모가 크고 다루고 있는 자료의 폭이 더 방대한 듯 보였다.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은 넓은 전시 공간에 라이트 형제의 동력 비행기인 라이트 플라이어와 달 착륙선인 아폴로 11호 모듈,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을 할 때 탔던 단엽기(單葉機) Sprit of St. Louis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입이 벌어질 만큼 많은 각종 항공기와 첨단 비행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였다. 국립 미국 역사박물관은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독립과 역사에 관한 사적지(史蹟地)나 유물을 미리 보고 온 탓인지 별다른 감흥은 일진 않았지만, 미국인의 생활과 문화, 예술의 발전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보거나 디오라마(diorama, 스크린에 입체로 투시되는 실물 형상)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워싱턴 D.C.를 여행하면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워싱턴 D.C.가 세계 정치의 중심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세계 관광의 수도라 일컬어도 결코 무리일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제나라 언어로 떠들고 웃어가며 워싱턴 D.C.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었다. 여행자들 사이로 기념품을 파는 손수레(souvenir cart)가 심심찮게 보였는데, 카트의주인은 베트남 이주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한국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날 우리가 만난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서 몇 가지 장신구와 기념품을 샀는데, 생각과는 달리 우리의 호의를 그리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필라델피아여행 중 우연히들렀던 식당과 쇼핑몰 주인의 환대를 떠올리니 마음이 괜히 씁쓸해졌다.
글을 쓰면서 떠오른 생각인데 한국인 유학생 백인숙 양과 한유진 선생님은 얼굴 생김새부터 닮은 것 같다. 똑 부러지게 일을 처리하는 솜씨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가 연수를 마치고 떠나면서 백인숙 양의 미래를 의심한 적이 없었 듯, 한유진 선생님 역시 기간제 선생님으로서의소임을 다한 후 임용고사의 장벽을 너끈하게 넘었다.
시차는 다르지만 이 나이 어린 여성들은 낯선 나라의 동일한 풍경 아래서 아마 같은 꿈을 꿨을는지 모른다. Summit Hall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모농거힐라(Monongahela) 강은 항상 검푸르게 보였다. 인근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사이에 있는 탄광 때문이라곤 하지만 산과 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마을 풍경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백인숙 양의 소식을 더는 알 길이 없지만, 한유진 선생님은 경북 소재의 어느 공립 중학교로 임용되어 결혼을 하고 아기도 가졌다고 한다. 학교에 함께 근무할 때 Morgantown에서의 첫인상으로 반딧불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유진 선생님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긴가민가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미 기억에서 흐릿해질 만큼 그곳도 많이 오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 덴버가 부른 'Take Me Home, Country Roads'의 노래 속 가사처럼천국이나 다름없는 곳, West Virginia! 갈 수만 있다면지금이라도 당장 그곳으로밤새달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