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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27. 2024

Resolution to Travel(여행 갈 결심)

무대 위에선 레게(reggae) 스타일로 머리를 길게 땋은 재즈 가수가, 스타카토로 툭툭 끊어서 치는 베이시스트(bassist, 베이스기타 연주자)의 현란한 핑거링(fingering, 손가락 놀림)에 맞춰 가슴골이 풍만한 상체를 꿀렁거린다. 스플래시 심벌즈가 찰랑거리며 리듬을 이어가자 나지막한 음색의 트롬본 연주가 뒤따르고, 흑인 여가수의 현란한 애드리브가 재즈의 진수(眞髓)를 보여준다. 대학가 선술집 어디에서든 보고 들을 수 있는 재즈지만, 집 가까운 골목길 레스토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처음엔 무척 낯설었다. 골목식당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가족끼리 어울려 식사하는 자리에서 재즈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게다가, 재즈는 어른인 우리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이 아닌가. 그리고, 무대 쪽으로 돌아앉아 연주를 들으며 몸으로 리듬을 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기가 막혔다. 이는, 가야금 병창(竝唱)이나 판소리를 들을 때 가야금과 장구의 가락에 맞춰 아이들이 어깨춤을 추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포항에도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생겨났다. 빕스(VIPS)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아웃백과 애슐리, 라라코스트가 뒤를 따랐다. 사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처음 식사를 한 것은 포항이 아니라 분당의 친구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흔치 않은 이름의 파스타와 스테이크, 포크메인으로 해서 감자튀김 등을 사이드 디쉬로 주문했는데, 상차림으 처음 나온 파스타가 어쩐지 입맛에 익숙했다. 이태 전 Summit Hall cafeteria에서 먹어 본 파스타와 그 맛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빕스였을 것으로 기억되는 패밀리 레스토랑 나들이 이후 마음속에 쌓인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Summit Hall cafeteria의 삼시 세끼를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Summit Hall cafeteria는 한국의 그 어떤 패밀리 레스토랑보다도 메뉴가 다양하면서도 퀄리티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입 짧은 몇몇 선생님이 준비해 온 고추장이나 밑반찬이 모두  날 때까지, 눈앞에 놓인 이국(異國)의 산해진미(山海珍味)를 하나같이 마다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때나 지금이나 가족이 함께하는 외식문화의 중심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 그리고 연수를 받으면서 새삼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의 중요성이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먹든,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마음속으로는  훗날을 기약했다. '이다음 미국으로 올 때는 반드시 가족을 동반하리라!' 오붓하게 모인 자리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재즈를 즐기는 미국사람들을 보면서 몇 번씩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한 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던 중 성악가이자 서울대 교수인 박인수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잡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인접한 코리안 타운의 골목길을 걷있던 중이었. 맨해튼 음대를 졸업한 박인수가 유학시절을 떠올리면서 뉴욕의 명소(名所)에 얽힌 자신의 추억을 회고(回顧)하는 프로그램 속에서였다. 수년 전, 뉴욕의 맨해튼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때가 떠올라 아이들을 당장 소파로 불러 앉혔다. 뉴욕에서 찍어 온 사진 속 장면들아이들의 기억에서 되살려  참이었다. 가족과 함께 여행 갈 결심이 어느 때보다도 더 공고(鞏固)해 진 순간이었다.


츠버그 국제공항까지는 George가 주선(周旋)해 준 WVU(웨스트 버지니아 대학)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Morgantown에서 피츠버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는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死體)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는데, 야생 고라니처럼 체구가 큰 동물도 포함되어 있어서 교통사고의 위험성이 아주 커 보였다. 주말 아침, 서둘러 출발한 덕분에 별로 지체(遲滯)됨이 없이 공항에 도착을 , 뉴왁 공항(Newark Liberty Airport)으로 가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제선과는 달리 국내선 항공기는 체(機體)가 아주 작아, 좁다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2열의 좌석이 후미(後尾)가 빤히 보이는 곳까지 배열되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는 몰라도 동체(胴體)활주로를 벗어나는 순간 몸이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렸다. 비행고도(飛行高度)가 높지 않아, 구름 사이로 피츠버그의 전경(全景)이 한눈에 들어왔다. 뉴욕까지 한 시간 반 남짓 소요(所要)되는 거리여서 비행기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처음에는 뉴왁을 뉴욕으로 잘알아들어서 JFK 국제공항(John F. Kennedy International Airport, 뉴욕 공항의 정식 명칭)인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뉴왁 공항이었다. 불과 20여 일 전, JFK 국제공항을 이륙해서 파리로 향하던 TWA 800편 항공기가 롱아일랜드 인근 대서양 상공에서 폭발해서 230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참사(慘事)가 벌어졌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피츠버그 공항에서부터 검색(檢索)이 아주 심했고, 뉴왁 공항에 도착해서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여행 목적을 묻는 별도의 심사대를 통과해야 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항에서 맨해튼까지 택시를 타고 가려면 일행을 4명 단위로 나누어야 했기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암트랙(amtrak, 미국 국립여객 철도공사)을 이용하기로 했다. 뉴왁 공항은 청사(廳舍)의 현대적인 시설이나 규모로도 엄청났지만, 당시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처음 타 본 무빙 워크(moving walk)는 그야말로 신문물(新文物)에 다름 아니었다. 12 연수단과는 달리, 우리 13 연수단은 지방의 중고등학교 교사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암트랙의 탑승권을 티겟팅하는 일부터 서툴렀다. 하지만, 어찌어찌 헤맨 끝에 뉴욕 관광의 기점(起點)이 된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에 도착을 했다. 과연, 세계 최대의 기차역으로 손꼽힐 만큼 건물이 웅장(雄壯)하기도 했지만 뉴욕을 상징하는 건축물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우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가까운 코리아타운부터 찾았다. 한식을 먹으면서 여행의 동선(動線)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는데, 흘림체의 한글 간판이 정겨운 설렁탕집이었다. 설렁탕 한 그릇이 10달러였는데, 필라델피아에서 와는 달리 별도로 팁을 지불해야 해서 입맛이 썼다. 식사를 하면서  지도를 펼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출발점으로 해서 유명 건축물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록펠러 센터를 필두(筆頭)로 NBC 스튜디오와 티파니 앤 코(Tiffany & Co.), 세인트 패트릭스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 트럼프 타워나 카네기홀처럼 귀에 익은 큰 건축물과, 영어 교과서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사이드의 유명 교차로인 콜럼버스 서클(Columbus Circle)에다 붉은색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멜팅 팟(melting pot, 인종의 용광로란 의미)으로 일컬어지는 뉴욕을 상징하는 마천루(摩天樓)이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 전망대로 올라가 뉴욕의 스카이 라인을 조망(眺望)해 보았다. 102층에도 전망대가 있었으나, 당시 일반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86층이었다.

건물밖으로 나와선, 지도에 표시된 동선의 순서에 따라 먼저 록펠러 센터부터 방문했다. 티파니 앤 코의 매장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 보니,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금세라도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 것 것만 같았다.


브로드웨이를 걸을 땐, 후일 이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한국인이 수두룩해지길 기원했다. 수많은 극장과 공연장들, 그리고 곳곳에 나붙은 공연 포스터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여전히 이 긴 여름날의 태양이 생기(生氣)를 다하자 금세 주위가 어둑해졌다. 센트럴 파크 가까운 곳에 예약해 둔 호텔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센트럴 파크는 '뉴욕의 폐(肺)'라고 알려진 곳이다. 흔히 대도시의 공원을 인체의 폐에 빗대긴 하지만, 센트럴파크는 그 말이 실감(實感) 날 정도로 녹음(綠陰)이 우거지고 그 사이로 난 샛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淸凉)했다.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공원 입구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樂士)생각났다. 막대 태극기를 배낭(背囊)에다 꼽고, 머리까지 목이 길쑥한 첼로를 작은 체구의 몸으로 버티면서 능란한 손놀림으로 애국가를 연주했다. 얼굴만 보고도 바로 한국사람임을 알아차리는 재주는 반복된 경험 끝에 터득한 재능이면서 생계를 이어주는 수단일 것이다. 앞에 놓인 동전이 수북해지자 마치 듯 익숙한 음률로 가락을 이어간다.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큰 박수가 터지고, 관람객들의 얼굴에 함지박만 한 웃음이 걸렸다. 아리랑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노래가 사람들의 자긍심(自矜心)을 부채질한 것이다. 나라밖으로만 나오면 누구든 애국자가 된다더니,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둘레길을 돌다 말고 서둘러 공원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맞은편 도로 위로 조깅하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휴일 공원이 본격적으로 사람맞이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린 뉴욕 여행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영접(迎接)하러 떠나야 한다. 그러니, '이만 안녕.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아일랜드(Liberty Island)로 가려면 맨해튼에서 페리(ferry, 여객선)를 타야만 한다. 8시가 되기도 전인데 매표소까지 이르는 줄이 벌써 까마득했다. 족히 1시간은 더 걸릴 듯하여, 별생각 없이 여기저기 말을 건네는데 이를 넙죽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건너 건너 뒤에 줄을 선 사람인데 사이에 낀 커플이 쭘해하더니 줄 뒤로 빠져 주었다. 면바지에다가 싼 티 나는 라운드 셔츠를 입었는데 말하는 나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다. 명함에 찍힌 직함(職銜)으론 이스라엘 경제산업성의 농무(職銜) 국장인데, UN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갖게 된 휴식일이라고 한다. 키부츠와 새마을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줄이 매표소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기상(氣象) 악화등으로 번번이 눈앞에서 발길을 돌리다가 세 번째 도전  꿈을 이루게 되었으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면, 단박에 자유의 여신상을 볼 기회를 갖게 된 우리는? 리버티 아일랜드로 건너와 자유의 여신상 전망대 앞에서 갈라섰는데, 이스라엘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반드시 연락해 달라는 말이 빈말일지라도 무척 고마웠다.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명함은 이후 수년이 흐를 때까지도 행운의 부적(符籍)이라도 되는 양 지갑 깊은 곳에 잘 간직해 두었다.


맨해튼을 돌아다니며 인상 깊었던 일이 하나 더 있다. 지도의 중요성과 지도를 읽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물배치도와 각 건물에 대한 설명이 적힌 지도가 건물마다 놓여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떤 지역으로 여행을 가든, 그 지역의 지형과 지역특징특성별로 세분하여 제작해 놓은 지도가 여러 벌씩 여유 있게 공급되고 있었다. 맨해튼과 같은 심(都心)은 Ave.(Avenue, 가[])와 St.(Street, 로[])로 구획(區劃)되어 지도상의 현재 위치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지도만 있다면 원하는 곳이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전날, 못했던 타임 스퀘어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과 소호 거리,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차이나 타운, 유엔 본부와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지도를 따라 쉽게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번 여행에서 거둔 수확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들 가운데서 건물 외양(外樣)만 보고 스쳐간 곳도 없지 않으나, 이날로부터 불과 5 년  테러범들이 납치한 비행기의 충돌로 붕괴되어 버린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참극(慘劇)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이프다.  


Morgantown으로 돌아올 비행시간에 맞춰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헤럴드 스퀘어에 자리한 메이시 백화점이었다. 11층의 메이시 백화점은 건물 자체가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상품과 해외 유명 브랜드를 골고루 쇼핑할 수 있는 쇼핑의 성지(聖地)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메이시 백화점을 바쁜 일정 속에서도 굳이 찾아온 이유는 국제 교육진흥원에 제출할 보고서의 영상 자료를 촬영할 캠코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내보다는 미국에서 사는 캠코더의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선생님 한 분이 최신 소니 캠코더를 구입하고 싶어 했다. 전자제품 코너를 방문해 목 좋은 자리에는 소니 가전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고, 삼성 캠코더는 단품(單品)으로만 서너 제품이 다른 나라 제품들과 뒤섞여 한쪽 모퉁이에 진열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아래층 공산품 판매장으로 내려가니 한국산 완구(玩具)와 봉제 제품이 가발과 함께 진열대의 목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당시로서는 아주 중요한 수출품이었음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선생님은 스트랩으로 감싼 손으로 촬영이 가능한 초소형 최신 소니 캠코더를 구입했고 남은 한 주의 연수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었다. 일순간, 구매 욕구가 일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누가 뭐래도 난 뼛속까지 삼성맨이었다. 그해 말, 둘째의 성장과정을 녹화해 두기 위해 삼성 캠코더를 구입했지만 캠코더의 스크린에서 불량화소(不良畫素)가 발견되었다. 두어 차례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살(默殺)되고 말았다. 불량화소가 눈에 띌 정도로 심하지 않으면 교환이나 환불이 처음부터 불가(不可)했고, 불량의 책임을 소비자인 내가 오롯이 떠맡아야 했다. 순수했던 삼성 사랑에 균열(龜裂)이 생긴 순간이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맨해튼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것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을 먹고, 보고 느끼고 들으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세계적인 명문 사립대학인 뉴욕 대학의 건물을 지나칠 때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생각났고,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이, 메이시 백화점의 유명 브랜드 앞에선  아내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느 일요일 아침, 채널을 돌리다가 화면을 통해 화염에 휩싸여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모니터에 붉은색으로 LIVE라는 글자가 도드라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임분명했다. 층층의 고층 건물에서 하나 둘 건물밖으로 사람들이 몸을 내던지는 모습이, 마치 울타리를 기어오르다가 제풀에 맥없이 떨어지는 개미처럼 보였다. 비행기가 건물을 뚫고 지나간 후 얼마 동안 화염(火焰)에 휩싸여 있던 건물이 약간의 시차(時差)를 두고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후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로 명명된 그 자리엔 희생자들의 추모 공간과 함께 벽면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9/11 Memorial과 국립 9/11 기념 박물관, 그리고 미국이 독립한 해인 1776을 104층의 높이(피트)로 상징화시킨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가 들어섰다. 세월은 유구(悠久)하다지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새로운 건축물로 대체함으로써, 이제 이곳은 인간성 회복과 평화를 염원(念願)하는 성지(聖地)로 거듭나고 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아이들은 내 품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세월, 기억 속에 다져놓은 '여행 갈 결심(Resolution to Travel)'이 흐트러진 것은 아니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노래했듯, '여전히 내 가슴은 뛰어오른다.(My hearts leaps up.)' 왜냐하면, 나의 여행이 처음 시작될 때 그러했으니, 나이 든 지금도 여전하고, 더 이가 들어서도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그의 말처럼, 언제 가는  아이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손을 이끌어 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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