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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13. 2022

노인의 숲

공원에서 꾸는 꿈

무슨 일이 있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난 정말 오랜만에 달성공원을 방문했다.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특별한 일이 있어 공원을 찾은 것이 아니었겠지만, 그날 공원을 다녀오고 나서 며칠간은 마치 심한 열병을 앓고 난 것처럼 멍하니 마음을 비우고 살았다.


그래, 생각해 보자.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어. 공원 내의 테니스 코트로 선배를 찾아갔던 거야. 잘 정리된 클레이 코트 황토 위로 하얗게 라인이 막 그어지고 있었지. 레슨을 받느라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의 선배와는 달리, 흰색 셔츠에 짧은 스커트의 동호회원들이 옆 코트에서 게임을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몰래 훔쳐보았던 기억이 나. 테니스 룩으로 스타일리시하게 자신의 몸매를 뽐내며 운동하는 여자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으니 충분히 그럴만했지. 그럼, 그 때문이었던 거야? 그날의 후유증이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잠시 테니스 코트를 벗어나서 공원을 둘러보는데, 오랜만의 방문이어서 그런지 마치 이곳이 처음 온 듯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공원 안 동물원의 우리도 배치가 조금씩 달라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두드러진 것은 잠깐잠깐 주의를 기울여 보는 풍경이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스포츠 중계를 보다 보면 정상적인 속도로 화면이 재생되다가 중요한 장면에서 초저속으로 화면이 느려져, 선수들이 서로 몸을 부딪히는 순간 온몸에서 분출되는 땀방울조차 생생히 볼 수 있는 그런 화면 속 동작들 말이다.


모든 것이 느려져 있었다. 진작부터 주변의 풍경들에 동화되어 있었던 듯 내 발걸음 역시 느려져 있었고 내 의식의 흐름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무지 수조차 없는 차원(次元)세상 빠져 허우적대며 안간힘을  벗어나려 보았지만,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결국은 포식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공상 소설 속 하루살이 인간 같은 절망감이 엄습했다.


5월의 화사한 날이었다. 며칠 사이 세찬 바람과 함께 요란한 빗줄기가 나무 가지 사이사이를 훑고 지나간 후 한 달 가까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온갖 꽃나무의 꽃잎들이 거의 다 떨어지고 그 자리를 파릇한 잎사귀들이 대신했지만, 뒤를 이어 울타리마다 그물을 앙칼지게 타고 오른 장미가 가시 넝쿨 사이로 기웃기웃 빨간 봉우리를 열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공원은 쉬어가는 공간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알 듯 모를 듯 온몸의 감각을 간질이고 있는 이 이질감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공원은 달리 하는 일이 없을 때, 오후 한 나절을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런 마음으로 여유롭게 걷던 걸음음 멈추자, 마치 사진 속에 갇힌 풍경처럼, 다른 모든 것의 움직임도 덩달아 멈춰 버린 것 같다. 우선, 평일이라 하지만 공원 곳곳에서 들려야 할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럴 땐 수풀  새들의 지저귐조차 생기를 잃은 듯, 깊은 산중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같이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랬구나! 이 나무랄 데 없는 공간을 생기발랄함으로 채워야 할 젊음이 보이질 않는구나. 이곳저곳 굴곡진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는데 모두 노인들 뿐인 것이다. 그제야 공원 속, 시간이 아예 멈춰버린 듯 정체되어 있던 공간 속 사물들이 제각기 고유한 동작으로 느릿느릿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난, 나도 모르게 굉활한 노인의 숲 속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달성공원이 노인들의 쉼터가 된 지는 벌써 오래전부터였 이는 말로만 들었이고, 눈으로 직접 본 그날 달성 공원의 민낯은 생각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버려진 공원, 그래서 노인들만의 아지트되어버린 공간이라니. 아무리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대구를 대표하는 공원이 아닌.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블랙홀처럼, 공원 저변에 깔린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해서 오로지 노인들만 닥치는 대로 흡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테니스 코트로 돌아왔을 때 선배의 레슨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옆 코트서 테니스를 치던 동호회원들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공원 내에서는 오로지 이곳만 젊음이 약동하고 구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여기저기 하는 일없이 무리 지어 모여있거나 벤치에 홀로 앉아 소일하는 노인들을 보았다. 야바위꾼의 꼬임으로 장기판을 기웃거리다 쌈짓돈마저 털리고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도 있다는 소문은 그냥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듯, 옹기종기 노인들이 둘러앉아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돈내기 박보 장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판판이 돈을 잃고 아쉬워하던 노인들의 한숨 소리가 테니스 코트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야바위를 당한 것 같은 분한 생각에, 두 손아귀로 도 모르게 불끈 힘이 모이기도 했다.


십오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둘째를 근처의 대학병원에서 낳았을 때, 동물원 구경을 시켜주려고 큰 애를 데리고 잠시 공원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여전히 공원 안을 서성대거나 공원 주위에서 무리 지어 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인들이었지만,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이전처럼 놀랍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 무렵부터는 우리나라도 장수 국가의 열에 들어, 어디를 가든 나이 든 사람들로 넘실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공원이다. 바닷길을 그 사이에 두고 있는 해상공원이기도 한데 체험형 놀이동산과 간이 동물원, 광장과 실외 공연장, 시립미술관과 스페이스 워크, 게이트 볼 코트와 운동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제 노인이라 불려도 할 말없을 나이의 내가 이곳을 즐겨 찾고 있다.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연령대에 따라 공원을 이용하는 시간대도 각각 달라진다. 산책로를 따라 가벼운 등산을 하려는 사람들은 아침부터 서둘러 이곳을 는데, 주로 아줌마들이나 육칠십 대의 노인들이다. 이들이 산책로에서 내려올 시간이면 공원은 아연 활기차게 깨어나 있다. 코로나 방역의 제약이 풀리고 나서부터는 노란색 승합차들로 주차장이 가득하고, 체험 활동하러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요란하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공원 광장으로 들어서면 스페이스 워크를 찾는 관광객들과 소풍 나온 중고등학생들이 뒤섞여 오월의 화창한 날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이 또한 몇 년 만에 보는 풍경이어서 그런지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공원이란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두어 시간 가까이 등산로를 따라 오르란 내리락한 탓인지 가벼운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직은 버틸만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스페이스 워크로 어어지는 언덕길을 따라 오르며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는데, 어느새 목덜미로는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다.


디시 지난날의 달성 공원을 생각한다. 1982년 당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남성은 62.9세이고 여성은 71.4세였다. 그랬던 것이 20년 후인 2021년에는 남성이 80.9세이고 여성은 86.8세로, 남녀가 각각 18세와 15.4세가량 수명이 연장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노인들만 옹기종기 모여 소일하고 있는 공원 속 풍경이 오랜만에 공원을 찾은 한 젊은이의 머릿속으로 얼마나 생경스럽다가왔을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노인의 숲. 그래, 그건 바로 노인의 숲이었어. 그해 가을인가, 난 이런 제목을 달고 공원에서 보고 느꼈던 일을 글로 써서 어딘가에 기고를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40년 후의 일을 미리 앞당겨 본 것처럼, 의지할 데 없이 사회의 변두리를 전전하는 소외된 노인들의 실상을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을 섞어 글을 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흐른 올해, 마침내 나는 40년 전 그해의 남자 평균 수명을 살짝 넘어 선 63세의 나이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날 내 눈에 비친, 공원 속 풍경의 주역들은 활기를 잃은 채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그래서인지 노인들을 좇던 내 의식의 흐름도 덩달아 느려졌고, 순간적인 연민에 빠져 마음이 슬펐으며, 이어진 며칠간은 미래의 나를 미리 상상하며 절망 같은 암울함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흘러서 이미 숲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를 반추(反芻)할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그게 항상 궁금했었다. 그때의 난, 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지난날처럼 연민하고 있을까? 그러면 안돼! 노인이기에 나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윌은 이미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스페이스 워크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영일만은 아늑하게 바다를 품고 있고, 오늘은 그 안을 드나드는 파도마저 유별나게 잠잠하다. 마음이 가라앉자 눈앞으로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진 듯 마음은 편안해지고 조바심이 사라졌다. 마치 저울의 눈금을 물리 듯, 할 수만 있다면 오늘만큼은 내 젊음의 눈금을 삼십 년쯤 뒤로 물리고 싶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공원의 숲은 여전히 푸르고,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공원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학생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사진을 찍거나 벤치에 앉아 노래를 으며, 어른들은 여전히 힘겨운 발걸음으로 스페이스 워크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흘러가세월 따라 저마다 익어가며 각자의 나이테를 두를 것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앞서, 쇼핑 카트에 몸을 의탁한 아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뒤를 쫓는 노인의 발걸음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그렇다. 여유롭고도 안온하게 저물어가는 노인의 숲! 진작부터 내가 그려오던 마음속 풍경 하나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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