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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프로야구, 이제 시작이다!

by 박상진

어제는 15회 졸업생의 회장단 이취임식에 초대를 받았다. 며칠 전, 동(同) 기수(期數)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K군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참석해야 할지를 두고 무척 망설였다. 이들보다 한 학년 위인 14회를 전담(全擔)하여 3년간 동고동락(同苦同樂)했으므로, 15회 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직접적으로 사제(師弟)의 연을 맺지는 못했었다. 단지, 모교의 은사(恩師)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청을 받은 것인데, 이는 오늘 행사에 같이 가기로 약속한 이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선생은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團地)에 살고 있어서 목적이 같은 모임에는 자주 동행을 한다. 시내버스를 타고 갈 요량으로, 넉넉히 여유를 두고 만나 행사장과 가까운 운동장 앞에 도착을 하니, 이취임식이 시작하기까지 40 여분이나 남아 있었다. 뷔페를 공유(共有)하는 회의장이어서 일찍 와서 식사부터 해도 무방하다는 언질(言質)을 받고 오기는 했어도, 제자들보다 미리 식사하는 모습이 영 모양새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운동장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행사시간에 맞춰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운동장 옆 야구장의 조명(照明) 타워가 눈에 쑥 들어왔다. '아, 맞다! 주말인 내일부터는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열리지.'


야구라는 아직은 낯선 운동 경기가 호기심 많은 한 어린 영혼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아마도 국민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던 스포츠를 꼽으라면 단연코 고교야구가 가장 우선이었을 것이다. 1970년 대 들어 흑백 TV가 각 가정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운동경기를 실황(實況)으로 중계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중에서도 김일 선수가 주도하는 프로레슬링과 이후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의 프로권투는 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온 식구가 안방에 모여서 손에 땀을 쥐고 시청을 하곤 했다. 고교야구는 신문사가 주최를 하는 네 개의 전국대회가 특히 권위가 있었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명문 고등학교끼리 서로 자웅(雌雄)을 겨루다 보니, 이는 곧 시도별 경쟁을 부추기고 고향을 향한 애향심(愛鄕心)을 유발하여 보는 재미를 더했다.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대통령기, 조선일보의 청룡기,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가 예선을 거쳐 지역대표가 출전하는 전국대회라면, 한국일보의 봉황대기는 재일교포를 포함해서 전국의 고등학교를 모두 망라(網羅)하여 출전자격을 부여(附與)했다. 그 당시 대구의 고교야구는 수년간에 걸쳐 최정상권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대구상고(후일 상원고로 이름을 바꿈)와 경북고가 모든 대회의 우승을 나누어 갖는 도 있었다. 이 같은 연유(緣由)로, 대구의 골목길이나 놀이터는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시멘트 포대, 달리 말해서 돌가루 종이를 겹겹이 접어 야구 글러브로 만들었는데, 딱딱한 고무공을 맨손으로 받아도 별로 손이 아프질 않았다. 빨래 방망이나 나무를 길쑥하게 깎아 만든 몽둥이를 배트로 대용(代用)했으나 이것 또한 그럭저럭 쓸만했다. 중학생들끼리 모여하는 이 야구놀이에 끼일 수 있을 정도로 손이 익숙해져야 동네골목길 어디를 가든 고개를 치켜들고 다닐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놀이 삼아하는 동네야구에 있어선 복잡한 야구 룰이나 용어를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였다. 골목길 야구는, 전봇대를 베이스 삼아 그저 공을 던지고 후려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야구 사랑이 좀 더 구체화되었다. 내가 입학한 대구중학교에는 마침 야구부가 있었는데, 수년 전부터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강호(强豪)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입학 전에는 장효조나 김한근과 같은 고교야구 스타들이 야구부를 거쳐갔고, 2년 선배로는 후일(後日) '한국의 에가와'(고교시절 강속구 투수로 괴물로 불렸으며, 요미우리 자이언트의 에이스로 활약)로 명성(名聲)이 자자했던 송진호, 1년 위의 레전드 포수 이만수, 동기(同期)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와 타자로 각각 활약했던 양일환과 홍승규가 대구중 야구부를 이끌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동네서점에서 산 일간스포츠에는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스타들에 관한 기사들이 날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전설들이 있다. 까까머리 어린 중학생이 처음으로 접한 야신(野神, 야구의 신)들의 누적(累積) 기록과 이들이 남긴 발자취는 놀라움을 넘어 경이(驚異)롭기까지 했다. 우선, 1974년에 714개의 통산 홈런기록이 깨지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홈런왕으로 군림(君臨)했던 베이브 루스와 755개의 홈런으로 그를 성큼 넘어선 행크 아론, 61개의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 소유자인 로저 매리스(약물에 의하지 않은 청정기록으로 2022년 애런 저지가 62 홈런을 기록함), 통산 4189개의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 타이 콥, 마릴린 먼로의 전남편으로 56 경기 연속 안타의 주인공 조 디마지오, 칼 립켄 주니어가 1998년 2632 경기를 연속 출장 하기 전까지 2130 경기를 연속 출장한 철인(鐵人) 루 게릭(후일 루게릭이 앓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루게릭병으로 지칭함), 1941년 0.406의 고타율로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별명을 가진 테드 윌리엄스,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인 재키 로빈슨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인물들의 기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포츠 신문의 면면(面面)을 장식했다.


투수 쪽으로 눈을 돌리면, 메이저 리그 통산 최다인 511 승의 주인공인 사이 영(그해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영 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임), 통산 417 승에 110 완봉승과 12회의 탈삼진왕을 기록한 월터 존슨, 1968년 밥 깁슨이 시즌 13 완봉승을 기록하기 전까지 11 승의 시즌 최다 완봉승을 기록하며 통산 12년의 짧은 선수 생활 중에도 40 완봉승과 137 완투승을 기록한 철완(鐵腕) 샌디 쿠팩스의 투구(投球) 기록 또한 놀라웠다. 게다가, 1920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베이브 루스(밤비노)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후 200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기까지 86년에 걸쳐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이어져 온 '밤비노의 저주'와, 1945 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 염소와 함께 야구를 관람하려던 팬의 입장을 막자, 이에 화가 난 팬이 '앞으로 시카고 컵스는 영원히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 '염소의 저주'(실제로 1908년 마지막 우승 이후 108년 만인 2016년에야 다시 우승함으로써 비로소 저주에서 벗어남) 등에 얽힌 일화(逸話)를 수업시간 중, 선생님 눈을 피해 훔쳐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였다.


일본 프로야구와 관련된 기사도 메이저 리그 못지않게 자주 실려서 야구에 관한 흥미를 돋우었다. 특히, 장훈과 백인천에 관한 기사라면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챙겨 읽었는데 그 당시 장훈은 전성기를 막 넘어서고 있었고 백인천은 선수로서 전성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장훈은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반골(反骨) 기질이 다분(多分)했고, 화상(火傷)으로 인한 오른손 장애(障碍)를 극복하고 선수시절 구단 측의 끈질긴 귀화 요청에도 국적(國籍)을 버리지 않은 채 여러 불멸(不滅)의 기록을 쌓았다. 그의 주요 기록으로는 3085개의 통산 최다안타(역대 1위), 1986년 랜디 바스가 0.389를 기록할 때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단일시즌 최고 타율(0.383), 수위 타자 7회, 시즌 타율 3할 이상 16회 등이 있다. 원래 포지션이 포수였던 백인천은 경동고 졸업 이후 우여곡절 끝에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하여 1975년 0.319의 타율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낸다. 1981년 긴데스 버팔로즈에서의 선수생활을 끝으로, 그 이듬해인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出帆)하자 선수 겸 감독으로 MBC 청룡에 입단을 하여 그해 단일 시즌 역대 최고타율인 0.412를 기록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KBO 유일의 4할 타율로 남아 있다.

신문 지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일본프로야구 인사(人士)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로는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 가네다 마사이치가 있다. 왕정치는 대만 국적으로, 한국인인 장훈과 1959년 입단 동기생으로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외다리 타법'으로도 유명한 왕정치는 행크 아론의 통산 홈런기록(755개)을 넘어 868개의 세계 최다홈런 기록하였으며, 최다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등 홈런과 관련된 불멸의 기록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미스터 자이언트'란 닉네임으로도 유명한 나가시마 시게오는 3번을 치던 왕정치와 함께 'ON포'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중심 타선을 이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진정한 4번 타자였다. 두 사람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V9(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우승한 것을 일컬음)을 이루는데 주축(主軸) 타자였으며, 특히 나가시마 시게오는 은퇴 후 두 차례나 요미우리 자이언트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다섯 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두 차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 선수로서는 시즌 최다 안타 10회와 여섯 차례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가네다 마사이치는 재일 한국인 2세(한국명 김경홍)로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400 승)과 최다 탈삼진(4490개), 최다 완투(365회)의 놀라운 기록을 가진 좌투의 철완이었다. 특히, 나가시마 시게오가 데뷔하던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시합 전 자신이 호언장담(豪言壯談)한 대로 4 타석 4 연속 삼진으로 그를 셧아웃 시킨 일화는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가 한국 야구선수권 대회(2015년부터 KBO 리그라는 브랜드로 재출범)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리그 원년(元年)에는 OB 베어스와 MBC 청룡, 해태 타이거스,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롯데 자이언츠의 여섯 팀이 참가를 했고, 역사적인 개막 경기는 3월 27일 동대문 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 두 팀 간에 치러졌다. 지역을 연고(緣故)로 하는 고등학교 선수를 주축으로 선수단이 구성되었기에, 대구가 프랜차이즈인 삼성 라이온즈에는 내가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영무 감독 지휘 아래, 임신근과 우용득이 코치였으며 당대 최고 투수이던 황규봉과 최고의 좌완 이선희, 권영호, 성낙수, 송진호, 박영진으로 투수진을 구성했고, 포수는 이만수와 손상득, 손상대였다. 내야수로는 김한근, 배대웅, 함학수, 서정환, 오대석, 박정환, 천보성이 있었고, 외야에는 정현발, 정구왕, 박찬, 허규옥, 김휘욱, 장태수가 포진(布陣)을 했다. 이들은 누구 하나 없이 국가대표 주전감이었고 그래서 원년 우승은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MBC 청룡과의 개막전이 불운을 알리는 전조(前兆)였을까, 원년 한국 시리즈 우승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눈에 선한 개막전의 전후 사정은 이랬다. 프로야구 첫 안타와 타점을 이만수의 2루타로 시작한 삼성은 이만수의 첫 홈런까지 이어지면서 6회 초까지 7대 3으로 앞서 갔다. 6회 말에 백인천의 솔로 홈런으로 3점 차까지 따라붙은 MBC는 7회 말 투아웃에 유승안이 쓰리런 홈런을 터트려 기어코 동점을 만들었다. 그 상태로 10회 연장전에 돌입한 두 팀의 승패는 10회 말 2사 이후에야 판가름이 나, 마지막 타자로 등장한 이종도에게 마지막 투수 이선희가 하필이면 그것도 만루홈런으로 두들겨 맞아 프로야구 첫 끝내기 홈런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워낙 승부가 극적으로 갈려서인지, 흥분한 목소리로 승패를 가늠하던 중계진의 날 선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전기 우승팀 OB 베어스와 후기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 두 팀 간에 치러진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도 개막전만큼 극적이었다. 3승 1무 1패로 벼랑 끝에 몰린 삼성은 허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6차전 선발을 자원(自願)한 OB의 박철순을 상대로 득점을 하며 8회 말까지 3대 3 박빙(薄氷)의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운명처럼 맞이한 9회 초, 이선희는 투아웃 풀베이스 이후 볼넷으로 1점을 내주며 역전을 허용한 뒤, 다음 타자 김유동으로부터 초구에 만루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 원년 프로야구 개막전에 이어 한국 시리즈 마지막 6차전 승부에서도 만루홈런을 두들겨 맞음으로써, 이선희가 불운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낙인(烙印) 찍히던 순간이었다.


야구는 원래 남자들이 즐기던 대표적인 남성 스포츠로, 경기를 보는 중에 술을 마시면서 야유를 보내거나 욕설로 선수들의 실책을 질책(叱責)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다가, 여성 관중들이 늘어나면서 타석에 선 선수를 응원하는 응원가와 함께 치어리더를 내세운 응원문화가 홈팀을 중심으로 보편화되었다. 가족단위의 관중들도 많아져서, 야구룰에 해박(該博)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경기 중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홈, 원정팀 가리지 않고 열성적으로 응원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기아 타이거즈 투수가 상대 타자를 삼진 아웃시키면 치어리더들이 일어나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몸을 흔들면서 삐긋삐긋 몸을 흔들어가며 추는 '삐끼삐끼춤'은 K-응원을 대표하는 밈(meme,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인터넷 이미지나 영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프로야구도 해가 갈수록 기록이 누적되면서 의미 있는 기록들이 속속 쌓이고 있다. 내가 야구를 처음 알아가면서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미일 프로야구 불멸의 기록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선수들과 이들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들로 하나하나 대치(代置)되고 있다. 놀란 라이언의 최다 탈삼진(5714 개), 스즈키 이치로의 미일 통산 최다안타(4367개)와 단일시즌 최다안타(262개, 2004년), 오타니 쇼헤이의 15승 34 홈런(2022년)과 10승 44 홈런(2023년), 54 홈런 59 도루(2024년),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애런 저지의 단일시즌 최다 홈런(62개, 2022년)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KIA 김도영의 최연소 30-40(38 홈런 40 도루, 2024년)을 비롯해서 앞으로 쌓이게 될 새로운 기록들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전년도에는 총 누적 관중수가 천만(1088만 7705명)을 훌쩍 넘긴 보기 드문 흥행기록을 수립했다. 그리고 올해는 시범경기부터 예매율이 경기장마다 매진에 가깝다 하니, 바야흐로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地平)이 활짝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한 가지 바람직한 현상이 있다. 그동안 지역주의에 매몰(埋沒)되어 있던 프로야구 팬층의 경계에 조금씩 균열(龜裂)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주변만 둘러보아도 오랜 세월 동안 줄곧 삼성팬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심심치 않게 한화 이글즈나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즈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이를 보고 있자면,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지역갈등에만 편승(便乘)하려는 볼성사나운 정치권의 행태(行態)에 회초리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다. TV 화면 속에서, 상대팀 유니폼을 나누어 입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연인이나 부부, 형제나 자매의 모습을 웃음으로 지켜보는 일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왜, 이런 순박(淳朴)하고 선량(善良)한 사람들을 동서(東西)나 네 편 내 편으로 편가름 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인가!


사정이 허락된다면, 대구 홈경기를 포함해서 올해는 삼성 라이온즈의 포항 홈-로컬 경기까지 꼭 관람하려고 한다. 관람석 현장에서 내가 응원하는 빼뱀이 이재현과 주장 구자욱, 신예 로컬 보이 배찬승을 목청껏 응원해 주고 싶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바라다본 야구장 조명 타워는 금방이라도 불이 켜질 듯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말갛게 도드라져 있었다.


포항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홈-로컬 경기(2023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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