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거실로 나가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전날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비가 내릴 기미(幾微)는 없었지만, 연휴 내내 궂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 예보되어 있었다. 먹빛이 짙은 하늘은 여차하면 비를 뿌릴 듯 기세등등(氣勢騰騰)했다. 그래서인지, 비를 피해 운동부터 먼저 해 두려는 사람들로 일찌감치 공원 산책로가 붐볐다.
때 이른 점심으로는 가까운 동네시장에서 가자미조림을 먹었다. 달포 전에도 찾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는 이내 발길을 돌리고 만 노포(老舖)였다. 국숫집으로 간판이 걸려 있었으나, 간단히 먹을 수 있도록 끓여낸 찌개나 생선조림 같은 가정식으로 더 입소문이 나 있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가자미조림을 먹고 있는 여자 손님 둘 말고는 식당 안 대여섯 테이블 모두 빈자리였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낌새가 신경 쓰였던지, 주방에서 반찬을 내오면서 주인 할매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에휴! 연휴가 시작되이 까네 모두 다 놀러 가뿌맀는 갑따! 시장 안이라케도 사람 구경 몬 하겠네."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은 단골인 듯싶었다. "너거 엄마는 몸이 이제 좀 괘안아졌나?" 주인 할매가 바짝 다가앉으며 나지막이 말을 건넨 사람은 볼살이 통통한 여인이었다.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밥을 도무지 안 먹을라 카네예. 자꾸 병원 밖으로 내보내 달라 카고." "와 그라는데?" "울 어무이가 여태 중국사람입니더. 첨부터 국적을 안 바꿨는 기라예. 그래서, 병원비가 많이 나온다꼬 저 카고 안 있능교." 말을 하는 그녀의 한숨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서로 밥값을 내겠다고 실랑이하던 여인들이 식사배달 갔던 알바 아지매가 돌아오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이 식당 밖을 나간 지 한참 후까지 주인 할매와 알바 아지매 사이에서는 뒷말이 이어졌다. "쟈는 정말 효녀라카이! 언니, 오빠 다 있어도 지가 엄마 안 모시고 사나. 병원비도 지 혼자 다 대고." "언니야, 쟈 신랑은 있나?" "아이다. 이 근처 어디에서 마사지한다 카던데, 어떨 땐 식당 올 때 한 번씩 남자가 바뀌더라꼬!" "옴마야! 그랬나? 하지만, 우짜겠노! 다 묵고 살자 하믄."
식당 밖으로 나서는데, 조금 전까지 맛나게 먹었던 음식맛과는 달리 속이 그다지 개운하질 않았다. 후일, 단골이 되었을 때 내가 떠난 뒤에도 나의 뒷담화가 이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더군다나 이곳은 집 가까운 동네식당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 없이 나누는 대화라 하더라도 제삼자인 타인의 이야기를 이처럼 함부로 대놓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이 식당이 동네 젊은이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그저 그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면서, 못다 먹고 남기고 온 가자미의 물 비린내가 코끝에서 한참 동안 비렸다.
이른 아침부터 한바탕 비를 쏟아부을 듯 간당간당하던 먹구름은 오후 들어 완연히 묽어지면서 검푸른 하늘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고 있다. 당장은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아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고는 곧장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량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아파트 주변 사거리는 모처럼만에 진경(珍景)을 연출하고 있었다. 해마다 벚꽃 필 무렵이면 봄꽃 만발한 환호공원으로 스페이스워크를 체험하러 오는 외지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하지만, 아직은 매서운 추위가 기승(氣勝)을 부리며 오는 봄을 사뭇 시샘하고 있는 시절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스페이스워크로 올라가는 막바지 등산로는 서로 교행(交行)이 불편할 만큼 사람들이 붐비고 있어, 오늘은 정말이지 공원 어디로 가든 오랜만에 맞은 만원사례(滿員謝禮)의 날이었다.
스페이스워크로 바로 오르지 못하고, 당장 그 아래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의 줄만 해도 언덕 저편까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스페이스워크 체험조차 마다하고 이를 배경으로 그저 사진만 찍는 사람들로도 포토존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유명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런 진귀한 장면을 집 가까운 곳에서 실상(實狀)으로 보고 있으려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한편으론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선(螺線)의 궤도(軌道)를 따라 계단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스페이스워크가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곤 했지만, 그 누구의 비명이었든 두려움이 즐거움을 넘어설 때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처럼 스페이스워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날이면, 공원 광장 언덕 위 포항시립미술관도 덩달아 사람들로 붐빈다. 미술관 건물의 전면에는 프랑스의 여성작가 오를랑(ORLAN)과 지역의 원로화가 박수철 화백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음을 알리는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어서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고 있었다.
미술관 입구의 제1전시실은 1층과 2층이 오픈되어 있어서 복층(復層)으로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 순회전인 《오를랑 하이브리드:아디스틱 인텔리전스》를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도슨트(Docent,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 작품을 설명해 주는 사람)의 말을 빌자면, 오를랑은 유전적으로 자연이 준 신체에 저항하고 이를 변형하여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신체예술의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아홉 번에 걸친 대표적인 <성형수술 퍼포먼스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전시회는 전시된 작품을 통해서, 신체를 기술로 새로이 매개(媒介)하여 오늘날의 융복합(融複合) 기술이 예술의 새로운 표현매체이자 서로 공생(共生)하는 영역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나의 몸을 예술에 바쳤다(I have given my body to art)'라던 그녀의 처절한 외침은 자신의 신체를 플랫폼으로 해서 실험적이면서도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통해 공생이라는 화합의 메시지를 격자(格子) 무늬처럼 촘촘하게 발화(發話)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전시에서 주목할 작품들은 《멸종위기 동물들과 재생 물품 및 재료들로 만든 신종 로봇들》 시리즈인데, 제작과정에서 처음으로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자신을 로봇으로 디지털화한 이미지를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와 융합함으로써 이전 기술이 파괴한 삶의 터전을 재건(再建)하고 있다. 물론, 작품 속의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이 중심이지 않으면서 파괴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 함께 전시되고 있는 《베이징 오페라 가면》 시리즈 역시 자신의 얼굴을 디지터로 이미지화하여, 미대륙 발견 이전의 원주민과 아프리카인의 두상(頭相)을 합성하여 혼성화한 작품들이다. 원래 '베이징 오페라'란 북경에서 행해지는 연극인 경극(京劇)을 일컬음인데, 일반적으로 여성에게는 극 중에서 본연의 여성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여성으로 디지털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가면이란 이면(裏面) 아래 거리를 두고 성차별에 항거(抗拒)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철, 오래된 꿈》은 지역의 원로화가인 박수철의 예술세계를 조명(照明)하고 있다. 일찍이, 그는 한국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오지호 화백(畵伯)의 영향을 받아 당시 일면식(一面識)도 없던 오 화백을 광주로 찾아가 기꺼이 문하(門下)가 될 것을 자처하고 직접 작품 지도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후로, 그는 사실 묘사보다는 내적 감성을 중시하여 대상의 본질과 교감(交感)하면서, 작품 속의 색채와 형태에 내면의 의식을 투영(投影)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자신이 줄곧 살았던 포항의 풍경과 손에 익숙한 사물을 즐겨 그려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지역민들에게 고향 사랑을 일깨우고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들을 소환(召喚)해 준다. 아울러 십자가를 그린 연작(連作)을 통해, 예술과 신앙이 하나가 된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겸허(謙虛)하게 간증(干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종일 날씨가 불순(不純)한 가운데 잠시 들린 스페이스워크와 포항시립미술관은 오랜만에 두 곳 다 만원이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지난날에 비해 물질적으로 비할 바 없이 풍요롭기는 하나, 정신적으로는 늘 공허(空虛)하고 허점투성이로 여러모로 메워야 할 것이 많다. 오늘 환호공원을 찾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 표정엔 행복이 만원이었다.
조금 전, 공원을 들리기에 앞서 아파트로 차를 주차하러 갔다가 지하주차장에서 만났던 부녀(父女)가 생각이 난다. 캠퍼스 후드점퍼를 입은 앳된 여자아이와 얼굴이 빼다 박은 듯 닮은 아버지였는데, 옷가지를 넣어 불룩한 천가방과 생필품이 잔뜩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 차림새로 미루어 갓 입학한 신입생인 듯 보이는데, 분명 신학기를 맞아서 기숙사나 원룸으로 가져갈 이삿짐을 옮기던 중이었을 것이다.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이어지다 뭐가 탐탁지 않았던지 여자아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넓은 지하주차장을 울렸다. 집에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듯 잠시 실랑이를 벌이더니 이내 서로 웃는 얼굴이 되어 함께 차에 올랐다. 잠시 스쳐가는 길에 엿보았을 뿐이지만 이들의 얼굴은 행복으로 온통 만원이었다. 이들이 막 빠져나간 빈자리에다 주차를 서두르고 있는 운전자의 얼굴 역시 행복한 미소가 만면(滿面)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