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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14. 2022

아, 김정호!

하얀 나비

올해 2월에 정년을 한 동료 교사가 있다. 오랜 친구사이이기도 한데, 나보다 한 해 먼저 학교에 부임을 해서, 나보다 한 해 늦게 교직을 마무리했다. 그 친구에게 물었다.


"요즘 뭐 하며 지내노?"


여러 말들이 오갔으나, 우리 나이에 백수가 된 사람들 하는 일이라 해 봐야 어차피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건강관리를 위해 등산이나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집 가까운 헬스장에 나가 망가진 몸을 가꾸기도 한다. 골프나 당구, 탁구와 같이 형편에 따라 아내 몰래 감춰둔 주머니 속 짓돈을 쓰며 재미를 하는 운동으로 소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운동 말고도 가끔씩 기타를 친단다. 기타 교습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유튜브를 통해서 독학을 한다는데 할만하다고 했다. 이건 바로 며칠 전 들었던 말이다.


오늘 아침, 잠시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눈앞을 날고 있는 하얀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생각 없이 그 뒤를 쫓다가 나도 모르게 흥얼대고 있던 노래를, 지 않고 계속 다 보니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던 며칠 전 기타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읽었던 글인데, 통기타를 시작하는 사람 가운데 김정호가 작곡한 노래의 코드를 한 번이라도 안 짚어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 꾹꾹 눌러 놓았던 김정호 노래가 봇물 터지듯 되살아 나는데 여전히 귓전을 생생하게 울리는 그의 음색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우리 연배의 사람들은 대중가요의 스펙트럼이 대체로 넓은 편이다. 물론,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음악을 들어온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저 듣는 노래와 정말 좋아하는 노래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는, 딱히 범위가 넓다고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들어 귀에 익은 노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처럼 왜색조가 짙은, 소위 말하는 뽕짝이었다. 배호가 부른 대부분의 노래가 그렇고, 초창기 남진이 부른 '가슴 아프게' 그랬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우리 나이보다 연배인 송창식이나 윤형주, 김세환 류의 통기타 가수들이 부른 노래가 마음을 사로잡았고, 김민기와 양희은이 번갈아 부른 '아침이슬'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노래로 인식되어 반정부 데모가 는 곳이면 어디 하나의 구호처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었다. 여기에, 미 8군과 유흥업소에서만 주로 연주하던 밴드들이 방송을 통해 데뷔하면서 보다 대중화된 그룹사운드로 거듭났는데, 이전 세대인 신중현 밴드나 키보이스, 영사운드나 사랑과 평화를 필두로 조용필이나 윤수일, 최헌, 조경수와 같은 리더가 이끌던 밴드들이 선두주자들이었다.


우리 고유의 멜로디를 첨삭해가며 보다 발전된 노래로 진화하고 있던 트로트는, 대중가요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왜색을 완전히 걷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한국 가요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된다. 게다가, 포크송에서 시작된 통기타 열풍은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로 그 맥이 이어지고, 이후 음악적 다양성과 실험이 가미된 갖가지 장르 음악이 속속 등장하게 됨으로써 대중가요가 이전보다 더욱 풍성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의 노래를 묶어서 통칭 7080 가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우리 나이 또래가 즐겨 불렀거나 들었던 노래의 스펙트럼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난 송창식과 김정호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윤형주와 함께 부른 트윈폴리오 시절감미롭 화음 실은 노래도 좋긴 하지만, 송창식이 싱어송라이터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맨 처음 고백'이나 '왜 불러', '고래사냥' 같은 노래는 당시 20대 초반의 내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송창식의 노래가 가수 고유의 탁음 섞인 유려한 음색을 바탕으로 마치 흥얼대듯 읊조리는 발성으로 노래한다면, 같은 통기타 가수지만 김정호의 노래를 처음들을 때 느끼는 감정은 송창식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을 것 같다. 경쾌한 멜로디의 팝송을 번안해서 부른 적도 있는 송창식과는 달리, 판소리의 5 음계만을 고집한 작곡으로, 폐부를 찌를 듯이 애끓는 창법으로 부른 그의 노래 속에는 한국적 정서인 한(恨)과 함께 고독함과 쓸쓸함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것이다.


내가 김정호의 노래에 흠뻑 빠져든 것은, 어느 유명 음악 PD가 '이름 모를 소녀'를 듣고 모차르트 같은 천재 작곡가가 한국에도 태어났다고 탄복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도무지 이 세상 노래가 아닌 것 같은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중반 중학교 다닐 적 일인데, 통기타에 한참 빠져있던 사촌 형이 직접 기타를 치며, 어니언스의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과 같은 노래를 부를 때만 해, 이들 노래를 작곡한 당사자가 바로 김정호였음을 알지 못했것이다.


'이름 모를 소녀'당시 사춘기에 접어들던 나의 감성을 깊숙이 건드렸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솟구치는 울음을 애써 삼켰야 했으며, 이후 '미지의 소녀에게'로 시작하는 대필(代筆) 연애편지를 쓰도록 만든 단초(端初)가 되었다. 가사 내용을 시종 관통(貫通)하고 있는 쓸쓸함, 기다림, 떠나감과 같은 말들은 이름 모를 한 소녀가 느낄 감정에 절절함을 더해 주기도 하지만, '김정호' 하면 떠오르는 우수에 젖은 그의 이미지를 대변(代辯) 해 주는 말들이기도 하다.


'날이 갈수록'은, 김정호가 부른 대부분의 노래들이 자작곡인데 반해서 이 노래만큼은 김상배란 무명 대학생이 작곡해서 대학가에서부터 먼저 려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주제곡으로 송창식이 부른 적도 있지만, 방송가에서 히트곡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김정호가 리메이크해서 부르고 난 이후의 일인데, 내가 좋아하는 두 가수가 이 하나의 노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은 영화 속 분위기에 젖어 부담 없이 들리는데 비해, 김정호의 노래에는 쓸쓸함이 더해져 가수 스스로 눈을 감은 채  부르다 눈물까지 흘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호는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가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의 노래 가운데는 '작은 새'나 '저 별과 달을', '외기러기'나 '하얀 나비'와 같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도 여럿 있는데, 제목이나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치 자신의 앞날을 미리 예견하고 글을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인 것 같아 그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서 애달픈 마음이 그지없다.


지금 글을 마무리하는 자판기 위로, 한 잎 두 잎 꽃잎은 시들고 내 마음은 덩달아 슬퍼진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울부짖듯 노래했듯이, 때가 되면 꽃은 다시 피고, 길 잃은 나그네는, 님 찾는 저 하얀 나비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라.


아, 김정호!


그대의 노래 속에서는 언제든 꽃이 피고, 나비 마리 또 나그네 되어 님 찾아 훨훨 날아오를 테니.


《김정호가 부른 노래 '하얀 나비'를 링크해 둡니다.  


https://youtu.be/rEkzUi7_z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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