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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19. 2022

젊음이 지나간 자리

안분지족(安分知足)

오늘 고민 끝에 4차 접종을 했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병원에 들러, 이번 달 혈압약을 처방받는 일까지 한꺼번에 하기로 한 것이다. 며칠 전 온 안내 메시지에 따르면, 전과 달리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만 접종을 한다고 하니 혹시라도 사람들이 붐빌까 싶어 가던 걸음을 서둘렀다.


원 앞에서 옷매무새를 한번 더 추슬렀는데, 접수 간호사와 의무 간호사 누구에게든 친절하기도 하지만 늘 먼저 알아보고 살갑게 나를 맞아주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바로 전까지 다니던 준 종합병원의 주치의가 대구로 전원 하면서 동네의원을 소개해 주었는데, 처음 내원해서 의사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보니 같은 대학 동문이면서 나와 가까이 지내는 고등학교 후배의 친구이기도 했다. 어느 때부턴가 처방전을 받으면서 진료비를 계산하려 하니 원장실을 바로 뛰쳐나와 그러지 말라 손사래를 길래, 테이크 아웃한 커피로 고마운 마음대신한  벌써 몇 달째 난다. 그러고 나, 다음 달 진료 중에 성의를 무시한다 질책하며 정색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길래 처음처럼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접수 간호사의 미소 띤 표정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병원이란 몸이 불편하여 찾는 곳이기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은 긴장되고 말투는 딱딱해진다. 접수를 받는 간호사의 말은 사무적이기 쉬워 상호 간의 소통이 무척 건조해지는데, 이전 병원에서 나와 간호사의 관계가 바로 그러했다. 그런데, 이 동네병원은 방문한 첫날부터 오래도록 보살펴 온 환자를 대하 듯, 처음 본 나를 정성스럽게 맞아 준 것이다.


요즘 들어 내가 조심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먼저 상대방에게 불쑥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소통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상황이 주어졌을 때 보통 처음 말을 먼저 는 쪽은 나부터였다. 첫인사를 나눈  자칫하면 서로 어색한 순간있을 수 있기에, 그런 서먹한 분위기수습하려다 보니,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 하나의 버릇처럼 내게 굳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꼰대스럽지 않으려면 무턱대고 먼저 말을 앞세우는 일만큼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닥, 목례만 하고 나서 혈압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뭔가 말을 건네려다 멈칫하며 측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반가움으로 해맑던 접수 간호사의 표정이 그새 온데간데없다. 평상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일일이 안부부터 물으며, 생년월일에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름까지 먼저 들먹였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사조차 받는 둥 마는 둥 시키지도 않은 일부터 하고 있다니.


측정한 혈압의 수치를 알려주는데, 접종 전의  상태를 되물어 오는 간호사의 말이 왠지 모르게 딱딱했다. 생각보다 높게 측정된 혈압의 수치보다 오히려 그녀의 말투가 더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미리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니 그 끝을 보아야 했다.


"간호사님, 먼저 허락받지 않고 혈압부터 잰 제 행동이 불편했나요?"

"예? 아니오! 그럴 리가요?"


실실 웃어가며 하는 말에 내심을 들킨 듯, 화들짝 놀라며 내지른 말이었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그녀를 보니 더욱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랬네요, 뭘!"

"아니라니까욧!"


마침, 주사실에서 다른 사람의 접종을 마치고 나오던 의무 간호사가 그녀의 앙칼진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릴 쳐다보았다.


장난기 서린 웃음을 거두고, 간호사의 안부새로이 물으면서  마음속 각오의 자초지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혹시라도 병원을 드나들면서 과례(過禮)가 비례(非禮) 적이 없었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치며 그런 적 없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적이 마음이 놓였다. 연신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 추임새를 넣을 때에는  마치 학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감흥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4차 접종의 한 고비가 지나서였는지 예약자들의 내원이 많지 않아,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접종을 하고 나면 사나흘은 샤워를 할 수 없다기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부터 하고 나서 내친김에 마스크 팩까지 했다.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얼굴이 아님을 알지만, 이미 뜯어두고 쓰던 팩인 데다 마침 유통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 아깝다 생각지 않고 쓰던 참이었다. 셀카로 찍어 확인해보니 팩을 한 얼굴 눈가 주름이 만만치 않은 것이 세월은 거스를 수 없는 노도(怒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만에 들리면서, 얼굴을 마스크로 반 이상이나 가렸으니 얼굴에 금칠을 한들 제대로 알아볼 리 없었겠지만, 병원 문을 나설 때는 그래도 간호사들에게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빈말이라도 젊어 보인다 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농담을 편하게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이다.


물이 빠지고 난 갯벌 위로 마치 낙서를 해 놓은 듯 어지럽게 휘갈겨 놓은 선들이 보인다.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뒤, 빗물 빠진 운동장 위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이런 자취들은 지워지지만, 얼굴에 남는 세월의 흔적은 결코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가, 이런 순간적인 몰입에 빠져있는 이유가?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찾아 엘리베이터 앞에 선  순간까지도 이런저런 상념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급히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어 달 전, 통로 맨 꼭대기 층인 23층으로 이사 온 사람들인데, 엄마는 보이지 않고 유모차에 탄 두 살배기 먹이와 아빠 손을 잡고 있는 아들,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도 빤히 바라보는 젖먹이의 시선이 줄곧 내 얼굴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냥 지켜보기 민망해서 아빠가 아이에게 한다는 말이 오히려 내 가슴을 둔중하게 내리친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해야지! 할아버지, 해 봐."


'이건 무슨 말이람! 할아버지라니, 대체 누굴 보고 할아버지라는 거야!' 그런데,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아이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 것이라기보다는 애들 아빠의 진심이 어느 정도 섞인 목소리인 것이다. 물론, 우리 둘만 있을 때를 가정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비록 우리 큰 애보다 애들 아빠가 네댓 살 밖에 많지 않아 보인다 해서 대뜸 나를 아버지나 삼촌 뻘로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큰 형 정도로 생각을 했다면,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부르도록 했어야지. 더군다나,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이나 이렇게 가리고 있는데.


'아! 그랬었구나. 조금 전 간호사가 본 눈이 틀리지 않는 거구나. 언감생심(焉敢生心), 마스크 팩으로 잔주름을 가릴 수 있으리란 것은 그저 나만의 생각이었어. 젊음이 지나간 자리는 그냥 그대로 내게 남는 거야. 이건 갯지렁이 따위로 만들어진 흔적이 아니야. 세월이란 바로 그런 거지. 이유가 없는 거야.'


얼마 전 여름에 입을 옷을 정리하다 보니 옷장에 남은 옷으로는, 하의는 몇 장의 면바지와 청바지, 반바지뿐이고, 상의는 후드나 라운드 티, 바람막이 정도였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입었던 셔츠나 칼라 티, 바지와 정장 상하의는 산 지 오래되 유행이 지나 버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지만, 최근 구입해서 즐겨 입는 옷이 나이에 걸맞 않은 젊은이 취향이 때문이었다. 그랬었구나. 이것들 역시 내겐 마스크 팩과 같은 존재들이었구나.


안분지족(安分知足). 한동안 잊고 살았던 말이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남아있는 흔적이라 해서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젖먹이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러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옷을 입게되든 체형이나 시절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멋도 자연스럽게 배어날 것이다. 눈을 찡긋해 보이자, 아이가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다. 형이 따라서 웃고, 아빠의 웃음이 이어지자 덩달아 나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스크 팩한 얼굴입니다. 이 얼굴에도 햇살 깃들 날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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