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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18. 2022

서로 사랑을 했고

네 잎 클로버

바람이 분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 온 바람이 책상 위에 쌓아  실험보고서의 책갈피 사이를 파고들자, 쉿 쉿 휘파람 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애써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네댓 장의 종이를 겹쳐 입술 사이에다 끼고 풀피리 불 듯 바람을 불어넣으면 바로 이런 소리가 났었지. 눈길이 보고서의 표지 위에 머물자,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박민우.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이 박민우였어.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당 수돗가에 등을 지고 퍼질러 앉아 양은 냄비에다 쌀을 열심히 씻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가까이 문간방이 비어 있었는데, 재래식 화장실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인지 자취생의 들락거림이 잦은 방이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앉은 채로 몸을 돌려 앉는데, 상의 윗 단추가 두어 개 풀린 대학생 교련복의 왼쪽 명찰에 새겨진 이름이 '박우'였다.


문간방에는 따로 부엌이 딸려 있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기역 자로 꺾인 본 채의 볕이 잘 드는 안방은 주인집 노부부가 살고 있었고, 동향의 방 두 개와 남향의 곁방은 여학생들에게만 자취방놓고 있었다. 동향 방에는 부엌이 각각 딸려 있었고, 남향 방만 주인집과 부엌을 나눠 쓰고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쌀을 씻는 남자의 목덜미가 구릿빛으로 검게 탄 것으로 미루어 촌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현실과는 달리, '내가 살고 있는 문간방' 마루 턱을 등지고 앉은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본  목덜미가 무척 낯익어 보였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친구들과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는 우리들 3학년 생들이 즐겨 모이는 곳임을 알기라도 하는지, 후배들은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며칠 새 비가 내린 후로, 벤치 옆 화단 향나무 아래로는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무심코 바라보니, 군락을 이룬 풀잎 사이로 네 잎 클로버가 살포시 숨어 있는 게 보였다. 행운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기에, 뒤늦게 교실로 돌아가면서 미리 점찍어 둔 네 잎 클로버를 몰래 따서 책갈피 속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6월 말이 되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거의 날마다 등나무 벤치 옆을 서성댔는데, 어떤 날은 다섯 잎이나 여섯 잎의 클로버를 따는 도 있었다. 말하자면, 네 잎 클로버는 토끼풀이 변이 된 것으로, 변이 종은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토끼풀 사이로 숨어 있는 네 잎 클로버를 찾는 일이 익숙해지자 여러 장을 한꺼번에 따는 날도 많았는데, 며칠 지나면 다른 토끼풀이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서 그 사이사이비집고 올라와 있었다. 처음 네 잎 클로버를 끼워 둔 참고서는 이제 거의 넘기는 갈피마다 네 잎 클로버들채워져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찾은 것은 문간방에서 자취를 한 지 한 달도 더 지난 5월 초순경이었다. 아궁이에 연탄을 더 이상 때지 않아도 될 만큼 날이 따뜻해져 부엌에서는 곤로를 사용해서 밥을 하거나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연탄을 빌리러 온 것이다. 사실, 대학생인 그가 자신보다 나이 어린것이 분명한 내게 한 번이라도 먼저 쉽게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런 쪽으로 숙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마주 그의 얼굴은 짙은 홍조와 함께 며칠 전까지 본 적 없는 굵은 여드름이 잔뜩 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책갈피 사이에 끼워 둔 네 잎 클로버의 주인이 정해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는 몰라도, 사람들 눈을 피해 곱게 접은 편지지 속에다 네 잎 클로버를 끼워 문간방 부엌에다 연탄과 함께 갖다 놓시작했다. 피우다 남은 연탄은 여전히 부엌에 많이 재어져 있었고, 그는 그 연탄을 여전히 필요로 했는데 모아 둔 네 잎 클로버 역시 책갈피 속에서 제 주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자취집 마당을 오가며 서로 마주치는 날이면 그는 간단한 목례와 함께 슬쩍 사람 좋은 웃음을 내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짓던 부엌문 앞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조그만 선물상자를 든 그가 서 있었다. 남이 볼세라 얼른 한쪽으로 비켜서자 열린 문으로 다짜고짜 몸을 들이밀고서 하는 말이, 더 이상 연탄이 필요 없다고 했다. 날이 무더워지면서 아궁이에 연탄을 땔 필요가 없었지만 곤로 살 돈이 수중에 없었던 그는 고향을 다녀올 때까지 빌려서라도 연탄불로 밥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얼굴에 난 여드름도 사실은 밤새 땐 아궁이 불로 땀범벅이 되어 생긴 땀 때기였다고 했다. 이를 진지한 표정으로 변명 늘어놓듯 말할 때에는 돌아서 소리 죽여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곤로를 사고 난 후로 연탄은 그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네 잎 클로버를 사이에 끼운 편지지는 거의 날마다 그에게로 전해졌다. 반찬을 넉넉히 하여 함께 전해질 때도 있었고, 그가 슬쩍 열어두고 나간 방문 틈으로 편지만 던져놓기도 했다. 다만, 7월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네 잎 클로버보다는 편지지에 채워 넣기 시작한 내 속 마음이 더 간절해져 있었고, 어느덧 우리는 밖에서도 남몰래 만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찬바람이 불면서 예비고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나는 학교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그가 다니고 있는 의과대학에 진학을 해야 할 절박함이 있었기에 학업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그가 자취방을 옮긴 것인데 중요한 시험을 목전에 둔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모든 시험이 끝이 났다. 예비고사에 이은 졸업시험까지 마치고 나자 이제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교복을 입은 채 어색한 모습으로 동네 빵집을 드나들 때나, 모처럼 그의 손에 이끌려 신성일 주연의 '별들의 고향'을 마음 졸여 볼 때도 난 어쩔 수없이 주눅 든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는 전혀 거리낄 게 없는 대학생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난 그때까지 그를 오빠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비록 그가 한 번씩 내게 말을 놓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나를 함부로 대할까 봐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 후 처음 만난 그는 뜻밖에도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는 것이었다. 평소 그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혼란스러웠으나, 그가 말없이 차가워진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주머니 속에서 감싸 쥘 때는 나도 모르게 내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난 그와 처음으로 주점이란 곳에 들러 맥주를 마셨고, 그가 바래다준 하숙집 앞 어두운 골목길에서 첫 키스로 그와의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난 그의 자취방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여전히 참고서 속에 네 잎 클로버가 남아 있기도 했지만, 그와 만나서 데이트하는 것과는 별개, 행운이 내게 가져다준 이 사람을 너무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첫사랑 이기도 했지만, 그가 다니고 있는 의대로 진학해서 그와 함께 할 미래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에 벅찬 일이었으므로, 이 책갈피 속 행운이 다 할 때까지는 온전히 그를 향해 내 마음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본고사를 치를 때까지는 겨울 내내 자취를 해야 했으므로, 자취방과 학원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 반복되었다. 이런 나를 생각해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방학이 되자 공부할 책을 싸들고는 별다른 말도 남기지 않고 시골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물론, 공부에 전념하라는 그의 배려였겠지만 그가 곁에 없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 이전까지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편지를 써서는 네 잎 클로버와 함께 그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자취방으로 매번 던져놓고 돌아오했었다.


본고사를 하루 앞둔 어느 날, 그는 곱게 접은 종이 네 잎 클로버와 포장한 엿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행복했다. 미리 부모님이 다녀가시기는 했지만, 도시 근교에 살면통학하기에는 그저 거리였기에, 부득불 자취를 해야만 하는 딸아이가 안쓰러워 점심을 한 끼 사 준 것만으로도 딸에 대한 응원으로 충분하다고 두 분은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만 그의 앞에서 또 눈물을 보이고 말았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기에 내심으론 자신만만했다. 합격을 해야만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꿈은 이제 현실로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전신 주 불빛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해진 뒷모습이 오히려 지금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하긴, 그의 뒷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눈여겨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기도 했다. 2월의 밤은 까맣게 모든 것을 지우며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날, 시험을 치르는 아침에 시험장 주위를 살폈으나 그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오시리라고는 생각조차 않았던 부모님이 이른 아침부터 응원차 교문 앞으로 찾아오셨는데, 혹시 부모님과의 어색한 첫 만남이 이뤄질까 봐 두려워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상상이 고도 남을 일이었기에, 어디선가 몰래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겠거니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험은 기대했던 만큼은 잘 보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저녁에 집에서 보기로 했었기에, 이제 그와 만날 일 만을 생각하며 시험장 주변을 기웃거렸다.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교정이지만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길이 서로 어긋날 수도 있기에 30분을 더 기다려보았지만 결국 오질 않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누굴 위해서 이렇게 참아가며 공부했는데.


흐르는 눈물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지만, 한편으론, 그의 자취방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마음도 커지고 있었다. 오지 않을 사람이 아닌 것이다. 움켜 쥔 주머니 속 종이 네 잎 클로버가 제멋대로 구겨진 것을 모를 정도로 손에서 땀이 다. 이제 골목길 하나면 그의 자취방인데, 그에게 속 마음이 들킬까 봐 소매로 뺨에 흐른 눈물 자국을 마저 지우고 나서 골목길을 돌았다.


아! 그런데 저게 뭐지? 생각이 멈추는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의 방문은 붉은 테이프를 대각선으로 붙여 사람들의 출입을 있었고, 마당 넓은 집 안에는 도통 사람들마저 아예 없는 듯했다. 그의 낯익은 신발 만이 여전히 방문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 사람이 방 주인임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는아래쪽 방문 하나가 열리면서 낯선 노인이 몸을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처자, 연락받고 온 거여?"


이건 또 도대체 무슨 말인가? 다시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물으려 할 때, 이어서 들리는 노인의 말소리는 전혀 딴 세상에서 려오는 듯했다.


"쯧쯧. 젊은 사람이 의대를 다닐 만큼 똑똑하던데, 몇 달씩 비워놓은 방에다 왜 쓸데없이 연탄불 피워 놓고 잠을 노? 나이가 아깝다, 나이가 아까워!"


혀를 차며 이어지는 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풀려버린 다리 힘이 버티질 못하고 그만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메마른 나의 울음소리만 빈 마당을 울리고 있을 뿐, 매서운 겨울바람이 사납게 방문을 흔들어대자 제풀에 힘이 빠진 테이프가 펄럭펄럭 덩달아 마른기침 소리를 내었다.


박민우, 그 사람은 오로지 날 보려고 시골서 올라왔던 거야. 해마다 따뜻하던 겨울 날씨도 시험이 있는 날이면 골라서 변덕을 부리곤 했지. 그 며칠 전엔 눈도 내렸던  같아. 그래서 그날, 방바닥의 냉기를 못 이겨 연탄불을 주인집에서 피어와 타다만 연탄재 위에 올렸던 거야. 네댓 시간만 눈을 붙이고 나면 날 보러 올 수 있었으니까.


다시 눈가가 젖어오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잊었다고 스스로 다짐하던 일인데, 갑자기 주마등처럼 생생히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네 잎 클로버를 끼어 둔 책갈피 사이로 입술을 대고 풀피리 불 듯 불던 기억도 되살아 났다. 페이지 사이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답시고, 붙어있는 페이지 사이로 바람을 불어 떼어 놓으려고 그랬던 것인데 피릿피릿 풀피리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날 둘이는 서로 손 마주 잡고 배꼽이 빠져라 한바탕 웃어댔던 것이다. 마음으로는 울고 있지만 얼굴로는 웃음기가 도는 현실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아직도 이런 감정이 내게 남아 있었다니.


는 그해 필기시험은 합격을 했으나 면접을 러 가지는 않았다. 집안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쳤으나, 한번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듬해  화학과로 진로를 바꿨고, 서울에 있는 사립 명문대로 진학을 해서 그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공부를 오래 하는 것 만이 주위의 결혼하라는 성화를 당분간이라도 뿌리치는 구실이 되었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순간에 몰입하자 어느덧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기억도 그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흐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요란하게 창문을 흔들자, 문득 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그해 우리는 짧은 시간, 긴 사랑을 나누었던 거야. 서로 사랑을 했고, 그뿐이었던 거지.


겉표지와 함께 장씩 들썩이던 보고서는, 세차게 불어 온 바람에 한꺼번에 날리더니 기어이 책상 모서리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서편 하늘로 길게 누운 햇살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이 드나들던 연구실 창문 틈새 느릿느릿 스며들더니 어느새 노을빛으로 사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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