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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11. 2022

사금파리

누구에게든 기억이 미칠 수 있는 까마득히 먼 곳의 유년시절이 있다. 유년시절의 추억은 마치 사금파리와도 같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원형을 온전히 되살리기는 애초부터 무망(無望)다.


얼마 전, 당숙(堂叔) 상(喪)을 치를 때의 일이다. 일가친지들이 장례식장에 모여 고인을 추념하며 지난시절을 떠올리다가 고향의 생가(生家)에 한 이야기가 나왔다. 박가와 권가의 집성촌이었던 고향 마을에는, 이전 살던 사람들이 대구를 비롯한 인근의 중소 도시로 거처를 옮겨 간 이후 불과 20여 호만이 남아 마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다.


선산(先山)에 있는 조상묘의 벌초를 하려고 해마다 고향을 다녀오기는 지만, 시간을 두고 고향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네댓 살 무렵에 대구로 이사를 나왔기에 고향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만, 내게는 남들이 미처 모르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우선, 아버지가 열아홉의 나이로 조혼(早婚)을 했는데,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그 보다 한 살 더 많은 스무 살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모님들의 등쌀에 못 이겨 혼례를 올린 것인데, 이는 앞을 못 보는 할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쉰가까운 나이에 이르자 젊어서부터 앓아 온 두통과 천식이 갑자기 심해졌던가 보다.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의성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한약방을 수소문해서 처방받은 대로, 가마솥에 삶은 미역줄기를 수건에 말아 이마를 싸맨 것인데, 손 쓸 새도 없이 시신경이 익어버렸다고 한다.


어머니의 손위 누이들은 여섯이나 있었지만 이미 시집을 간 후였고, 아래 동생 넷은 모두 십 대의 어린 나이였다.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농사일이 많긴 해도 머슴을 두고 친척들끼리 서로를 품앗이 삼아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십 대였던 아버지는 농사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다. 결국, 아버지의 결혼으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일 만이 급작스럽게 닥친 이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결혼한 이듬해 9월에 군대를 갔다. 결혼하고 나서 이내 가 들어섰고, 그해 음력 윤유월이 되어 어머니가 나를 낳은 지 백일 가까이 지나자 바로 징집이 된 것이다. 당시 군 복무기간은 36개월이었는데, 신혼이 뭔지도 모르 지아비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나, 꼬물거리는 자식을 두고 최전방으로 군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아버지가 서로 그립기는 매한가지였을 테지만, 앞 못 보는 시어머니를 건사하면서 손아래 시누이들까지 줄줄이 보살펴야 하는 어린 새댁의 얼굴로는 아마 눈물 마를 날이 없었으리라.


유년시절의 기억이 처음 맞닿은 곳은 아버지가 제대할 무렵인 바로 네 살 즈음이다. 본채 앞으로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 양쪽으로는 아름드리 대추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심어져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대추나무 가지에 까치가 내려앉아 울어대면, 어머니는 나를 앞세우고 서둘러 대청마루로 나왔다. 까치가 아침부터 요란하울어대는 것이 싫지 않았던 것은, 제법 쌀쌀해진 날씨도 날씨지만 따뜻이 안아 준 어머니 품속에서 내가 까치에게 꼭 전할 말이 있었고,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치야, 까치야! 우리 아부지 언제 오노?"


평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지만, 어머니가 저고리 소매로 스윽 눈물을 훔치는 일기억 속에 함께 남아 있기에, 한참 후 철이 들면서까지도 스스로 이를 입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와 나, 단 둘 만의 내밀한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스스로를 힘들게 했을는지도 몰랐다.


까치가 울고 간 날 오후가 되면 멀리 동구 밖으로 흙먼지를 날리면서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실제로 반가운 소식을 들고 집으로 오는 일도 있었다. 학교를 다녀온 막내 고모가 아버지가 보내온 군사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서는 앞  보는 할머니 앞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 주는데, 이제는 얼굴마저 어렴풋한 고모의 하얀 치아가 오물거리는 입을 따라 비치다 말다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바로 손아래 고모, 머슴 할배와 함께 들일을 나가고 나면 늘 집에는 할머니와 나,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문밖에서 길 하나 건너면 조그만 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는 들일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내 걱정스러웠 보다. 가늘게 꼬은 새끼줄로 할머니의 허리춤과 나의 허리를 묶어 두었는데, 그날따라 그만 새끼줄이 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주변을 맴돌면서 내가 인기척을 낼 때까지는 아무런 걱정을 않으셨다고 한다. 간혹 묶어놓은 새끼줄이 풀릴 때가 있어도, 할머니 점심을 차리려 왔다가 다시 묶어 두거나, 얼마 있으면 막내 고모가 학교에서 돌아올 테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마루에서 떨어져 한참을 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컴컴한 마루 아래로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이 보였다. 흔히, 시골 농가의 마루는 턱이 높아서 마루 아래 넓은 공간이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도 하지만 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머무는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등 위로 올라타도 너끈히 버틸 만큼 웃자란 어미 흑구(黑狗)가 한 마리 있었는데, 마침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루 아래로 뽀작뽀작 기어들어가니 퀴퀴한 지하실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새끼들이 어미젖을 빨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만 시장기를 느꼈고, 마침 어미 젖을 비운 강아지 한 마리를 대신해서 분홍빛이 도는 젖꼭지를 물었는데, 양볼에 닿는 젖살의 따뜻한 느낌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런데, 그만 바깥세상에선 야단이 났다. 마루턱에서 가까이서 들리던 울음이 잦아들고 얼마 후엔 인기척마저 들리지 않게 되자, 할머니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바로 뒷집에는 손주 둘을 맡아 길러주는 할머니 친구 한 분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이곳저곳 더듬어가며 가까스로 그 집까지 가셨던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급한 부름을 받고 어머니가 서둘러 집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내가 마루 아래로 종적을 감췄을 때였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앞의 못 밖에 뵈는 것이 없었고, 오만가지 나쁜 생각을 하며 갈쿠리나 쇠스랑을 사용해서 온 못을 이 잡듯이 뒤졌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의 나는? 개 젖을 빨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인데, 나를 찾느라 집안이 난리법석인 가운데, 학교에서 돌아 고모가 마침 단잠에서 깨어나 컴컴한 대청마루 아래서 울고 있는 내 울음소리를 용케 듣게 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당시 나를 찾으러 못을 뒤지느라 정신없을 때 집안 아재도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집에서 기르던 흑구 이야기하다가 그만 마루 아래 강아지들과 어울렸던 일까지  것이고, 그 이후 있었던 나도 모르 한 바탕의 소동을 기억으로 어준 사람이 바로 아재였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어머니가 장날에 내다 팔려고 장바구니에다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한 마리씩 써 눌러 담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새끼들이 장바구니 위로 앙증맞은 머리를 내놓고 어미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멀찌감치 서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어미 개의 커다란 눈동자가 무척 슬퍼 보였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새끼를 장에다 내다 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구가 집 창고에 보관해 둔 농약을 잘못 먹고 죽어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나서 대구에서 자리를 잡으실 때 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이 즈음부터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도 더욱 선명해지는데, 고향 집에서의 행동반경도 훨씬 넓어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웃에 살형제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뒷산으로 함께 놀러 간 적이 여러 번 있는데, 그곳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무지 사이로 사금파리가 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중에 집안 어른의 말을 듣자니, 먼 옛날 고려장이 횡행하던 시절의 부장품이 세월의 풍상(風霜)에 씻겨 이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완전히 대구로 이사를 나왔을 때는, 내가 다섯 살에 막 들어설 무렵이었다. 시골 살림살이라 보잘것은 없었지만 짐차가 먼저 떠나는 것을 보고 대구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는데, 운전석 옆 엔진룸의 온기로 추위를 녹이며 갔던 기억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늦가을이나 겨울을 목전에 둔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막내 고모 이야기를 몇 차례 입 밖에 내자, 아재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니는 너 막내 고모 기억이 나기는 나나?"


"그럼요. 고모 이름도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걸요. 거기다, 고모가 생전에 즐겨 입었던 분홍색 체크 블라우스까지도."


사실은, 고모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블라우스라고 말할 뻔했다. 아재야 함께 살아 본 적이 없으니 고모가 입었던 옷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리 없겠지만, 분홍색 체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고모야 말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고모의 마지막 모습인 것이다. 아재의 말씀으로 새삼 확인한 것이지만, 고모내 기억 속에서도 무척 예뻤다. 사고로 꽃다운 목을 잃고 말았지만, 아버지는 두고두고 먼저 간 누이동생을 그리워했다. 부모님이 고모 이야기를 어느 순간 함구한 것은, 나와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없는 고모의 존재를 자식들 머릿속에 더 이상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유년의 기억 속 막내 고모와의 추억는, 온전한 기억의 한 모퉁이에서 툭 떨어져 나와 불쑥불쑥 묵은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 한 조각 사금파리와도 같은 것이다.


생살을 금방이라도 베어 낼 듯한 날카로움을 가진 사금파리는 부서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형이 아름다운 도자기의 일부였다. 그리고 사금파리 자체는 칼날 같은 빗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도자기(陶姿器)의 원형도 한쪽으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시절의 기억은 사금파리 같아서,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 생살을 에일 듯 쓰라릴 때도 있지만, 완만한 본연의 부드러움이 생채기 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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