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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15. 2022

성주(星州) 이야기

한개 마을과 왕가(王家)의 태실(胎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여행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 달 전, 성주(星州)가 여행지로 결정되었을 때는 먼저 의아한 마음부터 들었다. 하필이면 왜 성주이지? 어디 펜션이라도 괜찮은 곳이 있어,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밤을 함께 지새우며 코로나로 소원했던 회포나 단박에 풀어버 뜻인가?


사실, 포항 동기들은 코로나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부부가 함께하는 1박 2일 모임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 코로나 이후 첫 모임 자리에서 7월 정기 모임의 이전 행사로 무작정 기획된 것이 이번 여행길인데, 목적지로 삼은 성주는 포항과 거리상 가까운 곳이긴 해도 대부분 참가자들이 처음 가는 낯선 곳이었다.


포항에서 8시에 출발하는 은 부부 두 쌍을 포함해서 일곱 명이고, 대구 출발하여 합류하게 될 서원장 부부를 합치면 이번 여행의 성원은 도합 아홉 명이었다. 대로 나뉜 차가 성주 한개 마을 주차장에 10시에 모두 도착하기로 하고, 신나는 1박 2일 여정(旅程)의 '성주 가는 길'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한개 마을을 본 첫 느낌은 포항과 가까운 경주 양동 마을의 초입(初入)에 들어섰을 때와 흡사했다. 마을 입구에 상주하는 문화유산 해설사가 열한 시에 경주 문화원의 단체 손님들과 예약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시간을 틈타 흔쾌히 마을 투어에 나서 주었다. 마침, 한개 마을에는 포스텍 교양학부에서 한문을 가르치다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고등학교 동기, 이교수의 생가가 있는 곳이어서 그런 반가움이 더했다. 미리 전화를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곧장 날라 올 친구이기에, 쉬는 날 혹시라도 민폐를 끼칠까 봐 전화를 자제하고 있던 터였다.


조선시대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가 1450년 무렵에 성주 월항에 터를 잡아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 된 한개 마을은,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한 사대부들이 낙향을 해서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지만, 조선말 기울어져가는 왕조를 지키려고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 바쳐 항거한 독립지사를 여럿 배출한 지조 있고 기개 서린 마을이라 하니, 마을 초입부터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마을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가며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저택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골목 양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돌담길 너머 여러 채의 기와지붕은, 그 아래로 흘러내린 처마와 물빛 도는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겹겹이 이어지는 선을 이루고 있어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는 공간미(空間美)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문화유산 해설사는 이 바쁜 와중에서도 한개 마을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응와 종택에 관한 설명을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북비라는 덧문이 유명한 이 고택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관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충심으로 모시던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사랑채를 허물고 북향으로 문을 낸 후, 날마다 이를 통해 북쪽으로 절을 올렸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 집을 두고 북비고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충절을 유훈(遺訓)삼은 이유를 실감할 수 있는 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예정된 방문지는 한개 마을과 근접한 곳자리 잡고 있는 세종대왕 왕자태실이었다. 사실, 왕자의 태실이 한양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성주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자체도 금시초문이었지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왕손들과 불가분 하게 연을 맺고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권력 다툼에서 늘 우월한 지위에 있던 세가(勢家)유림(儒林)할거(割據)하던 곳을 떠올리든, 이들과의 다툼에서 패자로 몰려 몰락한 양반들이 유배를 가거나 생을 마감한 곳을 떠올리든, 어느 쪽으로도 그저 명당이라 하여 왕실의 태실을 두기에는 성주가 지정학적으로  너무도 멀리 있는 곳이. 아니, 이전까지는 렇게 알고 있었다.


태실의 입구에서도 문화유산 해설사가 어김없이 친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마침, 태실의 비탈을 오르는 데크의 계단을 돌계단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태실을 가까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이 먼 곳, 선석산 태봉에 자리 잡은 이유는, 풍수로 볼 때 봉우리 정상이 경사를 이루지 않고 자연적으로 평면을 이룬 곳이 명당인데, 이런 점에서 이곳은 길지() 중의 길지라고 한다. 역성(易姓) 혁명을 통해 왕조가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어난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크게 흔들린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이반(離反) 민심을 아우르면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살려야 할 당위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는 이후로도 왕실의 태실이 전국 각지에 있는 명당에 자리를 잡는 실리적 명분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아래쪽에는 이를 체험할 수 있는 생명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왕실의 태실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곱씹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문득, 단순히 볼거리를 즐기던 관광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관광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지자체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으로 성주의 맛집인 새 불고기 식당에서 한우 불고기 정식을 먹었는데, 과연 소문난 대로 맛이 뛰어났다. 식사 후, 숙소로 가기 전 방문지로 성밖숲 왕버들 군락지를 보러 갔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넓게 펼쳐진 노변에 조성되어 있는 왕버들숲은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래로는 맥문동이 넓게 심어져 있었으나 아직은 보랏빛 꽃이 피기에는 날이 이른 지 초록 풀잎만 바람에 쓸려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성주까지 왔으니 참외를 맛보지 않을 수가 없어, 친구 부인인 이여사님 사촌 동생이 관리자로 일하고 있초전 참외 선별소를 찾았다. 성주 참외는, 꿀참외로 유명한 초전 참외를 그중 제일로 치는데, 과육(果肉)이 아삭아삭하고 싱싱한 것이 말 그대로 꿀맛으로, 집집마다 1박스를 선(先) 경매로 선매(先買)하여 차에 실으니 그만 마음이 넉넉해졌다. 사람 좋은 사촌 동생의 커피 대접을 끝으로 포천 계곡에 있는 만귀정으로 출발했는데, 멀리 보이는 가야산의 산세가 올망졸망한 것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만귀정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가 귀향하여 만년을 보낸 곳인데, 앞서 이야기한 이교수가 학창 시절 하안거(夏安居)를 하던 곳이라 한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곳을 여전히 생활공간으로 쓸 수 있는 이가 친구라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지만, 때맞춰 그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주인장 없는 집을 불쑥 방문해 미안하다 고변(告變)하며 실없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해도 서로 마음만은 사뭇 유쾌했다.


계곡 아래 아홉 남녀가 계류(溪流)에 발을 담그고 참외를 깎아 먹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청량한 바람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와 잠시 더워진 몸을 구석구석 식혀주는데, 소금기에 절어 끈적일 뿐인 포항의 바닷바람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김천의 용추 계곡으로 이어지는 무흘구곡을 따라 숙소로 이동하며, 오래간만의 나들이가 모두에게 정말 신나면서도 힐링이 되었다. 내일은, 오늘 밤 숙소로 묵게 될 펜션 주변에 자리 잡은 용추 계곡부터 시작하여 수도암과 청암사를 두루 둘러볼 예정이다. 그래서, 이어서 쓸 글의 제목이 '김천(金泉) 이야기'이다. 당장은, 오늘 저녁을 함께 할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기다려지고, 내일 이어질 행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벌서부터 마음이 설렌다.


성주(星州). 별다른 감흥(感興) 없이 찾았지만, 정말이지 언제라도 다시 손에 넣고픈, 주머니 속 구슬 같이 보배로운 고을이다.


한개 마을의 토석담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골목길을 두르고 있는 고택이 너무나 안온해 보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층층이 이어진 기와집
북비고택 안 정경
세가 내부 청마루
태실앞에서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태아를 받고 있는 모습을 실물화 한 조형물
태아를 받고 있는 실제 상황을 재현한 조형물
세종대왕 왕자 태실, 생명문화공원 안내도
성밖숲 왕버들 1
성밖숲 왕버들 2
만귀정 앞 계류
멀리 보이는 가야산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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