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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23. 2022

정든 배

바닷가 이야기

요 며칠 사이는 만조(滿潮)인가 보다. 데트라포트의 물기 먹은 해수면(海水面)최고조 이를 만큼 바다가 부풀어 올라 바닷바로 아래 훌쩍 다가서 있다. 날이 잔뜩 흐려있어 하늘과 바다의 물색이 거의 같은데, 슬쩍 머리만 내민 암초(暗礁) 위를 위태롭게 버티고 선 갈매기가 불어오는 바람에 가녀린 다리를 크게 휘청이고는 곧장 물속으로 자맥질한다. 그러다 이내 몸을 솟구쳐 저만치 날아가 내려앉은 갈매기는, 데트라포트 위에서 연신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리며  있는데, 앙다문 부리 사이로 막 물아래서 훌쳐 온 물고기 한 마리가 애처롭게 몸을 퍼덕이고 있다.


열 시를 넘어서고 있는 바닷길은 생각 밖으로 너무나 한적하다. 아니, 완전히 텅텅 비어 있다고 해야 할 만큼 도로 위를 오가는 차들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왠지 모를 들뜸으로 도시 전체가 들썩이곤 했는데, 2017년 11월의 포항 지진과 2020년 말 코로나가 서너 해를 걸러 이곳을 치면서 피서철 바닷가 분위기가 크게 수그러들고 말았다.


근래, 늦은 오후부터는 영일대 주변에서 버스킹이 다시 시작되었고, 유명 가수들의 공연을 알리는 배너가 해안길 가로등마다 걸려 바닷바람에 요란하게 펄럭이곤 있지만, 아직은 휴가철이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에서 북새통을 이루는 사람 구경하기가 여전히 요원(遙遠)한 실정이다.


어제, 휴대폰을 가지고 놀던 중에 페이스북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김영광 가요제'에 대해 우연히 눈길이 머물렀다. 도대체, 작곡가 김영광을 기리는 가요제가 하필이면  이곳 포항에지난해에 이어 다시 열리는지 영문을 몰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바로 이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향토 출신 작곡가란다. 그런데 소개글 속에 나열되어 있는 작곡가를 대표하는 노래들이 너무나 귀에 익숙하면서도 정겹기 그지없다.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 대표적인 노래가 있다. 마치, 11월을 지나면서 길거리 상점마다 틀어 놓은 크리스마스 캐럴 세모(歲暮)의 분위기를 한껏 달아오르게 만들 듯, 6월 말이  가까워지면 곳곳에서 들리는 키보이스의 노래 '해변으로 가요'의 전주(前奏) 무심결에라도 귀에 닿는 순간, 한 여름 작열(灼熱)하는 햇살 아래의 뜨거운 모래사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른 키보이스의 또 다른 대표 '정든 ', '바닷가의 추억'을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영광인데, 특히 그가 '정든 배'작곡했던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하니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는, 196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당대의 여러 유명 가수들이 부른 수많은 히트 가요를 작곡한 히트 메이커로서 탄탄한 명성을 쌓게 된다.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수미의 '여고시절'과 '내 곁에 있어 주', 이현의 '잘 있어요',  이상열의 '못 잊어서 또 왔네'와 '사랑과 우정', 방주연의 '그대 변치 않는다면', 템페스트의 '잊게 해 주오', 박상규의 '둘이서', 들고양이의 '마음 약해서', 주현미의 '잠깐만'과 '짝사랑', 태진아의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와 '노란 손수건', 강승모의 '무정블루스', 최진희의 '카페에서',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등 트로트에서 발라드까지, 장르넘나들며 그가 작곡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곡들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며칠 전에는 경북도민체전이 이곳 포항에서 열렸는데, 개막식을 축하하러 많은 유명 가수들이 왔었다. 이찬원과 전유진, 에일리, 제시, 오 마이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기 현역 가수들이 초청된 것인데, 특히 전유진은 이곳 포항 출신이어서 '포항의 딸'로 시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중학 1학년 때 포항 해변 전국가요제에 참가해서 부른 '용두산 엘레지'로 얼떨결에 대상을 차지해 트로트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전유진은, 트로트 특유의 꺾기와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대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상당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녀의 열렬 팬 중 한 사람으 전유진이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는 TV 조선의 '요일은 밤이 좋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챙겨 보고 있다.


사실, 대중문화 예술에 있어서도 벽지(僻地) 다름없는 이곳 포항을 대표하는 노래가 하나 있기는 하다. 최백호가 부른 '영일만 친구'가 바로 그것인데, 원래 최백호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자신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입영 전야'와 '낭만에 대하여'에 버금갈 만큼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말미(末尾)가 되면 빠트림 없이 이 노래를 불러주어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누구든 흥에 겨워 부를 수 있는 국민가요의 하나 된 것이 한편으론 자랑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국민가요인 '영일만 친구'에다 불세출(不世出)의 천재 작곡가 김영광, 거기다 촉망(屬望) 받는 천부적 가수인 전유진까지, 이제 포항을 대표해서 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가요계에서의 계보(係譜)가 확실하게 갖춰지게 되었다. 사나흘에 걸쳐 바닷길을 걸으면서 머릿속을 넘나들던 갖가지 생각을 이제 와서 정리해 본 것인데, 실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만한 공상이라도 계속 이어갈 수 있음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바람에 깃발이 요란하게 펄럭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엔 퓨전 국악밴드의 공연을 홍보하는 배너가 가로등에 걸려있다. 오는 토요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공연인데, 제목도 범상찮은 '심청 날다'이다. 얼핏 배너 속에 비친 출연진의 실루엣만 보아도 연주자들의 환한 표정과 형형색색의 옷차림이 한바탕 난장을 치를 모양새이다. 바야흐로, 이곳 포항에도 드디어 공연 문화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와는 달리, 영일대 해수욕장의 중간 지점에 이르니 그새 바닷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모래사장 위에는 연중으로 열리는 샌드 페스티벌을 위해서 보름 전 설치한 모래조각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고, 백사장이 거의 끝날 즈음엔 언제 설치해 둔 것인지 '최고봉 품바 공연단'의 간이 공연장까지 마련되어 있어 늦은 오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관객들을 불러 모을 요량으로 보인다.

  

그래, 이만한 정도는 돼야 여름 바다가 제 모습을 갖춘 거지. 다만 한 가지 못내 아쉬운 사실은, 지금 보다는 더 많은 수의 비치파라솔을 백사장 여기저기에다 즐비하게 설치하여, 예전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여름바다를 즐기려피서객들을 이곳 포항으로 불러들이는 것인데, 아직도 이놈의 코로나가 모질 만큼 사람들의 발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는 점이다.


포항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 등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날 눈여겨보아 두었던 꽃신 놓인 바위 위로 절로 눈길이 갔다. 젊은 부부가 애들과 함께 장난감 살림 세트로 모래밥을 짓고 놀던 곳인데, 미처 아이 신발을 챙기지 못하고 깜박 두고 떠난 모양이었다. 바위 위에 당그랗게 놓여있는 신발이 하도 예뻐서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오늘 그 자리에는 신발은 오간데 없고 모래로 신발 자국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재차, 신발 자국을 사진에 담자니 뭔가 모를 애잔함이 슬금슬금 가슴속으로 차 올랐다. 아마, 아이는 두고 온 신발 때문에 몹시 애가 탔을 거다. 어쩌면 눈이 부어오를 때까지 한참을 울고불고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지. 아이가 품었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화(同化)되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릴 적 때 묻지 않은 감정이 불쑥 이입(移入)되어 그만큼 속이 아려왔다.


아이의 부모가 새로 사서 신겨 줄 신발은 틀림없이 아이의 성에 그닥 차지 않았을 것이다. 실수로 떨어트린 아이스크림을 대신해서 새로 산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어 주어도, 흙먼지 뒤집어쓴 아이스크림을 막무가내로 다시 물어내라고 떼 쓰는 아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지 않는가. 아마 이후로도 아이는, 깜박해서 바닷가에다  온 신발을 잊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워할는지 모를 일이다.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끊어짐이 없다. 어제와 오늘 풍경이 같은 듯 보이지만, 우선 날씨에 따라서 천차만별 변화를 보이는 곳이 바닷가이다. 서너 해 노래가 사라져 흥을 잃어버린 바닷가에, 넘실대는 물결 따라 끊겼던 노랫가락이 올여름엔 꼭 이어졌으면 한다.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가 변죽을 울리면, 이어서 '정든 '처럼 주옥같은 김영광 노래로 바닷가 간이 무대에서 버스킹을 하고, 상가에서 들리는 영일만 친구'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흥을 한껏 돋워놓으면, 전유진이 부르는 청량(淸凉)노래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모래 조각 앞에는 체험활동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 지시에 따라  앙증맞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멀리, 날이 개인 영일대 위로는 무지갯빛 해무리가 숨바꼭질하듯 구름 사이를 들락거리 있는데, 원래 해무리는 행운과 영원불멸을 상징한다고 한다. 오늘, 이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이 바닷가를 찾게 될 모든 사람들 모두가 온 누리를 비추고 있는 해무리 속 감춰진 행운들을 하나하나 골고루 나눠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멀리, 영일만 너머로 길게 뱃고동 울리며 정든 배가 떠나고 있다.


든 배 (by키보이스)

달그림자에 어리면서
정든 배는 떠나간다
보내는 내 마음이 야속하드냐
멀어져 가네 사라져 가네
쌍고동 울리면서 떠나간다

https://youtu.be/qnoTTp1y7sA


열시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바닷길 산책로가 비어 있다.
바닷가에서 피서를 즐기는 가족
퓨전 국악 밴드 공연, '심청 날다'의 홍보 배너
2022 샌드 페스티벌을 위해 영일대 해수욕장에 설치한 모래 조각
최고봉 품바 공연단 광고 배너. 바로 앞에 간이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전날 누군가 두고간 하얀 꽃신
다음 날 모래 흔적으로 남은 신발 자국
체험활동 나온 아이들 기념사진 촬영 현장
영일대 위에 뜬 해무리
정든 배는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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