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습(濕)한 날이 며칠간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이면 바닷가엔 의례히 해무(海霧)가 짙어지는데, 회색빛 감도는 세상이 마치 한 폭의수묵화(水墨畵)를 보는 듯담백하다.
일주일 가까이를늘열 시쯤 집을 나서 산책을 하다 보니, 바닷길로 접어든 산책로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 몇몇은 벌써 낯이 익다. 평소와는 달리마스크를 하지 않은 맨 얼굴이 알아보기가 쉽고,그래선지표정도 더 밝아 보여옆을 지나칠 때 슬그머니나도 모르게뒤돌아 볼 때가 있다.어쩌다 그만 눈길이라도마주칠 때면 서로 계면쩍은 마음에서입꼬리가슬며시말려 올라가는 것이,이들의 심정역시 나와 매한가지였던 것 같다.저들 눈에 비친내 얼굴 역시어느 만큼 낯이 익어 있었던 것이다.
걸은 지 십 여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슴팍으로 물기가 배어 나온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고 있지만 진득한 열기를 담고 있어 마치 후끈후끈한 한증막에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모자의 챙에도 이내 물기가 어리더니, 이마 아래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안경 속으로 방울져 흘러내린다. 이래저래 불쾌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는 날이 분명하건만, 여전히 날만 잔뜩 흐리고 아직은 비 한 방울 내릴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데트라포트에서 막 날아오른 갈매기 한 마리가 양쪽 날개를 활짝 펴더니 한차례의 날갯짓도 없이 허공에서 한참을 날아오른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갈매기란 놈은 바람이 잠잠할 때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무조건 날갯짓을 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오늘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날이면 날갯짓 한번 없이도 양 날개를 활짝 편 채 오랫동안 하늘 위를 활공(滑空)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보기에 따라서 사람들 세상살이와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세찬 바람이 불어올수록 오른쪽과 왼쪽 날개를 서로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양쪽으로 펼치기만 하면 갈매기는 편안하게 하늘을 날 수 있다.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양 날개 모두 별도의 힘을 쏟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온 세상이 바람 한 점 없이 평온할 때는, 갈매기의 양쪽 날개가 정말이지 온갖 부산을 다 떨어야만 한다. 좌익과 우익 양 날개의 고단한 날갯짓이 쉼 없이 이어져야만 하늘을 나는 동력(動力)이 담보(擔保)되는 것이다.
이런 갈매기와는 달리, 지금처럼 우리 사람들 세상살이가 편치 않을 때는, 좌익과 우익 양쪽 날개가 정치적 역량(力量)을 모아 하늘로 비상(飛上)할 수 있는 동력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세상살이의 풍파(風波)가 험난할수록 오히려 반대편 날개를 꺾어버리고자 정쟁(政爭)을 일삼고 있는 좌익과 우익의 무분별한 정치놀음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疲弊)해지고 있다.
어느 한순간, 돌돌돌 도로 위로바퀴구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유모차를 끌고 있는 젊은 새댁이어느새뒤를 따르고 있고,유모차 그늘막아래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아기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말았다. 웃음 띤 얼굴로 슬쩍 얼러주니 곧장 까르르 해맑은 웃음으로화답(和答)을 한다. 그런데가만히생각해 보니, 이 시간에 갓난쟁이 아이를 본 것은 바닷길을 다시 산책하기 시작한 후로 거의 처음인 것 같다.
학교를 떠날 때 적으나마 걱정스러웠던것이 바로 인구 절벽 문제였다. 해마다수학능력시험의 지원자수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어느샌가대학의 신입생 모집정원보다 실제 시험에 응시하는 수험생의 수가 오히려 적어져,실질경쟁률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이미 몇 해 전 일이다.학교 현장에서도, 학생 수 감소로 인한 학급별 인원 수급이 불안정해져우선은 학급당 정원을 줄이더니,급기야는 학급수 감축으로 급한 불을끄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모차를 타고 있는 아기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면서, 모처럼 느끼는 생동감이 전율처럼 전해져 흠칫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그저 길을 오가다 마주치는 길고양이나 비둘기 새끼를 보며 느끼게 되는 맹목적인감정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어린아이는 곧 우리들의 미래이기에, 비록 이 자리서는 그저 한 번의 눈 맞춤에 그칠 뿐이었지만, 앞으로 계속 올곧게 자라, 학교 운동장을 건강한 몸으로 기운차게 내달리면서 교실 책상 사이사이를 활기차게오가며미래 사회의 동량(棟樑)으로 자라나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닷길을 오가는 유모차가 더욱 많아질 것을 염원하며 앞만 바라보고 걷는데, 멀리 스페이스워크가 보인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개장 시간인 열 시에서 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자박자박 계단을 밟으며 안팎의 궤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수가 멀리서 보아도 만만치 않다. 이젠 포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완연하게 자리를 잡아, 해안도로의 임시 주차로에는 타지에서 대절 온 관광버스가 여기저기 주차되어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때마침 인이어 이어폰에서는 한국인 팝페라 가수 Kimera의 The Lost Opera가 막 울려 나오고 있는데, 만약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스페이스 워크가 촬영 장면으로 나온다면 배경음악으로 이 노래가 썩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양쪽으로 완만하게 돌아 나오는 나선형(螺旋形)의 입체 구조물을 오르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 세상 시름을 다 내려놓은 듯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이는 사람들의 자잘한 동적 움직임이 이 노래 본연의 역동성과 어울려 오선지(五線紙) 위의 음표(音標)처럼 묘하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덩달아 내 발걸음 역시 마치 마칭 밴드(Marching band)의 연주에 맞춰 행진을 하듯 한결 가벼워졌다.
해상 누각인 영일대에 이르니, 바로 앞쪽에서 공연 무대 설치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는데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3년 전 그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전유진이 참가하여 대상을 받은 포항 해변 전국 가요제가 열릴 행사장 무대란다. 아마추어 노래자랑으론 드물게 총 상금 천만 원이 걸려있고, 대상 상금은 700만 원인데 예심을 거친 12팀이 오늘 본선 무대에 올라 경연을 펼친다니, 초청가수인 태권 트롯맨 나태주의 공연도 볼 겸 저녁 본 행사에도필히 참석하리라 단단히 다짐하면서 애초의 목적지인 죽도시장을 향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죽도시장은동해안 최대의 전통 재래시장으로 명성(名聲)이 자자한 곳이다. 갓 잡은 해산물이 공동 어시장에 집하(集荷)되어 거래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동해안에서 건조한 각종 건어물과 생필품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명실상부한 종합시장으로, 부산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에 필적할 만한 유서 깊은 전통 재래시장인 것이다.
내친걸음에 죽도시장까지둘러보려고 갑작스럽게마음먹은 것은, 아침 일찍부터 영일대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해변 곳곳에 설치된 간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맞춤 회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당장 시장기가 도는 것이 물론이거니와, 이들 관광객을 보니 사람들로 한창 붐비고 있을 죽도시장 골목골목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코로나로 인한 여러 제약이 풀린 이후로도,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죽도시장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것이다. 일단, 산책길에서 늘 반환점으로 삼아 돌아 나오던 길을 내쳐 지나치고 나니 죽도시장까지 이어지는 발걸음에 더 이상 거칠게 없었다.
어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오징어와 갈치, 고등어 등을 파는 난전(亂廛)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이미 경매가 끝나서인지는 몰라도 고무장화를 신은 상인들보다는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관광객들이 오히려 더 부산스러워 보였다. 좀 더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소라나 전복, 새우, 아귀를 취급하는난전들이북새통을 이루고,틈새 길상가 건물에는 문어를 삶아서 파는 점포들이 줄지어 있다. 시장 바닥에 흥건한 소소한 물웅덩이를 피해 회센터로 이어지는 사잇길로 접어들자여기저기서 횟거리를 사라는 호객들이 줄을 잇는다.
단골인'엽이네 횟집'에 들러 참가자미 새꼬시와 광어회를 각각 1kg포장 주문했는데, 여사장님이 물회 감으로 팔다 남겨놓은 농어를 덤으로숭덩숭덩회떠준다.채로 썬 야채와 함께 따로 판매하는 초장과 된장을 주섬주섬 함께 넣어주는 사장님 인심이 늘 넉넉하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주려고 카드 대신 현금을 건네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손사래를 치면서호탕하게웃는 웃음이 마치여름 장미처럼싱그러우면서보기에도 참 좋았다.
어시장을 벗어나 본 시장인종합시장초입(初入)으로 들어서니 온갖 먹거리와 잡화물을 파는 상점과건어물 점포 사이로사람들이 넘쳐난다. 정말이지 세상사는 맛이 그대로 우러나오는 풍경이었다. 먹자골목 안 보리밥집은 점심을 먹으려는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었고, 나지막한 나무 걸상에 앉은 사람들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연신 훔쳐가며 뜨거운 수제비를 맛있게 먹고 있다.
파전에다 새우와 오징어 튀김까지 포장을해서 방금 떠 온 회와 함께 양손에 나눠 들으니 마음이 한껏 뿌듯해졌다. 돌아가는 길은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포항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승객들로 붐비긴 하지만 빵빵한 에어컨 덕분에 바깥바람보다 오히려 더 시원해서, 한참을 걸은몸에서 흘린 땀을 기분 좋게 식혀 주었다.
멀리 영일대를 지나치는 해안 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바라보는 바닷가가 무척 낯설었다. 이만한 높이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이 생소했던 것이다. 이미 설치를 마친 공연 무대와 행사를 위해 가지런히 정렬해 둔 의자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제철 만난 바닷가는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뭔가 모를 설렘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곳, 그곳에 바로 여름바다가 있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면서 확인한 걸음수가 벌써 만 오천보를 넘어서고 있었다. 걸어서 죽도시장까지 고단한 여정(旅程)에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횟감과 먹거리를 나눠 쥔 양손으론 오히려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시장기를 달래 가며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막내 생각을 하니, 그만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