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진 Aug 05. 2022

3학년 4반, 두 번째 이야기

The Eve of Homecoming Day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난 학생인지, 선생님이었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없지만 꿈이 거의 깨어 날 새벽에는 절반쯤 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난 직후인가는 몰라도 총점을 계산하는데 340점이 만점인지 450점이 만점인지 분간이 되지를 않았다. 과목별 만점을 하나하나 떠올려 합산을 시작하는데 알람이 울리면서 아직은 어둠이 더 먹먹한 방 안의 정물들이 하나둘씩 눈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소풍을 하루 앞두고 잠을 설치고 있는 초등학생처럼 온 밤 내내 마음이 설레어 있었던 거다.


내일 만남을 갖게 될 제자들은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세대이다. 대학 원서를 쓸 때 눈치 작전의 폐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이전과는 달리 선지원 후시험 제도로 전환되었고, 본고사와 다름없었던 대학별 논술고사 대신해서 과목별로 주관식 문제가  추가되었다. 인문계열의 경우, 국어 75점, 영어 60점, 수학 55점, 윤리와 국사 각 25점, 사회 2 과목 각 20점, 과학 1과목 20점, 실업과 제2외국어 중 택 1로 20점, 체력장 20점이고, 자연계열의 경우, 국어 55점, 영어 60점, 수학 75점, 윤리와 국사 각 25점, 사회 1과목 각 20점, 과학 2과목 20점, 실업과 제2외국어 중 택 1로 20점, 체력장 20점으로, 양쪽 계열의 만점은 340점이었다.


이를 경계로 해서 꿈속을 오락가락했던 수학능력시험은 원점수 기준으로 국어, 영어, 수학의 각 영역 점수가 100점 만점, 사회와 과학 과목은 계열별로 택 2 하여 각 50점으로 100점 만점, 계열 공통인 국사는 50점 만점으로 과목 전체를 합산한 원점수는 450점이 만점인데, 인문계열의 경우 희망자에 한해 제2외국어 시험을 별도로 치렀다. 선시험 후지원 제도 하에서 치른 수학능력시험은 성적표에 난이도를 고려한 조정점수인 과목별 표준점수와 등급을 표기하여 이를 대학입시의 전형자료로 삼았는데, 내가 퇴직한 이후로는 열 구분마저 없어지고 과목 선택의 폭도 훨씬 넓어져 문과 성향의 학생들의 손해가 현실화됨으로써 앞으로 정착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당시의 대입학력고사 시절을 꼽는다. 문과와 이과로 계열을 구분했지만 상대 쪽 계열 과목 나를 선택해서 시험을 치러야 했고, 깜깜이와 다를 바 없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는, 원서를 내기 전까지 서너 차례 치른 모의고사 결과를 보고 유명 학원에서 작성한 배치 판정표에 따라 지원 대학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4당 5락, 다시 말해 4시간 잠을 자면 합격이고 5시간 잘 땐 불합격이란 말로써 당시의 힘들면서도 치열한 입시 경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들 시험 사이를 오가며 혼란에 빠져있던 마음이 추슬러지기까지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또 한참의 시간이 걸렸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으로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시험 점수를 두고 실제 꿈속에서 얽혀 있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꼼꼼히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자, 퇴직 후의 금단(禁斷) 현상이랄 수도 있지만 이를 촉발(觸發) 한 것은 다름 아닌 내일 있을 제자들과의 홈커밍 데이(Homecoming Day) 행사인 것으로 보인다.


스무일곱이 되던 해 담임을 맡아 3년 간 고락(苦樂)을 함께 한 후, 고 3 담임의 영광을 내게 안겨 준 첫 졸업생인 이들은 재학 시절 고생을 한 만큼 인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나이로 쉰세 살인 제자들은 고위 공직자로부터 대기업 이사, 교수나 교사, 개인 사업 등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일각(一角)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며 인생의 정점(頂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동해안 제1 사립 명문고를 기치(旗幟)로 숨도 제대로 여유롭게 내쉴 사이 없이 오로지 공부만을 다그치던 어느 날 교실 바닥을 붉게 점점이 수놓은 핏자국을 보았다. 3학년이 되어서 부쩍 복도나 교실 바닥으로 핏자국이 보이긴 했어도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아침 조회 시간부터 코를 막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한 학생을 보고선 일순 안쓰러운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며칠 째 학생들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코피였던 것이다.


그날, 야간 자율학습 감독까지 마치고 돌아온 하숙집에서 무더위로 후줄근해진 몸을 식히려고 찬물로 샤워까지 했으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덩이가 하나 들어앉은 듯했다. 담임이란 작자가 아이들 건강이 그토록 상해 가고 있음에도 오로지 공부, 공부 만을 외치고 있었단 자괴감()이 뜨거운 가슴을 짓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 제때 못 이루고, 밤늦은 시간까지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나는 대로 한 편의 글을 썼다.


다음 날 아침, 직원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향하면서 우선 마음부터 단단히 추슬렀다. 옆자리의 선생님 눈을 피해 밤새 정리한 글을 읽으며 손을 보고 있는데, 한 순간 마음이 울컥해진 탓이었다. 실장의 구령(口令)에 맞춰  아침 인사를 마치자마자 말없이 양복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일순, 아이들의 동그래진 눈이 부스럭대며 종이를 펼치는 내 손길을 따라 부산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한 여름 무더위에 양복을 입고 출근한 모습부터 평소와는 달라 보였던 것이다.


재차 잔기침을 하며 껄끄러운 목을 달랬다. 삽 십 년도 더 된 지난 일이어서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하지만, '○○ 아, 너는 오늘 아침에도 코피를 흘렸더냐'로 시작되는 글의 첫 부분은 아직도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마저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끝내  눈물 한 방울이 안경 속으로 흘러내렸다. 시종 감정을 감추려 애를 썼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것까지 눈치채진 못했을지라도 울먹이는 목소리를 숨길 순 없어서 일순 교실이 얼어붙은 듯 잠잠해졌다. 계면쩍은 마음으로 돌아서서 허둥지둥 교실 을 나설 때까지 정신이 없었지만, 이렇듯 글을 통해서라도 아이들을 향한 속내를 털어고 나니 얼마만큼 마음속은 후련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기억 속 그해 여름도 무척 무더웠는데, 방학 중 보충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새로 마련해 둔 부지(敷地)로 학교를 옮겨가기 전이라, 구 교사(舊 校舍)는 무더위를 피해서 여름을 나기에는 여러모로 시설이 열악했다. 특히, 양철 지붕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몇 날이고 이어지는 열대야(熱帶夜)로 인해 잠을 제대로 이루기도 힘들었지만, 일과 후의 샤워는커녕 수돗가에서 등물조차 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어느 날인가, 마침 우리 반에서 수업을 하면 Reading을 하는 학생들의 발음과 해석을 체크하며 책상 사이의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교실 바닥의 청소 상태도 살필 겸 책상 아래를 눈여겨보던 중에 나도 모르게 헉하고 소리가 나올 만큼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이의 발아래에 붉은 피를 듬뿍 머금은 솜뭉치가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입고 있던 반바지를 내린 엉덩이 위 방금 새로 뜯은 듯한 탈지면을 상처 부위에다 덧대고 있었는데 금세라도 피가 슬금슬금 스며 나올 듯했다.


놀란 마음에서 다그치니, 온 여름 내내 엉덩이를 의자에 진득하게 부치고 공부를 하던 중에 땀띠가 났고, 얼마 안 있어 여기기서 종기가 불쑥 솟더니 궤양으로 상처가 깊어져 곪은 부위로부터 피고름이 다는 것이다. 보고 있자니 그저 말문이 막혔다. 미안하고 화가 났다. 담임이란 사람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죄를 지은 듯 오히려 머리를 잔뜩 조아리고 있는 ○○이의 어깨를 말없이 툭 쳐 주고는 마침종이 얼른 울려주기를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첫정이란 그런 것이다. 교사로서 인연을 맺은 첫 졸업생이기에 그 정은 깊고 질기며 당연히 오래간다. 그런데, 이는 오로지 나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후로도 난 여러 차례 입학에서 졸업까지 3년을 이어가 담임을 했고, 고 3 담임으로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교사가 되어 맞은 첫 졸업생은 결국 이들뿐인 것이다. 운명적으로, 각별하다는 말로만 설명이 되는 그런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3학년 4반 이야기'를 제목으로 달고, 부제(副題)를 Never-ending  Story로 쓴 이전 글에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힘들게 보낸 고 3 시절은 누구나 겪는 일이고,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마다 잊히지 않는 얼굴이 있다. 고 3 담임 선생님이란 바로 그런 존재이며, 나 역시 지난 시절 교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었기에 지금 이 만한 복을 누리고 있다.


아침부터 가까이 사는 제자들에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괜한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앞에 나서 일하는 사람에겐 여기저기서 찾아오도록 성원해 주는 것이 큰 힘이 될 터이다. 주인장(主人丈)인 장해가, 우리와 이틀을 함께 지낼 앞바다에서 손수 해루질한 참소라와 전복, 물 횟감으로 쓸 청각(靑角) 맛보기로 속속 카톡에 올리고 있다. 삼십 년을 훌쩍 지나 처음으로 갖는 홈커밍 데이 전야()가 바야흐로 눈앞에 닥친 것이다. 그리고 수원에서, 병준이와 재윤이가 약속 날짜보다 하루 일찍 출발해서 오늘 밤늦은 시간에 포항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 아침 미리 해 둔 약속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나를 태우러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열대야로 밤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소풍을 앞둔 아이의 들뜬 마음처럼, 예순을 훌쩍 넘긴 애어른의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설레는 것이 이른 시간 잠들기는 애초부터 글렀다.


오늘 밤엔 어떤 꿈을 꾸게 될는지, 설령 꿈을 꾼다 해도 꿈속에서 과연 내가 선생이기나 할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밤이다.


전날 어촌 마을 펜션 앞바다에서 해루질한 전복
오늘 어촌 마을 펜션 앞바다에서 해루질한 전복
오늘 어촌 마을 펜션 앞바다에서 해루질한 참소라



작가의 이전글 3학년 4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