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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15. 2022

다시 고담(枯淡)으로

'고담(枯淡)'은 어릴 적 내 별호(別號)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고담(枯淡)하다 '는 '예스럽고 속되지 않으며 담담하다'란 뜻이지만, '말라도 보기 좋게 마르다'란 자의적 해석으로 고등학교 시절 나의 마른 몸매를 애써 미화(美化)하곤 했었다. 교실에서 웃통을 벗어던진 채 근육 자랑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을 원망하며 입맛을 돋우려고 각종 약재를 섞은 담금주를 담아 보약 삼아 마신 적도 있었다.


교직에 처음 발을 내디딜 당시만 하더라도 50kg 중반이던 몸무게는, 이후 눈밭을 구르는 스노우볼처럼 세월 따라 둥글둥글 부풀어 오르더니 40년 가까이 지나 퇴직 무렵엔 80kg 중반까지 이르렀다. 얼굴의 광대뼈는 볼살에 묻혀버리고, 푸르게 얽혀 도드라져 보이던 팔다리의 핏줄은 살갗 깊숙이 숨어버려 주사라도 한 대 맞으려면  혈관을 찾기 위해 고무줄로 한쪽을 잠시 묶어두거나  간호사의 맵짠 손바닥 스매싱을 몇 차례씩 감수해야만 한다.


좀처럼 병원이라곤 찾지 않던 건강한 몸에는 과체중에 의한 심혈관 질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결국 혈압이 심하게 들쭉날쭉하더니 협심증 진단이 내려졌다. 물론, 체중조절을 위해 사십 대 이후로는 격한 운동을 수반하는 여러 취미활동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어느덧 약간의 세월이 더하고 나면 어느새 몸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곤 했다.


지난 설 이후, 명절 제사를 더 이상 모시지 않기로 하고는 무분별한 식탐(食貪)에서 영영 해방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무게를 잘 조절하다가도 설이나 추석만 지나고 나면 본가나 처가를 오가며 먹는 명절 음식 탓에 2, 3kg 정도 불어나는 것은 여사였다. 그런데, 이제 가족끼리 모여 간단하게 식사만 하기로 했으니 기름진 차례상 음식이나, 지나치게 많이 장만한 명절 음식을 아깝다고 애써 먹어치울 일은 분명 사라질 터였다.


때맞춰 태풍이 올라와 연휴 중 이동할 수 있는 경로와 활동 공간이 크게 제약을 받았다. 말 그대로 방콕이 대세(大勢)가 되니 입만 심심해졌다. 아무리 명절 제사를 모시지 않기로 했다지만 사람들이 모이는데 내놓을 음식마저 부실해선 안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포항에서 올 때 미리 문어를 준비했고, 대구 본가로 와서는 동생들 가족이 오기 전에 이런저런 조림 음식을 만들고 전을 부쳐야 했다. 그저 심부름에 그치기는 하나,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사이 어머니가 건네주는 손길을 마다할 수없어 넙죽넙죽 받아먹다 보니 쉴 틈 없이 하루 종일 배만 불렀다. 결국, 명절 식탐 증후군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만 것이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않았지만 며칠 사이 무릎 관절이 한 번씩 욱신거린다. 특히,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가 더욱 심한데, 몸무게가 85kg가 넘어서면 어김없이 무릎관절부터 아파오기 시작한다. 몸이 이상신호(異常信號)를 발동하는 것이다. 속이 더부룩해지고, 머릿속도 맑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선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마저 어수선해진다. 글이 제대로 쓰이질 않고, 정신적 공황상태가 온다아마 이게 전조적 징후(前兆的 徵候) 아닐까 싶기도 하다. 총체적 난국인 이다.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있을 땐 소파에 앉아있을 때 말고는 대부분 좌식(座式) 생활을 해야 해서 매번 앉았다 서는 일이 보통 고역(苦役)이 아니었다. 잠을 잘 때도 요를 깔고 누워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어깨가 뻐근하고 허리가 아팠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모양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도 부담스러웠다. 한쪽 팔을 소파나 벽에 지탱하여 일어서야 하는 꼬락서니를 생각만 해도 낯설었지만, 그게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枯淡이 古談이 되고만 것이다.


지난 며칠 사이, 아침 일찍 눈을 떴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 일이 반복되었다.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한동안 비도 오락가락하고 미뤄두었던 욕실 변기를 교체하는 일도 마무리지어야 해서 그만 몇 날을 소일해 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달콤한 게으름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을는지 모른다. 그저, 커피나 사러 상가에 들렀다가, 잠시 앉거나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 어느새 저녁 먹을 때가 되어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지만 의식의 흐름은 간헐적이어서, 잠깐잠깐 촌각 사이로 매듭만 지어질 뿐, 지나고 나서 하루를 되돌아보면 모든 게 덧없고 무상(無償)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다시 고담(枯淡)해야만 한다! '예스럽고 속되지 않으며 담담'하든지, 아니면 '말라도 보기 좋게 말라' 스스로 생각해도 남보기에 부끄럼 없을 만큼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든지 말이다.


잠시, 자리를 옮겨 거울 앞에서 바라본 내 얼굴이 무척 낯설다. 예순을 훌쩍 넘긴, 볼살 잔뜩 늘어진 노인. 오랜 세월, 듣기 좋은 말이라도 동안(童顔)이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어온 그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낯선 얼굴 속 저편에는 지난날의 枯淡이 여전히 속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맞으려 하고 있다. 이젠, 예전의 그 얼굴로 다시 페이스 업하기 위해서 내 몸이 쉼 없이 부지런하면 될 일이다. 단단히 움켜 쥔 양 손바닥으로 땀이 촉촉이 배이고, 단전(丹田) 아래로는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솟는다.


그래, 이제라도 되돌아가는 거야. 예전의 고담(枯淡)에게로! 오늘은, 멀리서 지는 해거름의 석양빛이 참 곱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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