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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23. 2022

동네 서점 이야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진 않지만 중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인 것임은 분명하다. 대문 밖을 나서 길게 이어진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시장 앞 대로변에 이르면 바로 시내버스 승강장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시장 입구와 마주한 곳이기에 늘 사람들이 붐볐다. 골목 어귀를 나서자마자 운 좋게 버스가 정류소에 도착하, 이내 버스 앞문이 열리면서 손때 묻은 흰 목장갑을 낀 앳된 여자 차장이 내리고, 서로 먼저 타려고 마구 몰려드는 사람들을 두 손으로  속으로 밀어 넣다가 나중 버스가 출발할 무렵엔 간신히 난간발을 걸치고 한 사람 한 사람 몸으로 튕겨가며 욱여넣기도 했다.


거의 종점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까지 도착하려 한참 먼 거리를 가야 했기에, 북새통을 이룬 버스 통로를 안간힘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 쪽에 자리를 잡으면 이미 버스는 네댓 정거장을 더  후였다. 버스 뒷자리는 아무래도 앞이나 중간자리보다는 공간이 넉넉하여, 버스가 급정거를 하거나 길 모퉁이를 돌아갈 때 한쪽으로 내몰린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기에, 버스 좌석 손잡이를 손으로 잡고 몸이 안정될 쯤이면 가방을 들어준 사람과 자리에 앉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여유마저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내 가방을 알게 모르게 단골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나보다 서너 정거장 앞서 버스를 는지는 몰라도,  버스의 맨 끝 좌측 통로 쪽 자리를 마치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양 밉상스럽게 앉아있했었다. 버스로 통학을 시작한 지 두어 주 지나면서 저절로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날마다 같은 교문을 함께 드나들 수밖에 없는, 다름 아닌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후로 등교하는 길에는 늘 선생님이 가방을 들어주었는데, 운이 좋아 중간쯤 가다 먼저 탄 손님이 내리게 되 선생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는 일도 있었다. 뻘쭘해서 꼿꼿이 앞만 보고 앉아 있으면 선생님이 보고 있던 신문을 슬며시 건네주기도 했는데, 한국일보에서 자매지로 발간하던 스포츠 연예 전문지인 '일간 스포츠'였다. 사실, 버스를 타기 전 정거장 앞 가판대에 진열해 둔 신문에서, 전날 있었던 경기의 대문짝만 한 사진과 굵은 활자인쇄된 타이틀을 미리 눈여겨보아 두었 터라, 자세한 기사 내용이 무척 궁금했었다.


당시, 국민의 이목을 끌던 스포츠는 누가 뭐래도 김일 선수가 흥행을 주도하던 프로레슬링과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를 배출한 프로권투였다. 그땐, 동양 챔피언만 되더라도 전 국민의 주목을 받았는데, 홍수환, 유제두 등이 이후 잇따라 세계 챔피언이 되어 한국 프로 권투의 화려한 계보를 잇게 된다. 또한, 고등학교 야구의 인기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신문사가 주관하는 전국대회는 도합 네 개로, 중앙일보의 대통령기, 조선일보의 청룡기,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 한국일보의 봉황대기가 바로 그것들인데, 대회가 열릴 때면 출신 지역 고교를 중심으로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무렵 난  막 사춘기(思春期)에 접어들던 시기였으므로, 스포츠 기사와 함께 실린 연예계 소식과 매일 연재되는 고우영의 만화나 김성종의 추리 소설 속에는 약간의 선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어느 날부턴가 한 회라도 놓치면 하루 종일 안절부절이었다. 고우영은 일간 스포츠를 통해 '삼국지''열국지', '금병매'와 같은 중국 고전과 '임꺽정' '일지매' 등을 만화로 연재했고, 김성종은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나 '제5열(第五列)'과 같은 하드 보일드 추리소설 잇달아 연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재학했던 대구중학교는 야구 명문으로, 대구상고 선수로서 고교야구를 주름잡던 불세출의 타격 천재 장효조가 중학교 5년 선배였고, 1년 선배로 이후 대구상고로 진학해 고교 야구를 주름잡은 이만수와, 삼성에서 각각 투타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양일환과 홍승규가 나와 동기로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어쩌면, 일찌감치 스포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이런 환경 탓이긴 했지만, 버스 속에서 일간 스포츠를 통해 만난 각종 스포츠와 연예 관련기사가 이후 신문에 푹 빠지도록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기억대충 떠올린다 하더라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여러 차례 수위타자에 오르며 역대 최다 안타로 활약했던 레전드 장훈과 국내파로 일본으로 건너가 타율 1위에 등극했던 백인천, 농구의 전설적인 슈터 신동파, 일본 프로레슬링의 태두(泰斗) 역도산과 그의 제자인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사이의 치열했던 경쟁 관계, 실전 무예로 세계 각지를 돌며 강자들의 무릎을 꿇렸던 최배달에 관한 일화가 아직도 강렬하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일보가 해마다 개최하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연극배우 추송웅의 1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에 관한 기사도 인상 깊었지만, 성적(性的)인 묘사가 적나라한 김성종의 소설과 여체의 곡선을 유려(流麗)하게 살린 고우영의 만화 전반을 두루 관통하고 있는 성적인 농(弄)은 사춘기 소년의 연분홍 마음을 도화(桃花) 빛으로 붉게 물들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전근을 갔는지 이사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학년이 되어서부턴 등굣길 버스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사실은, 이미 그 이전부터 버스에 오를 때마다 동네 서점에서 산 일간 스포츠가 내 손에 들려 있었고, 이는 학교 수업시간 중에 선생님 눈을 피해 몰래 신문을  감춰 보는 스릴을 맛보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변화는, 하굣길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동네 서점의 문턱을 넘나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문을 통해 글을 읽는 재미가, 말하자면, 문학의 세계로 나를 이끈 길잡이 역할을  셈인데, 서가(書架)에 장르별로 일목요연하게 분류되어 있는 신간과 간행물을 통해 당대(當代)의 인기 작가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이름을 알린 최인호와 '겨울여자'의 조해일, '인간시장'과 '꼬방동네 사람들'의 김홍신,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이문열, '무기의 그늘'의 황석영,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여러 중단편을 발표한 박범신 등이 당시 내 눈을 홀렸으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이들이 쓴 책이 한 권, 두 권 다락방에 쌓일 때마다 마치 곳간에 곡식이 차 듯 늘 마음 한쪽이 뿌듯하고 넉넉했다.


학년이 높아지고, 이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부터는 국어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 작가의 문학 작품들도 관심을 끌었는데 소설 쪽으로는 이광수와 김동인, 김유정, 김동리와 황순원 등이 쓴 소설과 이들의 전집(全集)을, 시인으로는 이상과 서정주,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과 유치환, 박인환 등의 시선(詩選集)김현승이 쓴 '현대시 해설' 등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으로 책을 살 수밖에 없는 궁색(窮塞)한 주머니 사정이었지만, 당시 중고등 학생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진 삼중당 문고의 문학, 소설 시리즈는 신간이 발간될 때마다 남보다 먼저 사서 보도록 경쟁심을 부추겼고, 결국 나로 하여금 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서점을 드나들도록 만들었다. 시리즈 가운데는 오헨리의 단편 걸작선과 같이 해외 작가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어학 실력과는 무관하게 이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동네 서점은 주인이 한번 바꾸고 난 이후부터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줄곧 운영했었던 것 같다. 주로 문학 작품 위주로 서점을 꾸려가던 이전 주인과는 달리, 이들 부부는 신간이 들어오는 대로 장르별로 분류한 서가로 책을 다양하게 불려 가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전문 서적이나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유망(有望)한 신인의 처녀 시집, 월간조선이나 신동아, 부부생활, 샘터와 같은 월간지, 선데이서울로 대표되는 주간지와 TIME이나 Reader's Digest 같은 영어 간행물, 이후로 종류가 더욱 많아진 각종 스포츠 신문들을 서점 앞 진열대에 널찍이 진열해 두어 서점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았다.


그런데, 동네 서점은 어릴 적엔 여동생들의 원성(怨聲)크게 산 곳이기도 하다. 나이 차가 제법 났기에 어린 여동생들이 공휴일이나 일요일 아침이면 오빠의 지엄(至嚴)한 신문 심부름을 군말 없이 도맡아 해야 했는데, 초등학생의 어린아이가 일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대학생 오빠의 심부름으로 어쩔 수없이 꽤 먼 바깥나들이를 해야 했으니 그 얼마나 철부지 한 오빠에 한량(限量) 없이 속 넓은 동생들이 아니던가!


대학에 다닐 적엔 장래 희망으로 동네 서점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취향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골라 읽도록 하면서 서점을 단골로 드나드는 학생들에게는 독서할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시간을 내어 짧은 시간 짬짬이 무료로 영어공부와 관련된 궁금증까지 해결해 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영업면에서 어떤 다란 비전을 갖고 그런 생각을 다기보다는, 서점의 문턱을 더욱 낮춤으로써 주 독서층이랄 수 있는 중고등 학생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을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해 주려는 바람이 컸었다. 물론 그 무렵은, 대학 진학을 위해 야간 자율학습과 같이 학생들을 과도한 경쟁이나 오로지 공부로만 내몰지 않고서도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낭만적인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넘쳐났던 것이다.


이제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서점이 없다. 언젠가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치마지막으로 본 동네 서점은, 그새 주인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의 학습을 위한 준비물이나 부교재, 각종 문구류를 판매하는 문방구에 오히려 가까웠다. 사실, 점이란 간판을 달고 여느 동네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명목상의 서점과 판박이였는데, 이런 서점마저도 인터넷을 통한 도서(圖書)와 부교재의 유통이 활성화됨으로써 하나 동네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다. 말하자면, 묵은 종이 냄새를 폴폴 풍기며 세상을 살아가는 온갖 지혜와 이야기를 가득 담아 우리의 오감(五感)을 즐겁게 했던  동네 서점 소중한 보물들이 더 이상 들어설 자리 없이 영영 사라지고만 것이다.


최근엔 가본 적은 없지만 3년 가까이 이어오던 재개발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로(迷路) 같은 골목길로 얽혀 있던 변두리 동네에 불과했던 곳이 이젠 천지개벽을 해서 명품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섰으니, 아마 상가(商街) 한쪽에 근사한 서점 하나쯤은 기꺼이 자리를 잡을 것으로 믿는다.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지만, 서점 문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넘나들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소중히 넘겨가며 추억을 쌓고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찬 공간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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