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만큼밖에 못 썼다니
나는 글을 쓰고 싶을 때와 쓰고 싶지 않을 때가 명확하게 갈린다.
그 기분은 명확하게 갈리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언제 내가 글을 쓰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른다. 아, 다른 훌륭한 작가님들의 글을 읽을 때 '나도 이렇게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기에 그 시기를 한정하기가 어렵다. 정말 뜬금없이 머릿속에서 '오, OO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대개 글을 쓰게 되는 거 같은데,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 그 여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생각이 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쓰게 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글을 쓰고 싶을 때는 하루 종일 이런 글을 써볼까, 저런 글을 써볼까 고민하다가 주제 하나를 잡고 진득하게 쓰기 시작한다. 의욕이 넘칠 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계속 키보드를 누른다. 계속 키보드를 누른다고 해서 굉장한 문장력을 자랑하는 명문을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쓰기 실력은 둘째 치고,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하는 기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 이유인즉슨, 내가 평소에 글을 쓸 때 하는 걱정 중 약 70%는 분량에 관한 걱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평소에 책을 쓸 때나, 블로그에 시덥지 않은 글을 쓸 때도 나는 분량 걱정을 한다. 글을 쓰자고 마음먹을 때는 '그래, 오늘 블로그에는 스크롤이 잘 내려갈만한 분량의 글을 써봐야지. 나한테도 그렇고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도 그렇고 적당히 분량이 있는 글이 재미있을 거야.'라고 다짐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었던 내용을 다 썼다 싶어 글자 수를 조회해보면, 내 기대와는 어긋난 글자 수가 나타난다. 분명 5천 자는 쓰자고 마음먹었는데 겨우 2~3천 자에 머물러있다. 묘사가 덜되었나? 좀 더 신박한 표현을 써야 하나?라고 아주 잠깐 생각하지만 굳이 분량 때문에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분량이 뭐라고. 분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읽는 사람이 재미있는 게 중요한 거 아냐? 아, 그런데 분량도 적고 재미도 없다면.................
그래도 블로그는 그나마, 아니 아주 많이 낫다. 맞춤법이나 문장력 같은 스트레스를 덜어두고 나 혼자 자유롭게 글을 쓰는 공간이니 압박이 크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 이 블로그 글의 분량을 신경 쓰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으리라 장담한다. 그러니 창피할 것도, 괜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는 거니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가 돈벌이가 되는 한글 파일 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책을 쓸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제삼자가 돈을 주고 사볼 정도로 이 글이 재미있는가, 두 번째, 제삼자가 돈을 주고 사볼 정도로 이 글이 감동적인가, 세 번째, 제삼자가 돈을 주고 사볼 정도로 알찬 정보가 담겨있는가. 내 돈이 소중하듯 제삼자의 돈도 소중하기에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아니면 곤란하다. 지인이나 가족 같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만 칭찬받고 나누고 싶은 책을 써선 곤란하다. 그런 책은 혼자 100부 정도 찍어내서 간직하는 것으로 족하며, 분량의 압박도 하등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출판사를 통해 내는 책은 다르다. 출판사는 쌩판 모르는 나를 위해 최소 몇 백만 원의 자본을 투자해서 책을 낸다. 그러므로 나는 출판사에게 몇 백만 원 이상의 이익을 안겨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여태까지 내가 과연 그랬을까는 모르겠다) 그러니 제대로 된 책을 써내야 한다. 물론 위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직접 그런 글을 써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내 책을 읽고 '돈을 주고 사볼 정도로 재미도 감동도 정보도 없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재미와 감동은 주관적인 요소라고 여기서는 자기 합리화하며 방어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간사한 존재입니다.
어쨌든 다시 분량 이야기로 되돌아가자면, 저 세 가지를 유념하며 열심히 글을 쓴다고 해도 퀄리티가 나올 거라고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분량마저도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 분량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 나는 어젯밤에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에세이가 아닌 내 잡담이 적힌 이상한 팸플릿이 나올지도 몰라......"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두께가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팸플릿이 아닌 책이 되기 위해서는 손에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분량이 필수다. 세상에는 7만 자짜리 책도 있고, 4만 자짜리 책도 있지만, 책이 되기에 안정적인 글자 수는 약 10만 자다. 그리고 내 에세이.hwp 파일의 글자 수는 6만 자에 머물러 있다. 흑흑. 물론 퇴고와 퇴고와 퇴고를 거듭하면서 분량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 머릿속에서는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자꾸 맴돈다.
더 이상 원고에 쓸 얘기가 없어서 분량이 부족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단 쓸 얘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책으로 박제해도 괜찮은 이야기인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거르고 걸러 내다 보면 책에 남길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박제해도 괜찮은 이야기라고 해도 재미없는 글, 내 개인적인 감상만을 적은 글 등도 아웃시키다 보면 살아남는 놈들이 적다. 그렇게 원고를 정리하고 있으면 어쩌다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글을 쓰게 되었나, 도대체 책에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것인가, 내가 어쩌다가 글쓰기에 이렇게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나,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작가가 되어도 좋은가?라는 현타도 종종 온다. 그나마 이런 현타들은 '여태까지 쓴 글이 아까우니 그냥 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대부분 수습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마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누군가는 눈치챘겠지. 맞다. 오늘은 어쩐지 필이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갖고 있던 분량에 대한 고민을 이렇게 차근차근 써보고 있다. 단순히 '분량이 안 나와서 책이 팸플릿이 될까 봐 걱정돼'라는 한 줄의 걱정만으로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을 쓸 수 있다니. 역시 필 받을 때 액셀을 밟아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렇게 길게 써도 이 글이 3천 자 밖에 안 된다는 점에는 놀랐다. 역시 분량은 내 기대를 충족시키는 법이 없다. 언젠가 수련을 하면 만족스러운 분량을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잘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분량 때문에 걱정할 팔자라면, 차라리 책이 팸플릿이 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나쁜 일인가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