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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린 Jan 23. 2021

이런 건 진짜 번역이 아니야

전단지 번역이 뭐가 어때서

<프리랜서 번역가 수업>을 펴낸 뒤, 가끔 번역에 대한 상담 메일을 받는다. 그리고 그 메일들에는 종종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     


“제가 그냥 알바로 OO 번역을 한번 해보긴 했는데 정식으로 번역을 해본 적은 없고요...”

“그냥 한번 팸플릿 번역해달라길래 몇 천 원 받고 한 번 한적은 있어요...”

“전단지 같은 거 번역해달라는 일만 해요, 진짜 번역을 해보고 싶어요.”     


 왜 다들 그리 자신들이 한 번역을 낮추는지. 알바로 번역을 한 것도 번역이고, 팸플릿 1장도 돈을 받았다면 번역이다. 국제단체에서 진행하는 번역 봉사에 참여한 것도 ‘번역’ 봉사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은 했지만 당장 번역일이 없어 이 회사 저 회사 면접만 보다가 결국엔 집에서 타이핑 알바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간간이 이런저런 번역을 했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이런저런 번역은, 정말 말 그대로 이런저런 번역이었다. 3줄짜리 번역부터 시작해서 글자 추출도 되지 않는 해상도 나쁜 이미지 파일 한두 장을 번역해달라는 의뢰도 종종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의뢰는 카레 번역이었다.


 카레 번역이라고 하면 좀처럼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마트에서 구매하는 OO 카레를 떠올려보아라. 바로 그것이다. 카레 가루가 담겨있는 봉지의 앞뒷면에 쓰여있는 일본어를 번역해달라는 의뢰였다. 단 한 장 짜리 의뢰였는데, 글자 추출은 전혀 되어있지 않아 내가 알아서 글자를 추출한 뒤, 열심히 번역하고 돈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카레 봉지 번역뿐일까? A 회사가 프리랜서 B에게 전하는 이메일 번역도 했고, 핸드폰으로 서류를 사진 찍어 의뢰하는 증명서 번역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읽기도 힘든 글자를 번역하는 게 아닌, 한 건당 몇천 원에 끝나는 번역이 아닌, 몇 천자, 몇 만자를 글자당으로 쳐주는 번역을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멋지게 CAT Tool(번역 지원 프로그램)을 쓰면서 추출된 글자만 번역하면 되는 큰 프로젝트를 번역하고 싶었다. 이런 건 너무 작은 번역이라고, 용돈 벌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일은 역시 모르는 법이다. 희한하게도 그때 그 번역들은 나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내주는 사진이나 이미지 파일로 번역 의뢰가 오면, 어떻게든 글씨를 잘 추출해내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댔다. 그 결과, 원본 이미지의 해상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지금은 나름 여러 가지 글자 추출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글자가 추출되지 않는 이미지나 PDF 파일은 어떻게 번역하는 게 일처리가 더 빠른 지도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때 한 땀 한 땀 고생스럽게 했던 번역 일들은 나의 경력들이 되어주었고, 경력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이 업계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난 아직도 포장상자의 앞뒷면에 쓰여있는 글씨들을 번역한다. 물론 지금은 번역할 텍스트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파일로 보내주는 업체들하고만 일하고 있지만, 번역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느 날 만약, 기존 업체들이 텍스트 추출을 미처 못했다면서 내게 이미지 파일 그대로 번역을 의뢰한다고 해도 나는 별 거리낄 것 없이 승낙할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하고 싶다. ‘누가 부탁해서’, ‘그냥 어쩌다가’ 한 의뢰라며 자신이 한 일을 작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전문 번역가나 프로들이 많을 테니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기 부끄러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프로들과 경쟁하며 프리랜서가 되어 일감을 따내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당신은 프로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당신은 초보군요’하면서 초보 프리랜서를 양해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누군가와 같은 목표를 두고 경쟁할 때는 앞으로 더 나아가 분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미리 앞서서 자신이 한 일은 별일이 아니며, 그냥 어쩌다 한 일이었다고 겸손을 떨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저 사실대로 경력을 적어내면 그 후에는 클라이언트가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아무리 겸손이 미덕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겸손만 고집하다간 제 몫을 찾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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