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라디오
오프닝
혹시 좋아하는 향기가 있나요?
아니면 기억나는 향기가 있을까요?
사람은 오감으로 기억하는 건 잘 잊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향기하나로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소환될 때가 있습니다.
음악
-장범준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42) [멜로가 체질 OST Part 3] 장범준 (Beom June Jang) -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MV - YouTube
사연
“자기야, 린스에서 박카스 냄새가 나.”
이 말을 하면서 저의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5살인가 6살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외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시골이다 보니 서울에 사는 엄마로서는 가까운 큰 오빠네를 친정으로 생각하시면서
저를 데리고 자주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외삼촌댁에 가실 때는 엄마는 꼭 파란 박스의 박카스나 델몬트 주스를 번갈아가면서 사서 들고 가셨습니다.
저는 집에서도 평소에도 잘 마시지 못하는 주스를 사가지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했지만
개인 용달하시는 외삼촌 생각하면 박카스를 사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씀에 두 번에 한 번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박카스였습니다. 파란 박스에 정직한 글씨체로 '박카스'라고 크게 적혀 있었는데 주스를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왜 이런 게 있나 싶어 하면서 가자미눈으로 노려보면 외삼촌댁으로 갔습니다.
외삼촌댁에 가면 4살 터울의 사촌 언니랑 노는 게 좋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온갖 종류의 장난감들이 있어서 외삼촌댁에 가자고 제가 많이 졸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언니는 없고 외숙모만 계셨습니다.
언니가 없어서 언니 물건으로는 혼자 놀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엄마 옆에서 딱 붙어 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엄마가 사 온 박카스 두병을 꺼내시면서 본인과 엄마의 앞에 놓아두시고 대화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한참을 이야기를 하시다 엄마가 목이 마르셨는지 박카스의 뚜껑을 땄습니다. 뚜껑이 열리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상큼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엄마가 따 놓은 뚜껑에는 노란색이 묻어있었습니다.
노란색에 오줌이 연상되면서 이 시큼한 냄새가 오줌냄새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엄마와 외숙모는 한 모금씩 드시면서 시원하고 좋다는 말씀을 같이 하셨습니다.
그게 신기했습니다. 어른들은 저런 오줌 같은 게 맛있을까?
“OO 이는 박카스 카페인 있으니깐 못 마시지? 한번 맛만 볼래?”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엄마는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뚜껑에다 반만 따라 마셔봐.”라는 외숙모의 말씀과 행동에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박카스의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색으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냄새가 강렬해서 혀로 살짝 찍어 맛을 봤습니다.
와우!!!!!!!!!!!!!!!!
오줌맛이 날줄 알았는데 왜 이게 맛있지? 너무 맛있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뚜껑의 반이 담겨 있는 박카스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곧 후회했습니다.
이 맛있는 걸 한 번에 마셔버렸다는 상황에 속이 상했습니다.
마시고 배시시 웃는 저를 보더니 외숙모께서 애들은 많이 마시면 안 돼, 그러시면서 아까처럼 뚜껑에 반을 따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아껴 마시겠다고 다짐을 하고, 혀로 한 방울씩 음미했습니다.
그렇게 박카스 뚜껑에 담겨 있는 5mm도 되지 않은 양을 가지고 3시간가량 장난감 하나 없이
혼자서 잘 놀았습니다.
사촌 언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숙모네 집에서 있었던 시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엄마손을 잡고 외숙모댁을 나오면서 다음번에 올 때는 엄마가 또 박카스를 사가지고 와서 이걸 맛보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날 밤, 평소 저녁을 먹고 바로 자는 저는 잠은 안 자고, 엄마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고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11시가 넘었는데 왜 안 자냐?”라고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그 시각이 11시가 넘었다는 걸로 기억합니다.
카페인이 그제야 반응을 했나 봅니다. 잠은 안 오고 심장을 빠르게 뛰고.
엄마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누워서 제 가슴을 토닥토닥 쳐 주셨습니다.
누워 있어도 잠은 오지 않았지만 일어나면 아빠한테 혼날 거 같아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깜깜한 밤에 엄마 손을 꼭 잡고 한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괘종시계가 2번 울리는 거까지 들었던 기억이 있었으니 새벽 2시가 넘어서 잠들었던 같습니다.
지금은 카페인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커피를 달고 살지만 때 묻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린스향으로 소환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
-테이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42) 테이 -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유희열의 스케치북/You Heeyeol’s Sketchbook] | KBS 210903 방송 - YouTube
클로징
하나의 매개체가 좋은 기억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신기한 밤입니다.
작은 추억들이 모여 웃을 수 있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오늘도 수고 많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행복을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