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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Mar 24. 2021

마흔의 딜레마

여보, 딴짓 좀 하겠소_12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삽니다. 
 결정되지 않은 삶을, 하루씩 살아가는 
 중입니다. 마음이 가는데, 몸도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도 아주 괜찮다고 
 자신을 응원하면서. 
 
 - 윤서원의《그렇게 길은 항상 있다》중에서 –



변신을 꿈꾸는 당신에게.


여보. 당신은 가끔씩 아들이 두 명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를 듣지 않나? 나는 새로운 사람이나 모임에서 아들이 둘이라고 하면 ‘힘들겠어요’, 혹은’ 어떻게 키우냐’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당신이 ‘아들 셋(?)’을 키우느라 힘들겠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해. 큰 아이 키울 때는 유치원, 놀이동산을 포함해서 초등학교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유적지나 관광지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 첫 아이인 관계로 무척 신경을 쓰면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키웠던 것 같아. 그래서 둘째를 키울 때는 아들이고 동성이라서 5년 전에 겪은 것을 반복하면 될 줄 알았던 거지. 한결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힘든 것은 첫째와 다른 둘째인 것 같아. 둘째가 중 3을 지나면서 겪는 것은 달랐잖아. 아직은 어른도 아니고 학생이라 마냥 어린아이 대우를 해주면 발끈해서 자기도 컸다고 하면서 말이야. 하긴 자기 아빠보다 키가 더 커서(물론 나도 큰 편은 아니지만 170cm) 어른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그 후로 어른 대접이나 대우를 해주면 아직은 어른이 아니니 청소년 대우를 해달라고 한단 말이지. 자기 편한 대로 어른이 되었다가도 청소년으로 돌아가는 둘째의 변신은 마치 카멜레온과도 같다고 할 수 있어. 자기가 편한 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 말이야. 그런 둘째 녀석을 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중간자(청소년기) 입장, 변화의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이 확실해.


여보, 우리 둘째 모습을 보고 나도 그다지 둘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아니 나도 변화 중심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아. 나이가 마흔이 넘게 되면서 청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잖아. 보통 나이로 구분하면 일반적으로 40대는 어중간한 나이임에는 틀림없어. 청년으로 보기에는 약간 나이가 있는 것 같아 같은 편으로 취급하지 않고, 중년이나 나이 든 사람 입장에서는 40대는 아직도 젊거나 철딱서니 없는 한창나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러다 보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서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은 것 같아. 이제는 60세가 넘으신 분들도 ‘꽃중년’으로 접어들어 자신을 가꾸면서 살기 때문에 40대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은 것 같아. 회사에서도 회식 때 노래방을 가게 되면 부르는 노래가 확실히 장르가 틀리잖아. 젊은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는 처음 듣거나 가수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많지. 그들의 레퍼토리도 수시로 달라지는 것 같아. 우리들이 알아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래된 노래나 최근의 엄청 유명한 노래 정도이지. 아마도 이런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 같아. 젊은 친구들을 ‘따라잡기’를 하려고 노래를 듣거나 유행을 따라 하려면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가사를 외우기도 그렇고 노랫말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야. 거기에 이제는 몸도 따라주지 않더라고. 더군다나 우리들의 기억력도 우리의 행동을 느리게 하고 잠시 그 자리에 멈추게 하는 것 같아.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도 하려고 했던 것을 잊고 멍할 때가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했어.




이런 경험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시사나 사회문제로 접근하다 보면 젊은 친구들은 40대를 ‘아저씨’ 세대로 부르며 기성세대 취급하면서 우리 40대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굴레를 씌우지. 그러다 보니 우리 40대는 어중간한 청소년처럼 청년과 노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어정쩡한 시대를 살게 되는 것 같아. 우리도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는 나이인데 말이야.


여보, 우리는 오직 직장에서만 자리 값, 몸 값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과 오래되지 않은 후배 사원들에게 일을 알려주고 상사들과의 지시사항과 업무목표를 원활하게 연결해주고 부서의 목표를 완수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잖아. 주로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는 역할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하고 실제로 회사에서도 이런 역할을 요구하잖아. 이런 분야에서만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 분야에서만 존재의 가치를 찾게 되는지 모르겠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아.  우리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과 우리가 낳고 키우는 아이들 사이에서 양쪽의 중간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잖아. 실제로 어버이날과 어린이 날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정작 어버이날에는 흔한 카네이션을 받기도 좀 쑥스러운 나이인 것 같아. 우리들도 실제로 카네이션을 달기에는 젊다고 생각하잖아. 어렸을 때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지. 20살 넘어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빨리 돈을 벌고 싶었지. 어느새 마흔이 넘어서는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잖아.  자기 나이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20대는 시속 20km, 30대는 30km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40대는 40km의 속도로 달리는 자가용에 탄 것처럼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


운전하시는 분들은 느끼겠지만 20-30km의 속도는 운전한다는 느낌이 없잖아. 너무 속도가 안 나는 것 같잖아. 하지만 40km 이상의 속도는 서서히 속도를 느낄 수 있지. 40대는 40km 속도로 달릴 때 삶의 방향을 다시금 전환해야 할 때인 것 같아. 60-70km로 달릴 때보다는 멈춰 서기도 쉽고 방향 전환도 쉽잖아. 방향을 바꾸려고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 삶의 속도를 바꿀 수 있잖아. 이제 40대 만의 문화도 필요하다고 너무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아. 40 대란 중간 다리가 없으면, 40대의 힘찬 엔진 동력이 없으면 모든 것, 남은 삶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말이야.




여보, 가장 먼저 우리 가정에서 그러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 같아. 부모님과 아이 세대를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자리로 부모님을 모시는 것에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도 부모로서의 대접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요즘 아이들에게도 우리의 존재 가치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어. 내가 두 아들에게 어버이날이나 당신과 내 생일 때 여분의 용돈을 더 주는 것에도 이유가 있어. 여분의 용돈으로 그때에 맞도록 선물을 사라는 말이지. 아이들이게 커 갈수록 부모의 결혼기념일, 생일, 어버이날은 그냥 지나치지 말도록 얼마 전부터 은근히 알려주면서 부담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야.


다음은 사회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일정하게 투자하자는 거야. 매달 사회 트렌드를 쫓아가고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 매달 일정액을 당신과 나를 위해 투자하자는 거야. 더욱 새로운 것에 눈을 떠야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우리 나이에 정말로 변화와 새로움을 주어야 해. 조금씩 세월의 연륜이 늘어갈 때 신선한 자극과 새로움에 눈을 뜨고 새로움을 찾자는 거야. 그것이 삶의 활력소와 포인트로 우리가 지치지 않은 요소가 될 것 같아.


여보, 아직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상황을 바꾸고 적응해나가는 마흔의 딜레마에서 ‘마흔의 기회’로 바꾸어 보자. 딜레마나 위기가 아닌 찬스로 만들어 나가자. 어느 쪽에 속해서 못 논다고 하면 우리만의 40-50 문화를 따로 만드는 것은 어때? 아직도 사회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 중심에서 관심을 못 받고 있잖아.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가장 빛나는 중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다시 돌아봐야 해. 우리의 가치가 얼만큼인지 말이야. 어느 편을 쫓아가지 말고 우리 나이 또래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좀 더 재미있고 살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우리 인생이 앞으로 더욱 재미있어지려면 말이야.

 이런 것이 ‘마흔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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