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31.
너는 계획이 다 있었다.
“저 비혼주의자예요.” 이렇게 말하면 대개 반응은 뻔하다. “그렇게 말하는 애가 제일 일찍 가더라.”
가치관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더러운 곳에선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꼈다. 자고 일어나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길 기도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세상 그 어느 곳보다 가치관의 묵살, 생각의 단일화를 몸소 실천하는 조선시대에 오게 되었다. 여기가 어딘지 정신을 채 못 차리던 찰나, 이상한 서양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화책에서만 보던 봄을 닮아 더없이 아리따운 춘향이를 만났다.
“뭐. 왜.”
그 춘향이가 이 춘향인 게 맞는 걸까. 꾀죄죄한 차림으로 산발을 한 춘향이는 동화 속 상냥한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전혀 기죽지 않았다. 꿈이라고 생각해서 대담해진 걸까, 아님 옥생활이 그새 심심해진 걸까. 처음 보는 춘향이에게 저세상에서 나눈 직장 동료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말해주며 화풀이를 했다. 아니, 사람이 결혼 좀 안 하고 혼자 살겠다고 하니까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고. 이게 말이 되냐고. 내 하소연을 계속 듣던 춘향이가 이윽고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다들 짱나게.”
너 몽룡이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니? 내 질문에 춘향이는 어떻게 알았냐며 잠시 놀랐다가, 금세 무뚝뚝한 얼굴로 그건 자신의 야망을 위한 계획이었다고 실토했다.
사실 춘향이는 매우 머리가 비상하고 다독을 즐겨하였다. 심지어 출세에 대한 열망도 커서 과거시험은 못 치더라도 상궁이나 의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상 공부는 커녕 책 한 권 사서 읽기도 어려웠는데, 그때 마침 춘향이 앞에 몽룡이가 선물처럼 나타난 거다. 조금 다른 형태로.
담벼락을 지나던 춘향이는 동네 제일가는 부잣집 도련님인 몽룡이가 동성과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길로 몽룡이에게 달려가 자신과 위장결혼을 해주면, 네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던 절대 들키는 일 없도록 해줄 터이니 나의 야망과 명예욕만 충족시켜달라는 거래를 한 것이다. 몽룡이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선 장원급제를 하러 한양으로 떠났다. 물론 그사이에 노총각 사또가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왜 너는 나를 안 좋아해 주냐며 냅다 춘향이를 옥에 가둬버리는 건 그녀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춘향이에게 이런 엄청난 비밀을 나에게 말해줘도 되는 거냐고 짐짓 감동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춘향이는 벚꽃을 닮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거 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