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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링주역 Apr 11. 2021

코로나의 단면과 진화의 역설
-시지프스냐 프로메테우스냐

<주역 세계관7> '내 안'에서 자라는 다양성 '저멀리'서 자라는 획일성

©Saeed Sadeghi_Sisyphus-2_2020

그리스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신들로부터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곧장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고역이었다. 신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성과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노동이었까? 

일종의 '희망고문'인 셈이다. 







동전점을 쳐 '수뢰둔'괘를 얻었다. (아래서부터) 1ㅡ3ㅡ5 세 개의 변효. '지산겸'괘로.           

이럴 경우, '둔'괘를 본괘라 하고, '겸'괘를 지괘라 한다. 易은 '변화'라 했다. 머물러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에 각자가 처한 한 '점點'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 '점'이 과거 어디서 왔고 '미래'에 어떨게 흘러갈 것인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대된 시야로 조망하는 것이다. 앞 글에서 본 『주역周易』에 내재된 여러가지 사유 방법을 동원하여. 

①포착의 예리함 ②조망의 폭과 너비 ③사유의 다양함과 깊이. 이 세 가지가 '역을 하는 사람'의 내공을 드러내는 핵심 요소이고, 동시에 역을 통해 생각의 크기와 깊이를 키워가려는 각자가 익혀야 할 포인트일 것이다.     

         


통설은 변효가 3개면 이미 상황이 지괘(여기서는 '겸괘') 국면으로 넘어간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유연하게 적용하면, 어느 국면을 지나는 중인지는 특정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정보량에 따라 각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 점치는 자의 지위에 따라서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인지 혹은 주어진 상황에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입장이나 지위인지에 따라서도.

코로나 국면이 어느덧 1년 넘게 이어진 시점에서 본 이 점占의 결과도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다음 세 가지 국면 중 하나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이미 둔괘 국면을 거쳐, 현재 겸괘 국면이거나

② 현재가 둔괘와 겸괘에 걸쳐있는 상황, 과도기거나

③ 아직은 둔괘 국면, 이 혼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름. 다만, 언젠가 도래할 '종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와 할 일을 말함이거나.


그런데, 좀 더 디테일하게 보는 방법으로 '내 맘대로-선무당 방식'이 있다.

보통 세 개의 효가 변하면 효사는 보지 않고 괘사로만 점을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나는 이 경우에도 각각의 변효를 역할과 지위의 추이뿐만 아니라 시간적 추이로도 파악해서 국면의 진행과정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방식은 사실, 신지영감님도 몰래 나 혼자 실험 중인 방식인데, 지금까지는 상당한 확률로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나는 사실 '고전' 해석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위의 다양한 갈래도 내노라하는 어르신들의 입장을 종합한 것이니 본인 취향대로 하나 고르면 된다. 


앞 글에서 『주역周易』은 인간계의 실험과 도전 정신이 축적된 사유의 결과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해서 내게도『주역周易』은 '도그마' 같은 경전이 아니라 문명의 선각자들처럼 끊임없이 반박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업그레이드해 가야할 대상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만의 방식을 계속 개발하며 연습하고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나는 시지프스로 살다 죽기보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쥐어 주기라도 한 프로메테우스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어려운 점법을 안 쓰고 간단하게 동전으로만 점괘를 얻는 까닭은 우연과 돌발이 난무해서 귀신이 개입할 개연성이 높은 단순하고 비몽사몽한 상태를 노린 것이다. 어차피 역易은 귀신이 돕는 장르로 출발했던 것이라니 그 귀신이 아직도 살아 작동 중인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도 해볼 겸. 

그러니, 실전 점占을 통해 괘·효사의 내용을 더 선명하게 확인하고 실험하고자 하는 나의 학습 방식도, 미신에 허우적된다 비난하기 보다 딴에는 불을 훔치기 위해 시시탐탐 신계를 염탐 중인 프로메테우스적 실천이라고 봐주기 바란다. 다만, 뭔가 좀 확실해질 때까지는 신지영감한테는 쉿~!


암튼 그렇게 본다면, <코로나>에 대해 물은 시기는 둔괘의 괘사-1-3 -5효사에서 겸괘의 괘사-1-3-5효사까지 8가지 경우의 수 중 어딘가로 낙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할 일은 이 복잡하고 다양한 국면과 단계들의 의미를 <코로나> 상황에 비춰 구획정리 해보는 것이다. 『주역周易』이 쌓아온 인간 정신 문명의 다양한 결과물들을 가지고. 그런데 그 전에 짚어볼 것이 있다. 

<코로나>는 대체 무엇이길래 '혼돈'을 의미하는 <수뢰 둔괘>가 나온 것일까?




1. 과학의 구멍, 기술의 공백


인류에게 가장 큰 공포는 불과 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흑사병을 비롯하여 결핵, 콜레라, 폐렴 등, 한 시기에 수천에서 수십만명이 몰살시키는 전염병의 창궐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전염병과의 인류의 오랜 전쟁이 끝나는 듯 보이는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페니실린의 발견이다. 푸른 곰팡이에서 추출한 최초의 항생제이다. 이 무렵엔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의학분야 뿐만 아니라 전 분야에서 인간의 삶을 바꿔 놓은 수많은 발명과 발견이 이뤄졌다. 

인간은 마침내 자연에 대한 무지로 인한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듯했고, 급기야 자연을 정복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그 후에도 새로운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했지만 우리의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항생제의 발명으로 적들을 거뜬히 퇴치했고, 승리해왔다. 

그러나 코로나는 이 공식을 깨뜨려 버렸다. 1년이 넘도록 과학은 단칼에 코로나를 제압할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로인해 우리는 비단 코로나만이 아니라 그 이후 계속될 더 독한 것들의 공습에 속수무책 당하게 될지도 모를 미래로 인해서 더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자연'은 쉼없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능동적인 의지도 없는 '자원'에 불과한 약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편리함이란 이름으로 콘크리트 마감하듯 단정하게 우리 삶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 그 긴 오랜 세월 동안 말이다. 원전폭발로 폐허가 되었던 죽음의 땅 체르노빌을 10년도 채 안돼 생명의 땅, 거대한 숲으로 복원하듯 그렇게 다시는 인간에게 완패하지 않을 반격을 준비했을 터였다. 물론 자연의 입장에선 무심하게 자기 할 일을 성실히 행한 결과에 불과할 테지만.

이번 전선에서 코로나의 후방에서 버팀목으로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대자연의 세계의 운행 법칙'일 것이다. 잠시 온전히 점령한 줄 알았던 그 영토에 실종된 줄 알았던 실소유주가 살아 돌아와 경고장을 날렸다. '점유지를 반환하라!'고. 점유의 시간이 길어져 소유지인 줄 착각했던 시간의 길이만큼 상대편은 더 강해져서 돌아왔고, 인간과의 전선에 더 독한 전사들을 투입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렇게 인간의 약탈과 방어에 사실은 언제나 더 진화된 재앙으로 응전해왔던 자연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그 동안 얼마나 성장했을까? 강해졌을까? 앞으로도 코로나처럼 '푸른 곰팡이'를 발견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며 우리를 몰아부치는 공격수를 투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다시 신을 향해 경배하며 구원을 갈구해야 할까? 미지의 것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여 범신에게 구원을 기도하기라도 해야할까? 아니면 또, 흑사병 때처럼 무지가 만들어 내는 공포심에 빠져 좀비처럼 몰려다니며 억울한 희생양을 만들게 될까?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화 되었고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모습으로.




2. '진보'의 허상, '성장'의 역습


코로나는 '문명 진보'의 뒤안길, 가려지고 은폐됐던 씁쓸한 모습들을 들춰냈다. 뭔가 석연치 않았고 슬그머니 걱정스러웠지만 눈과 귀를 막고 "잘 될거야!"라고 외치며 외면했던 '그 염려들'의 실체를 단번에 눈 앞에 펼쳐 놓았다.한 켠에서의 성장은 필연적인양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다른 한 켠의 희생양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레미 리프킨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 있다."1)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 약자들이 느낀 것은 '하나의 가족'이라는 연대감보다는, 그 연결망조차 끊어 가장 먼저 내동댕이쳐 버린다는 뼈아픈 소외감이었다.


마사 누스바움2)의 말처럼 어떤 차별도, 어떤 편견도, 어떤 혐오도 한 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인간의 뇌가 진화할수록, 정치와 사회가 진보할수록, '인간'이 '인간'을 편가르고, '인간'을 혐오하고, '인간'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 시켜 줄 담론, 레토릭만 진보했을 뿐이다. 그 담론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는 리더십의 포장만 바뀌었을 뿐 대부분의 인간은 여전히 그들의 '통치의 대상'이자 '선동의 대상'이고 '약탈의 대상'이거나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코로나는 그런 엄연한 진실을 그저 대명천지에 드러내 준 것 뿐이다.


자연계가 진화의 길을 개척해가면, 진화한 자연계의 일부인 인간계는 그 성과를 딛고 진보의 길을 탐색한다. 그러나 그 경로는 직선이 아니어서 때론 퇴보의 길을 향하기도 한다. 한 시점의 선택이 결국 '진보의 길'이 될 지, '퇴보의 길'이 될 지 예측하기에 인간의 안목은 무척이나 좁고 한시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집단적인 무의식에 빠져 잘못된 길임에도 '진보의 길', '성장의 길'일 것이라 맹신하며 의심없이 밀어 부치곤 했다. 그러나 막상 가 보니 구세주가 아니라 사기꾼이었고, 알고 보니 옥황선녀가 아니라 장똘뱅이들의 삐끼였다.

'신자유주의-세계화'라는 쌍두마차도 그런 맹목적 확신의 길을 딛고 나아갔다. 그 길에 꽃을 뿌려 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때로는 '국민', 때로는 '세계 시민'이라는 이름에 도취해...

그리고 지금, 코로나로부터 중간 정산서를 받아든 우리는 외디푸스에게 감정이입하며 나아갈 방향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내 눈을 내가 찔렀구나!". 역시 외디푸스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것인가?




3. 다음 바이러스 전쟁에서도 우리는 무사할까?


다행히 이런 무기력함 속에서도 '푸른 곰팡이'처럼 일말의 희망은 돋아났다. 단번에 코로나를 제압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 홍수에 휩쓸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이 오만한 문명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코로나와의 최전선에 페니실린은 없었지만, 대신에 초유의 사태에 대처하느라 초유의 상상력을 발휘한 정부와 환자와 함께 시름하다 죽음에 이르기도 한 의료진이 있었다. 그리고 후방은 정부와 전문가의 정보 공유에 따라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때로는 최전방에 보급병 역할을 하기도 하는 시민들이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진정되기까지 놀란 가슴에 격리지를 이탈하고 사재기를 하는 등 본능적이고 방어적인 질서 교란행위도 있었지만, 충분하게 전문적인 정보와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이내 침착하게 각자의자리를 지켰다.

일단 이번 전투는 안간힘을 써서 대치 전선을 유지한 정도는 해낸 것 같다. 그나마 눈치 빠르고, 차분하게 처신한 시민들의 힘으로. 국가별로 코로나로 인한 위기가 진정되는 순서는 정부와 의료진의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 정도와 그에 대처하는 시민의 침착한 반응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번 전투에서도 우리는 무사할까? 우리에게 선택지는 3개다.

하나는 다시 근대 초입처럼 자연을 완전 정복하는 영광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다. 페니실린 또는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기다려야 한다. ▶ 도대체 언제까지?

두번째는 지금처럼 안간힘으로 버티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무승부로라도 버텨내려면 대 코로나전의 '뜻밖의' 시민들 참전처럼 또 우연적인 무엇인가에 기대야 한다. ▶ 불확실성 그 자체다.

마지막 선택지는 항복까지는 아니어도 '자연'과 협상테이블을 개설하는 것이다.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라는 '자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풀어 우리에게 면역체계를 제공해 줄 동반자이자 불현듯 점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공존의 대상으로 안착시키는 것이다. ▶ 공존을 실험하고 연습해 제2, 제3의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자연계와 인간계의 네고시에이터가 될 무수한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목전에 와 있다. 나는 3번을 선택해야한다고 절박하게 주장한다. 자연계와 인간계에 다리를 놓을 협상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그 과정을 이끌어줄 선배가 있었다. 충돌없이 사람의 길과 자연의 길을 잘 어울어지게 해석해 줄 오랜 선배.




4. 알을 깨고 아브락삭스에게로 날아가는 데미안의 새처럼


아직도 여전하긴 하지만, 불과 몇 해전만에도 '다양성'이란 사회적 담론 테이블 위에 오를 꿈조차 꾸지 못했고 지금 '획일성'이라는 말로 비판에 직면하는 많은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그 획일성은 이웃 나라 어디들처럼 '국수주의'적이지 조차 못한 채 해바라기 마냥 남의 나라의 떡이 당연히 더 훌륭하고, 더 세련돼 보이는 사대적 편향성이었다. 태고적이 아니고 불과 싸이니, BTS니, 기생충이니, 미나리니... 등이 아직 세상 빛을 보기 전에 말이다.


그 무렵 우리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척도는 '미쿡 유학파+α(유럽의 일부, 그러나 영향력은 미미한)'가 배워오고 전파하는 지식과 문화를 얼마나 많이 '학습'하고 있는가 였다. 오피니언 리더라는 지식인들 사회가 그러했으니, 그들의 교육적 영향 아래 있는 학생이나 젊은 층은 물론이고, 좌파든 우파든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입장도 그 '지식'의 바운더리 안에서 지지고 볶고 했다.

아는 척 좀 하려면, 너나없이 서양 철학자 이름과 학설 몇개 쯤은 들이댈 줄 알아야 했다. 정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익숙하지 않아 좀체 온전히 납득이 가지 않던 그것들을 위해, 초등시절부터 소쩍새들은 그렇게 밤낮 없이 '암기' 경쟁을 해야 했나보다. 그래도, 도무지 문제제기 한 번 해볼 생각조차 못했을 만큼 당연한 것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정산서를 작성해보면 내 공식적 교육 인생 16년 중의 반 이상이 딱히 나의 웰빙한 삶에 큰 의미없는 저런 것들을 위해 돈과 청춘과 자존심을 '몰빵'하던 시절이었다. '우물 안'인 줄 모르고, '이불 밖은 추워!' 이러고 있었던 거다. 심지어 남의 집 이불 빌려와 덮고 있으면서.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똑똑함과 성공의 척도는 '자연세계로부터 먼저 탈출하는 순서'였다.


그러다가 언감생신 '코로나'로부터 사정없는 핵펀치를 맞은 것이다. '선진'과 '진리'의 전당이어야 할 서양 문명이 코로나에게 일망타진 당하는 생생한 현장 중계를 지켜 보는 그 맛은 잊을 수 없는 쾌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하는 오묘한 맛이었다. 그제서야 '이 길이 다~는 아닌게벼?' 싶기도 했고, '참, 세상은 다양하지?' 싶기도 했다가, '그런데 나는 왜 한 방향만 보고 있었던 거지? 아! 내 눈!!' 싶기도 했다.

이런 반성적 소회를 안고 나는 날잡아 책꽂이와 온라인 서점을 뒤졌고, 『노자』와 『주역』과 『장자』...와 <동아시아 고대사> 관련 책들을 다시 내 안구 범위 안의 세상에 펼쳐 놓게 되었다. 왜?


이토록 엄중한 전 인류적 <COVID19> 전선에서 코로나라는 놈을 본격적으로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있을 보다 거대한 실체와 정면승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지영감이 그 배후가 곧 '대자연의 이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헐~. 그러니까 그 놈과 대적하려면, 콧방귀 날리며 하수 취급했던 그 '대자연 세계의 운행 원리'를 일단 파악해야 된다는 것이다. 영어 문법 책은 일단 접어 놓고 자연계의 문법부터 터득하라는 것이다.  자연계 언어 습득용 문법책으로 신지영감이 강력히 추천해준 교본이 바로 『노자』와 『주역』과 『장자』...와 <동아시아 고대사> 였다. 


그런데, 오래 전에 서양 사람 프리쵸프 카프라도 『히든 커넥션』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미래의 사회구조를 설계하는 원칙은 자연이 생명의 그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화시켜온 조직원리와 일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물질구조와 사회구조의 이해를 위한 통일된 개념의 틀이 필요하다."


그 동안 물리학의 역사는 그런 '자연 진화의 원리'를 최대한 발견해내고 해석해내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과학의 몫이었다면, 인간의 몫-철학의 역사는 그런 과학의 발견의 토대에 걸맞는 새로운 사회의 초석을 놓고 건물을 세우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위적 기획'과 '기교'의 현란함에 눈이 멀, 자연이 허용해 준 그 건축의 범위와 용도를 벗어나 길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했다. 모든 걸 잃었다가 살만해지면 또 다시 들뜨고 교만한 마음에 자연의 길을 짓이기고 화려한 새로운 길을 내고 신종 바벨탑들을 쌓아 올렸다. 

그러다가 지금... 어쩌면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서야 그것들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새로운 길과 구조물들은 인간의 가상적 합의 속에서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적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는 걸. 대자연의 '코로나 미사일' 후려치기 한 방이면 산산히 부서져 버리는.


매혹적이고, 감동적으로 출발해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설계도를 완성했지만 종국엔 그 사상누각에서 거품처럼 사위어 간 한 사상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칼 마르크스. 그의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내 머리는 30여 년 동안 그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적 사유가 느닷없이 결정론적이고 목적론적인 '반자연적' 세계관으로 변질된 계기가 무엇일까?를 탐구하고 있었다. 

『주역』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찾아가는 여정은 맑시즘으로 정점을 찍은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철학들과 함께 한 내 젊은 날 사유의 편린들을 복기하고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획일적 가치 기준과 틀을 깨고 나와 다양한 대자연 생태계의 품으로 날아가는... 




전복의 출발은 여기서 부터다. 맑시스트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바꾸려 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변혁하겠다고만 했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1) 1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국가적인 시장과 국가라는 개념을 갖게 했고, 2차 산업혁명은 세계화를 가져왔습니다. 탄력성보다는 오로지 효율성에만 의존하죠.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는 단기이익만 추구합니다. 분기마다 수익을 내려면 장기투자, 장기계획, 중복장치를 구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팬데믹이 오면 전체가 타격받고 세계화된 인프라가 붕괴합니다. 전염병이 발생하는 순간 전 세계 인프라가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전염병으로부터 몇 가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 우리가 함께하지 않으면 다 같이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경향_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


2) (팬데믹은 우리의 숨겨진 편견과 혐오를 드러냈습니다. 서구에서는 아시아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가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고, 중국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막 퍼지기 시작한 아프리카에서 온 방문객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 뉴스는 점점 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여 이득을 취합니다. 혐오, 어떻게 작동하나요?)

마사 누스바움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드러낸 혐오와 편견이 이 세계에서 한순간도 숨겨져 있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종교적 혐오가 대량학살로 번졌던 2002년 3월 인도 구자라트주의 힌두교도들이 아마다바드의 거리에서 이슬람교도들과 대치한 채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있다. <경향_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


3)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_서정주> 


4)『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_프리드리히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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