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채우는 향수병과 내 첫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여름의 맛.
한 입 베어무니 노란 복숭아의 과즙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것을 보니 어느덧 여름의 중반이다.
집 근처 자주 들르는 슈퍼마켓은 늘 제철 과일을 입구에 배치해 놓고 큼지막한 가격표와 그 과일의 생산지 혹은 어떤 풍미를 전하는 과일인지 손글씨로 상세히 적은 안내문으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곳 미국에서의 어느덧 4번째 여름이다.
여름은 내가 태어난 계절이라 매년 반갑고, 나의 성장 앨범 속 환한 웃음과 하얀 앞니로 백도를 베어 문 행복한 6살의 여름을 담은 나의 어릴 적 모습을 상기시킨다.
지난 여름은 나의 첫 임신을 알았고 올여름은 그 뱃속에 조그마했던 생명체가 내 눈앞에 함께 있다.
작년과 올해도 그렇듯 임신 때문이었는지 혹은 출산 후 타지에서 향수병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곳에서의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여름의 시원한 제철 음식이 이따금씩 생각났고, 어쩌면 그 그리움이 배가 되었던 계절이었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름의 끝자락에 걸린 내 생일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여름 음식과 함께한 추억이 많아서 일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인 수박은 어릴 적 무던히도 저녁 식사 후 쟁반에 세모 낳게 담아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가족들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와그작와그작 베어 물던 풍경이 선명한 그 시원한 한 모금을 잊지 못하게 하고 태국에 살던 때에 길거리에서 나의 갈증을 가장 빠르게 해소해 주던 과일이다.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는 어릴 적 내 사진에서 여름날 시원하게 함박웃음 지으며 과즙을 줄줄 흘리며 먹던 그 기억만큼이나 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도는 달콤함과 새콤함의 조화에 또 한 번 날 추억에 젖게 하는 과일이다.
또한 콩국수는 엄마와 시장을 돌며 시장 한 귀퉁이서 쪼그려 앉아 계신 상인 아주머니가 투명 봉지에 시원하고 진한 콩국수의 내음을 담아 파시던 그 풍경과, 혹은 어른이 되어 친구들과 푸짐하게 나누어 먹던 서울 어느 유명한 맛집의 콩국수 맛이 기억나서 그립다.
냉면은 빠질 수 없는 나의 혹은 모두의 여름철 단골 메뉴일 텐데, 나에게는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와 내가 살던 도시의 중심가에 놀러 가 신나게 쇼핑하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는 돈가스 집에서 파는 오천 원짜리 냉면을 하나씩 먹는 것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겁고도 만족스러운 사치였다.
여름의 대표 음료 미숫가루는 우유대신 물을 넣고 널찍한 은색 사발에다 황설탕과 함께 얼음을 동동 띄워야 제맛. 꿀떡꿀떡 목 너머 넘어가는 중에 입안 속 간질거리는 미숫가루와 사발 아래 녹고 남은 설탕의 흔적이 나의 여름을 더욱 달콤하게 채워 주었다.
이렇게 여전히 여름 제철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나의 기억들이 선명한데,
길어지는 해외 생활에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어쩌면 예전만큼 자주 이 계절과 음식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갑자기 마음 한구 석이 허해질 때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여름 제철 음식을 더욱 자주 열심히 찾아 먹어본다. 그렇게 입안 가득 사소한 계절 음식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채우면, 그때도 오늘도 나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음식이고, 음식과 함께한 나의 추억임을 깨닫는다.
어느덧 창 밖 매미 소리가 선명하고 더욱 청량하게 들리는 해지는 저녁 무렵,
두 달 남짓 된 내 아이의 눈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서로 어떤 맛을 함께 나누고 어떤 시간을 만들어 갈까.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맛을 보여주고 어떤 기억을 선물할까.
아이는 그 맛을 통해 우리의 시간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며 자신을 정의해 나갈까.
내년 이맘때쯤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