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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Rachel Mar 18. 2021

준비하지 않은 이별을 대하는 법

사람, 장소와의 이별 그리고 퇴사.


때는 2020년 2월 중순, 한국 비행을 마치고 집에서 쉬던 때였다. 우한? 갑자기 한국 뉴스를 보는데 우한이라는 나라의 무슨 동물 시장에서 바이러스가 발발했다고 했다. 워낙 비행을 하면서 메르스, 에볼라, 지카 바이러스 등등 늘 어떤 바이러스 종류가 터질 때마다 방송문에 추가해가며 방송을 했던 적이 다반사여서 이번에도 그런 류의 바이러스 중 하나겠거니 하며 개의치 않고 넘겼다.

 

하지만 2월 말쯤 되니 왕복 비행이던 한국 비행에 승객 수가 점점 줄어들어 비행 스케줄이 수시로 변경되거나 취소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은 점점 현실이 되고 태국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 편은 차츰차츰 줄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다급하게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 반 , 그냥 태국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 반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이런 경우가 드물고 또 점점 최고 더위 시즌을 향해가는 태국에 반해 한국은 봄이 오고 있었다. 잠깐 지고 마는 그 벚꽃을 매년 비행하면서 때맞춰 본적이 거의 없던 나는 이때다 싶어 바로 간소한 짐만 싸서 , 좀 잠잠 해지면 다시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그 길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3월-10월 오랜만에 길게 느껴본 한국의 봄 여름 가을
언제나 아름다운 한국의 미.


꽃피는 봄에 온 한국은 따뜻하고 늘 그렇듯이 정겨웠다. 오랜 시간 타지 생활에서 늘 그리던 가족과의 시간이 너무 감사했지만 그 시간이 예상보다 더욱 길어지니 한편으로는 답답함과 불안함이 컸다. 즐기고 싶지만 마냥 즐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달이라도 금방 돌아올 것처럼 덩그러니 남겨두고 온 태국 집도 점점 그리워졌다. 태국 대사관은 달마다 강경한 입국 절차를 추가해 가며 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점점 어렵게 했고 결국 막바지에는 태국 대사관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나서야 거의 6개월이란 반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14일간의 호텔 격리와 함께 다시 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격리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태국 내 콘도 방 안에서 잠시 멍하니 그 공간을 돌아봤다.

코로나가 삼켜버린 보통의 날들. 무엇보다 재작년 결혼 이후 언젠가 퇴사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남은 1년 정도의 시간을 더 비행하며 함께한 크루들, 동료들과 천천히 이별을 준비할 참이었다. 하지만 다시 어렵게 돌아온 방콕은 같이 일하던 크루들에게 안부 인사 한번 더 나눌 틈도 없이 그렇게 이곳과 이별을 어서 준비하라고 재촉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태국의 여러 풍경들


언젠가 타국에서 일하길 결정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오래 머물던 공간을 떠나고 또 다른 종류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 날이 오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이별에 무턱대고 나 자신이 공격받지 않기 위해 약 7년 가까이 비행을 하는 동안 매 비행마다 함께 일하던 태국 크루들과 비행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늘 그 비행이 마지막일지도 몰라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승무원의 일을 하며 늘 어딘가로부터 떠나고 어딘가로 다시 도착하는 삶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번의 이별은 좀 달랐다.


격리가 해제되자마자 퇴사 절차를 마무리하고 나서 약 2개월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2개월이 그 어느 때 보다 내가 가장 '현재'에 머물렀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제'나 '내일'이 아닌 지금 바로 '여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간은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빠르게 흘러갔고 그렇게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듯 나에게 태국에서의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을 선언하고 언젠가 여행이 불과 몇 개월 전만큼 다시 자유로워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언제든 태국을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에 그 2개월의 시간을 하루하루 의미 있게 채워나가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태국 방콕에서 5년간 지내던 콘도



한 번은 태국 콘도에서 청소를 해주시는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쉴 새 없이 짐을 버리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어디로 떠나느냐고 물으셨다.

'저 회사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여기 태국이 너무 그리울 것 같고 언젠가 또 놀러 꼭 올게요 '

너무 그리울 것 같고 또 놀러 올 것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콘도에는 수영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끔 바람 쐬러 갈 때마다 아주머니와 안 되는 태국어로 가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은 한국을 가본 적은 없지만 한국 여자들은 피부가 너무 좋은 것 같다."라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태국서 오래 지낼 수 있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한국인을 좋게 봐주는 태국 사람들의 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다시 돌아온 태국은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하루는 아주머니가 내게 언제 떠나느냐고 물으시더니 떠나기 전 날 밤 콘도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깜짝 놀랐던 건 아주머니가 내 손을 살며시 잡으시더니 내일 한국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말을 거셨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조심히 가고,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 (찬 왕와 쿤 깝 까올리 펏 파이 촉디나~)라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 진심인 게 느껴져서 눈물이 한가득 고이는 걸 참고 "감사합니다" (컵쿤 막카)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꾸 가까워져 오는 이별에 꿋꿋이 버텨오던 내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 당시 가장 고마운 것은 동료들이었다. 아무래도 퇴사 후 한국에 있기보단 미국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할 참이었던 내게 동료들은 그 어느 때 보다 비행을 하며 '언젠가 다음 비행 때 또 봐요'가 아닌 '우리가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의 느낌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타지에서 가족만큼이나 강한 유대감을 준 것이 동료들이었다. 원래 어떤 것들은 잃어 보고 나면 혹은 그것을 더 이상 곁에 두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그것의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것 같다. 같이 지낼 때 먼저 더 손 내밀어 일상을 더 자주 나누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못해준 것만 자꾸 기억이 났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인생을 응원받고 따뜻한 작별인사를 건네받는 것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했다.   


나를 보내는 동기와 선배들의 눈에 보내는 아쉬움의 진심이 느껴질 때마다

“ 선배님 동기님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어? 하고 또 만날 거예요. 전 태국 좋아하니까 금방 또 올게요”라고 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나를 보내는 동기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마지막일 것만 같아서 자꾸 웃으면서 저렇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늘 어디론가 떠나고 또 도착하는, 이별이 잦은 내 인생이지만 결코 익숙한 이별이란 없었다.

마지막 공항에 마중 나온 동기들을 마주하고 늘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나도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나이를 먹어도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이별이란 없음을 느낀다. 그것이 사람과의 이별이든 공간과의 이별이든 그렇게 멀어지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매일 같이 이별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느낀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그곳, 그것들과 완벽하게 '머무르자'. 였다. 그리고 그것, 그곳, 그 사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면 이별도 다르게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 아픈 이별도 있지만 나를 한 뼘 성장시키는 이별도 있다고.


나는 곧 또 어떤 이별들과 마주할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순간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자. 오늘도 언젠가 마주할 이별을 위해 '오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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