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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Rachel Mar 28. 2021

봄이 오는 건 겨울이 있어서라고

미국에서 시작하는 첫 '봄'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어느덧 첫 달이 하루 남은 날 아침. 어느덧 정신을 차리니 새벽 녁 친구 부부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 부부는 너무나 고맙게도 주말 아침 꽤 이른 시간에 나를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영원히 가는 것도 아닌데 꽉 채운 짐들은 내 긴 여정의 무게를 말해주었다. 

워낙 태국에서 지내면서 남편과 태국 미국 간 장거리 연애를 할 때 미국에 있는 남편을 보러 혼자서 공항을 간 적이 많아서 친구 부부가 계속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괜히 주말 둘의 소중한 시간 빼앗 는 건 아닌가 싶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 부부는 아무래도 내가 긴 여정에 혼자 가는 것이 마음 쓰였는지 결국 바래다주었고 늘 무언가 남에게 쉽게 받는 것은 불편하던 나도 그 날만큼은 친구 부부의 배려 깊은 성의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워낙 늘 혼자 준비하고 혼자 무언가를 해나가는 게 익숙해서 몰랐다. 한 번쯤은 고마운 손길을 그냥 받는 것도 이제 자주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전할 수 있는 작은 보답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친구 부부와 언제가 될지 아직은 모를 작별 인사를 하고 경유 포함 약 19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오랜만에 도착한 워싱턴 댈러스 공항은 여전했다. 

약 6년 간의 장거리 연애 중 거의 3분의 2는 본의 아니게 많은 계절 중 유독 혹독한 겨울의 한가운데 이 곳을 방문했다. 회상해 보면, 추운 것은 딱 질색이던 내게 방문할 때마다 꽁꽁 얼어있던 미국의 땅만큼이나 이곳을 향한 내 마음도 늘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이번은 더 이상 잠깐 머물다 갈 여행지가 아닌 어쩌면 평생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태국에서 지낸 것 그 이상으로 꽤 오래 머무를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먹고 나니 도착해 나를 처음으로 맞이 해준 그 겨울이란 계절의 휑한 느낌과 모든 것이 방어적이고 닫혀있는 것만 같은 날씨가 더욱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또다시 오랜만에 조우한 미국이란 나라와 나 사이에는 그 여전했던 차갑고도 어색한 공항의 공기만큼이나 내가 이곳에서 잘 적응하며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약간의 설렘 그에 반해 오랜만에 만나 마냥 행복해하는 남편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 그 계절과 함께 머물렀다. 



한껏 맑아진 3월 미국 워싱턴 날씨
동네의 작은 공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특히 날씨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감정이 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날씨라는 특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내 감정을 쉽게 지배당하지 않아야지 하는 다짐을 몇 번씩 해보지만 우중충한 날씨는 괜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밝고 화창한 날씨는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나를 마냥 기분 좋아지게 하는 게 사실이다. 

태국이라는 한 계절만이 존재하는 어쩌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었던 그런 환경에서 오래 살았다 보니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진득하게 누린 적은 꽤 오래전이었던 것 같다. 

특히 비행을 하면서 잠깐씩 들르는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나 날씨를 풍부하게 누리고 가기는 좀 어려웠다. 더구나 3-4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의 벚꽃 시즌이 오면  벚꽃 축제로 물든 가로수길이나 집 근처 공원에 만개한 꽃들을 사진과 뉴스로만 보면서 그렇게 아쉽게 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렇게나 늘 좋은 날씨에 대한 갈망이 컸던 나는 당연히 미국에 도착해서 나를 맞이하는 춥디 추운 그 겨울의 스산함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약 1달 반 정도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바깥을 보면 눈이 내렸다가 약간 해가 비쳤다 흐렸다 비가 오다를 반복하더니 몇 주던부터는 아침에 일어나니 밝은 날씨를 더 자주 보여주었다. 꽁꽁 얼어 있던 땅이 녹아 눈 아래 숨어 있던 푸른 풀들이 각자의 색을 찾아가고, 겨울 두꺼운 롱코트 마냥 제각기 문을 단단하게 닫아 놓고 있던 동네의 집들이 창문을 열고 사람 공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얼어있던 내 마음도 봄이라는 계절을 천천히 맞이 하면서 이 나라와 이 공간에 대해 얼어 있던 감정도 나도 모르게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날이 풀리면서 겨울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드러나고 서툴지만 나도 하나씩 삶의 공간과 매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집 밖으로 나갔더니 안 본새 동네 곳곳에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있었다. 각자 다른 색과 모습을 하고 그렇게 새로운 계절인 봄의 기운을 마음껏 다 같이 환영하며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계절을 진득하게 누리길 꽤 오래 소망하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동네를 거닐며 마주한 아름다운 꽃들. 미국 사람들은 각자 자기 뜰에 다양한 꽃을 심어둔다. 봄이 오면 그들은 바로 집 앞에서 꽃을 볼 수 있다.
너무 예쁜 미국 가로수길 우연히 발견한 꽃나무 


계절이 주는 특유의 향이나 그 공간의 기운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억의 힘은 세다. 

미국에서 새롭게 처음 맞이 하는 봄의 계절을 완연하게 느끼면서 문득 작년 딱 이맘때 엄마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며 본 벚꽃이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도 그때의 기억과 함께 

'딱 작년 이맘때 같이 여기 보러 왔었는데, 올해 또 이만큼 폈어. '

하시며 꽃과 집 근처 풍경의 사진을 보내주셨다. 

불과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지구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가족과 새 삶을 시작하는 딸을 응원하면서도 엄마의 말끝에 큰딸을 향한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애정표현에 인색한 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족을 향한 마음은 같이 있을 때 보다 더욱 짙어지는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와 잘 어울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바라보면서, 문득 앞으로는 '이 계절이 좋고 저 계절은 싫어'라는 감정보다는 모든 계절을 그것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늘 봄과 같이 맑고 밝은 것만 있는 게 아니듯이 인생도 그런 것 같아서다. 추워서 싫고 더워서 싫고 가 아닌 그냥 그 계절 자체를 사랑할 줄 아는 아량이 길러지는 때가 오면 나도 내 인생에서 늘 좋고 밝은 것만을 가장 좋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어둡고 힘든 것도 그것대로 보듬으며 함께 살아 나갈 수 있는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한 발 가까워진 상태이지 않을까 싶다. 

바뀌는 계절을 그것 자체로 대하는 좀 더 성숙한 시선을 갈망하듯이 내 인생에 대해서도 조금 더 너그럽게 일 년 네 번, 긴 인생을 놓고는 수십 번 변화하는 그 계절의 변화 안에서 잠깐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여유와 지나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꼭 그것만큼은 지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3월 마지막 주말 화창하게 핀 꽃들과 공기를 맡으며 작은 계획부터 실천하기로 해본다.


1번.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이 계절을 함께 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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