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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Mar 07. 2019

경로당에도 일진놀이가 존재할까

어떤 집단의 어떤 서열

나는 거의 평생을 ‘여자 집단’에서 살아왔다.    


여중, 여고를 졸업했고, 대학 때도 학과 내의 남녀 성비는 1:3 정도였다. 방송작가라는 직업 또한 90% 이상이 여자다. 내가 그 사이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느껴온 바는 이렇다.


‘여자’란 정말이지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학창 시절 때부터 그랬다. 별 것 아닌 말 한마디에 토라지고 멀어지며, 눈물을 흘리며 ‘내가 미안했어’라고 사과하며 다시 가까워지기도 한다.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누구 한 명을 콕 집어서 따돌리기도 한다. 친구가 "나 뭐 달라진 거 없어?"라고 물을 때면 뿌리 염색을 했는지, 손톱 색깔이 달라졌는지를 눈치채 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한다.


(절대로 절대로 비하는 아니다! 나도 여자고, 실은 나도 '예민'하면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남자들 세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서열’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도 일진은 있었고 그 밑으로 보이지 않는 서열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서열은 교복 치마를 얼마나 더 허벅지에 달라붙게 입고 다니느냐, 담배를 피워봤느냐, 같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열이 결정되는 기준은, 지금 생각해도 잘은 모르겠다. 단지 그냥 하나의 ‘놀이’가 아니었을까.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학번’이 서열이 되었다. 흔히 위계질서라고 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배워야 하는 나이였다. 정말 신기하게도 여자가 많은 학과에서 특히 위계질서가 강했다. 학교 체육대회 때, 무려 100명의 인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는 동작으로 응원가를 부르는 유아교육과나 치위생과를 보고서는 입이 떡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서열’과는 거리가 멀 줄 알았던 직장에도 분명 그것이 존재했다.


어느 직장이나 그렇듯, 연차. 그것이 곧 서열이었다.    


방송작가는 대게 프리랜서고, 프로그램마다 옮겨가며 일을 한다. 자리를 옮기는 데는 종영, 졸업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그래서 근속은 거의 없고,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정도 일하면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정말 다양한 선배 작가, 즉 상사를 만났다. 요즘엔 방송작가의 위계질서가 많이 풀려가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곳도 분명 편 가르기 좋아하고, 서로의 예민함을 건드려선 안 되는 ‘여자 집단’ 임이 분명했다.    


만약 10명의 작가가 있으면 그 사이에도 '작은 무리'가 있다. 각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카톡방을 만들고,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알고 보면 그런 카톡방이 굉장히 많고, 대놓고 한 명을 따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분위기가 유난히 짙은 팀에서는 내내 불편한 눈치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근무를 해야 했다.


후배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고, 후배가 칭찬받는 게 못 마땅해서 “그 원고 내가 다 고친 건데?”라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서열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저건 질투다! 싶을 만큼 후배의 옷차림을 심하게 지적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액세서리를 하고 온 후배에게 잠깐 줘보라고 해 착용하더니, “어머 이거 나한테 더 잘 어울리지 않니?”하고 강탈하듯 얻어내는 대선배도 봤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나머지 후배들은 정말 잘 어울리신다- 하며 내키지 않는 박수를 쳐줘야만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많고, 말을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정보력이 곧 경쟁력이다-라고 생각해 우쭐해하며 선심 쓰듯 카톡들을 나르는데, 얼마 전 tvN 예능 피디와 여배우가 불륜 관계라는 찌라시를 퍼뜨린 게 모두 방송작가로 밝혀졌다는 기사를 보고는 정말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런 무리에는 도무지 섞이고 싶지가 않다.


나는 체질적으로 이런 부분이 정말 맞지 않아서, (사회 부적응자까진 아니지만) 그런 선배가 있는 팀에서는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어 겉돌곤 했었다. 한 번은 이런 면에서 나랑 생각이 잘 맞는 또래 작가와 일한 적이 있는데, 그 후배의 말에 따르면 심하게 일진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 학창 시절에 찐따였을 거란다. 과연 그런 건가. 잠시 수긍할뻔하기도 했다.


 "언니 오늘 너무 예뻐요", "역시 언니는 최고세요!"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생활이라면, 나는 정말 꽝이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나만 이런 게 싫은 건가? 내가 사회생활을 너무 못하는 건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경과, 강요당했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존경은 정말 그 색깔부터가 달랐다.


남고에도 여고에도 ‘일진놀이’는 존재하고, 형태는 다르지만 어느 직장이라도 ‘서열’은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많은 집단에서의 그것은 조금은 더 예민한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전에 할머니를 모시러 가기 위해 종종 동네 경로당을 찾았는데, 대부분의 날들이 할아버지는 없고 할머니들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그 경로당 내에서도 유치한 ‘일진놀이’는 존재할까.     


우리는 몇 살 때까지 '서열' 안에 살아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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